• 牌以密理, 유비 정치철학의 핵심
        2008년 12월 11일 10: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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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억수씨

    황건당의 봉기 이후 한나라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황건 농민군은 봉기 선언 이후 하북(河北)방면과 하남(河南)방면. 그렇게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각기 천자가 살고 있는 낙양성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농민 반란군의 진격로 상에 있던 주, 군, 현 지방정부는 풍지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며 절반은 농기구를 휘두르는 황건당이라지만 군사적 기반이 미약한 지방 정부가 수만명씩 몰려다니는 농민 반란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漢나라 대혼란에 빠지다

    지방 관군의 연전연패는 계속되었다. 농민군은 고을을 점령할 때 마다 오히려 수가 늘어나니 아무도 농민 반란의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가히 반란의 태풍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향 각지의 지방 현령들은 일제히 방을 붙여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민간 군사력을 동원한다. 기존 군사력만으로는 도저히 황건 농민군의 예봉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비가 살던 유주에도 이런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황건군의 군사 한 갈래가 유주성을 향해 서서히 진군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탁현의 누상촌에도 민간 의용군 모집을 알리는 방이 나 붙었다.

    유비는 그 방문을 읽고 집에 돌아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평소 같았으면 열심히 돗자리를 짜며 명상을 하고 있을 유비가 오늘은 유독 흙바닥에 뭔가를 쓰고 몇 시간 째 물끄러미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글자는 패(牌)라는 글자였다.

    ‘패(牌) !’

    사람들이 모여 있는 떼거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유비가 생각하기에는 모든 권력의 기초는 패(牌)에 있었다. 어떤 권력이건 그 시작은 작으나 크나 ‘패거리’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유비의 오랜 신조였다.

    모든 권력은 ‘패거리’에서 시작된다

    그 생각이 확실해 지자 유비는 다시 패이밀리(牌以密理)라는 네 글자를 썼다. 패이밀리(牌以密理) 즉 ‘패로써 이치에 다가간다.’ 는 뜻이었다. 이것이 유비식 정치철학의 유일한 핵심이었다.

    유비가 노식 선생의 문하에 있다말고 집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8년이 지났다. 유비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공부를 중간에 그만두고 일찌감치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원래 유비는 무슨 일이건 한 가지 일을 오래 못하는 성격이었다. 유비는 되도록 싫증을 자주 느끼고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해가 지나도록 유비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결혼도 안하고 집에서 돗자리나 짜며 저잣거리의 협객들과 여기저기 어울려 다니기만 했다. 그런 유비를 누구는 한량이라고 했고 누구는 동네 건달이라 했다.

    반면 유비와 함께 동문수학했던 공손찬은 사정이 달랐다. 공손찬은 노식 선생 밑에서 모든 공부를 끝까지 충실하게 마치고 정식으로 효렴(孝廉)에 천거되어 바로 유비가 살던 유주 탁현에 현령으로 부임해왔다.

    유비는 형님으로 모시던 공손찬이 자기 고을의 현령으로 부임하자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계속 노식 선생 밑에 계속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약간의 후회스런 마음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곧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내가 공부를 다 했다 한들, 어차피 나는 벼슬길을 끌어줄 아버지도 없었으니.. 어차피 지금보다 더 나아지지는 못했을 것이야..’

    유비는 그렇게 되도록 낙관적으로 생각하길 좋아했다. 살면서 별로 후회란 것을 해 본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유비, 장비를 구해주다

    그러던 중 유비의 일생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터진다. 어느 날 장비(張備)라는 사람이 탁현의 현위를 폭행해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현위의 상관인 현령 자리에 있던 공손찬은 그 장비라는 놈을 당장 잡아다 목 베려 했다.

    그러나 그가 워낙 힘이 장사였던지라 장비를 잡으러간 나졸들이 장비를 체포하기는커녕 오히려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왔다. 장비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고 있던 체포 대장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장비가 주막에서 술을 거하게 먹고 잠들었을 때에야 겨우 그를 체포해 관아로 압송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유심히 지켜 본 유비는 과감하게 현령인 공손찬에게 그 장비란 인물을 풀어달라고 요청한다. 공손찬은 장비가 분명 목을 베어야 할 중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시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던 후배가 하는 부탁이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손찬은 자신의 직권으로 장비를 풀어준다.

    이 때 큰 신세를 지게 된 장비는 유비를 형님으로 모시게 된다. 그렇다면 유비는 왜 일면식도 없던 장비를 구해 준 것일까? 그것은 바로 ‘패(牌) !’ 라는 유비의 독특한 철학 때문이었다.

    유비는 본래 가진 것 이라고는 숨겨둔 야심뿐, 아무런 자산도 없었다. 있다면 돗자리 짜는 손기술과 노식 선생님 밑에서 몇 년 동안 동문수학했던 동문들과의 좋았던 인연들, 그리고 유씨라는 확인불능의 잠재가치… 그런 것들 뿐이었다. 벼슬이나 재물이나 가문 같은 뭔가 현실에 도움이 될 만한 자산은 유비에게 전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가 유일하게 ‘패(牌) !’를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 조직원들에게 ‘마음’을 주는 것뿐이었다. 결국 장비라는 협객을 자기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유비는 공손찬으로 하여금 그를 살려주게 했던 것이다. 유비는 자기 평생을 통해 계속된 이런 수법을 스스로 감동의 정치(感動之治)라 불렀다.

    감동의 정치

    장비는 나이는 유비보다 한 살 어렸고 자는 익덕이라고 쓰고 있었다. 원래 선비 출신 집안에 태어났으나 어떤 이유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탁현의 누상촌까지 흘러들어온 다소 미지의 인물이었다.

    장비는 유비와는 성격상 크게 대비되는 인물이었다. 장비는 성격이 호탕하고 감정표현이 매우 직설적이었다. 그가 현위를 죽도록 두들겨 패고 죄인이 되어 끌려가게 된 것도 이런 불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유비는 자신과 반대 되는 생각을 만나도 ‘응응응..’ 하면서 넘어가는 성격이었던 반면, 장비는 자기가 옳다고 믿으면 대놓고 상대를 밀어 붙이는 성격이라 탁현의 누상촌 일대에서는 장비와 한 번씩 티격태격 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비는 게다가 자기 집안 전통적으로 전해내려 온다는 무예까지 상당 수준에서 연마하여 주위 사람들은 장비를 이래 저래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이런 장비를 전부터 보아오며 ‘저 사람을 내 동료로 만들 수 있다면 ..’ 하는 생각을 가져왔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장비를 구해줄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어 유비는 장비로 하여금 자신에게 큰 신세를 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수성가형 인물, 장비

    장비는 아무 관계도 없던 유비가 왜 자신을 구해 주었는지? 처음에는 의아해 했지만, 이내 그것이 어떤 뜻인지 알아차렸다. 장비는 단지 포악하고 무식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 단지 성격이 직설적이었을 뿐, 오히려 장비는 힘든 가정환경을 잘 극복하며 살아온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생활력도 뛰어나 어려운 속에서도 조금씩 재물을 저축해 어느 정도 경제력도 갖고 있었다. 유비에 비하면 훨씬 솔직하고 훨씬 부지런하며 훨씬 성실한 인물이었다. 단지 어려운 생활 조건 속에서 거친 삶을 살다보니 자연스레 직설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다툼이 많았던 것이다.

    누상촌에 ‘황건적을 진압하고 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겠다’는 방이 붙은 것은 그렇게 장비와 유비가 형제의 의를 맺고 서로를 잘 알고 지낼 쯤 이었다.

    유비는 자신이 전부터 알고 있던 누상촌의 일부 동생들과 장비 패거리의 힘을 모아 독자대오로 황건적 토벌단에 참여할까? 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 였다. 평소에 어울려 다니던 아우 하나가 소리치며 유비의 집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현덕 형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장비형이 큰 싸움판을 벌이고 있어요! 이번엔 사모(창의 일종) 까지 들고 나갔어요”

    “뭐라고?! 그렇게 불필요한 싸움질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또 누구랑 싸운다는 얘기야?”

    장비의 싸움질

    유비는 약간 짜증을 내면서 장비를 말리기 위해 후다닥 말을 타고 뛰쳐나갔다. 그렇게 막상 장비가 누군가와 결투 중이라는 작은 언덕에 올라가 보니 벌써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싸움 구경꾼만 수백 명이 몰려있는데 정말로 장비는 말을 탄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상용 무기까지 들고 정식으로 결투를 하고 있었다. 사정은 그 맞은편에서 같이 싸움이 붙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장비보다 더 큰 무기를 들고 준마위에 떡 버티고 앉아있는 모습이 꽤나 위풍당당해 보였다.

    잠시 유비가 멀리서 그 싸움판을 들여 다 보니 그 둘은 정말 씩씩 거리면서 서로 죽일 듯이 어울려 싸우기를 수십 합 째 하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두 사람의 귀신같은 솜씨에 집단적으로 넋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가만보니 유비가 봐도 참으로 구경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무기를 자기 몸의 일부처럼 아주 부드럽게 쓰고 있었다. 둘 다 기골이 장대했으나 그들의 무예는 마치 말 위에서 춤을 추듯 부드러운 몸놀림을 하고 있었다. 흡사 큰 날개를 펼치고 훨훨 나는 두 마리의 두루미처럼 두 무사는 큰 소리를 내면서도 나긋나긋 어울리고 있었다. 몰려든 수 백명의 구경꾼들은 누구하나 말릴 생각도 없이 다들 그 신묘한 싸움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때였다. 싸움을 말리러 왔다가 잠시 구경꾼이 되어 있던 유비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앗 차 ! 내가 이걸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하동 사람, 관우

    유비는 얼른 말을 몰아 싸움판의 한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두 남자의 중간에 서자마자 다짜고짜 자기편인 장비를 먼저 꾸짖었다.

    "야! 이놈 장비야! 내가 그렇게 싸움질을 하지 말라고 말했거늘 이제 와서 고아(高雅)하신 선비분께 웬 창질이냐?"

    장비는 갑자기 등장한 유비의 꾸짖음에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당 자기편인 줄 알았던 유비가 자기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갑자기 나타나 되레 자기에게 욕을 하고 있으니 말문이 막혀 눈만 꿈뻑거릴 뿐이었다.

    “나는 유현덕이라 하오. 이 자는 내 아우 장비외다.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은 모르겠지만 공께서는 내 아우가 저지른 죄를 용서하시고 싸움을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유비가 장비와 싸우던 남자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싸움을 말리려했다. 그러자 비 오듯이 땀을 흘리며 씩씩 거리던 그 남자는 안색이 달라졌다. 사실 그 남자는 남의 동네에 와서 예상 밖의 호적수를 만나는 바람에 약간 궁지에 몰려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상대 진영에서 나타난 놈이 되레 같은 편에 대고 욕을 하고, 자신에게는 부드럽게 나오자 방금 전까지의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같이 인사를 했다.

    “나는 하동에서 온 사람으로, 성은 ‘관’이라 하며 이름은 우, 자는 운장이라 하오.”

    유비가 가만 보니 긴 창을 들고 말위에 앉아 있는 그 남자는 키가 9척이나 되어 보이고 얼굴색은 무르익은 대춧빛을 하고 있으며 관상은 길쭉한데 수염까지 세로로 길게 길러 얼굴이 더 길어 보이는 영락없는 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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