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의 필수 조건 한 가지
        2008년 12월 05일 12: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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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5일) 한글 인터넷 어디에선가 "중국에서 생계형 데모 증폭, 공산 정권에게까지 위협"이라는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기사 제목을 정확히 기억 못하지만 어쨌든 요지는 그것이었습니다. 그걸 보니 쓴 웃음이 나옵니다.

    중국에 생계형 민란이 언제 없는 시기라도 있었나요? 고성장 시대였던 작년만 해도 약 3백만 명이 가담하는 등 산발적인 민중 항쟁들이 계속 이어져온 것입니다. 사실, 민주적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관가 앞에 모여서 관가의 유리창이라도 깨부수는 것은 부정부패 등 여러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체제 전복이 그리 쉬운 줄 아십니까

       
      ▲ 지난 달 중국 남부의 한 완구공장에서 임금 등의 문제로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중국 경찰이 진압하고 있다. 

    유리창을 깨뜨려야 윗선에서 일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현대판 ‘안핵사(按覈使)’를 보내 주모자들에게 벌을 주는 한편 도둑질이 정도를 넘은 지역 간부들을 좀 손볼 것이고 일부 민원을 풀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산발적 항쟁들이 체제를 무너뜨린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체제의 작동 방식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어찌 모르시는가요? 그리고 체제 전복이란 정말 그렇게 쉬운 줄 아십니까?

    지금 중국에서 성장률이 10%에서 6~7%로 내려서 문제가 생긴 것이지만, 제가 체험한 1990년대의 러시아에서는 아예 공업 생산량이 약 50%로 떨어져 버렸어요. 대다수의 근로자들이 생존도 보장해주지 않는 월급을 받게 됐고(그 월급마저 계속 밀렸고), 연금생활자들은 아예 기아의 선으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민생고’ 차원을 넘어 참극이었죠.

    그러면 혁명이 일어났나요? 글쎄, 곳곳에서 작은 혁명의 시도들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1993년 10월, 모스크바 길거리에서의 무장 항쟁은 가장 유명합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한 다수의 러시아인들은 그저 ‘생존의 전선’에 뛰어들었을 뿐이었어요.

    일부는, 저처럼 온갖 아르바이트로 밥벌이를 도모한 ‘자기 착취형’이었고, 상당수는 술과 마약, 범죄 등 ‘자기 파괴형’을 선택했고, 소수는 장사판을 벌려 새로운 자본가 엘리트 속으로의 편입을 도모했고, 또 상당수는 (나중에 저도 그랬듯이) 그냥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민초들의 적응 방식, 생존 방식들은 아주 다양한 것이고, 아무리 체제에 의해서 잔혹한 조건에 처해지게 돼도 어떻게든 피눈물을 흘리면서 헤쳐들 나갑니다.

    기아의 시기 북한 인민을 보라

    북한을 보시지요. 대기근 시기 20만 명에서 2백만 명까지 추산되는 중생들이 고통스럽게 죽고 나서 남은 이들은 텃밭으로, 장사판으로, 만주행으로, 매춘으로, 무엇으로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습니까? 나중에 우리가 그 피나는 노력들의 전모를 알게 되면 아마도 죽음으로 내몰려진 이들의 ‘살 의지’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거에요.

    그러나 많게는 총인구의 7~8%가 배고파 저승으로 떠난 이 무서운 사회에서는 혁명은 고사하고 대형 소요 사태라도 일어났는가요? 답을 다들 아시니 굳이 말을 안해도 됩니다. 그리고 그 이유 중의 하나를 밑에다 제시해보겠어요.

    ‘백성이 힘들어서 혁명이 일어난다’는 등식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 전혀 성립되지 않아요. 백성이 힘들면 발버둥쳐서 살기도 하고, 아주 안돼서 배고파 죽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 곧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한 가지 필수 조건이 있어요. 다름이 아니라 ‘국가 폭압 기구의 내파/돌연적 약화’입니다.

    1917년의 러시아나 1918년의 독일처럼 무의미한 살육에 지칠 대로 지친 군인들이 총부리를 진짜 적, 즉 자기 장교 쪽으로 돌리든지, 1945년의 조선처럼 식민지 국가 그 자체가 깨져버리든지, 1870~71년의 프랑스처럼 독일한테 아주 심하게 얻어맞아서 내부 폭발의 조건이 마련되든지 어쨌든 ‘권력의 공백’이 필요합니다.

    그 틈새가 생겨버리면 그걸 ‘혁명적 권력’으로 채우면 됩니다. 즉 ‘이중 권력 상태’의 전제 조건이 생기는 것이죠. 그런데 지배자들이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대량 아사 상태로 진입한 북한에서 당이 아닌 군을 우선시하는 선군 정치가 펼쳐졌습니다.

    선군정치의 배경

    혹시나 백성이 들고 일어나기만 한다면 그들을 싹쓸이할 수 있게끔 군을 특권적 위치에 놓은 것이죠. 1917년2월 페트로그라드에서처럼 배고파 데모하는 여성들을 향해서 발포하라는 명령을 군인들이 거부해버리면 그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돼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 취한 조치입니다.

    한국이 아직도 다소 후진적 정치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지배자들의 폭압 기구에 대한 의존이 거의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폭압 기구에서 파열음이 나면 윗쪽에서 아무래도 머리가 아주 아플 것입니다.

    지난 촛불집회 때에 2명의 의경들이 상부의 명령이 아닌 양심의 명령을 좇아 데모 진압을 거부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경우가 2명이 아닌 2,000명이었다면 이명박 씨가 아무래도 망명지를 좀 알아봐야 할 상태가 됐을지도 모르죠. 시위대와 의경이 하나가 된 군중이 청와대를 향해 간다… 이건 벌써 저들에게 악몽 중의 악몽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의 발생 확률이 아직도 매우 낮아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굽신거리기만 잘하면 만사형통하여 입신출세라는 걸 유치원때부터 잘 가르치고 초등학생부터 점수 경쟁을 시켜버리면 교과서에서도 안나오고 선배들도 이야기 안한 일을 나중에도 잘 안하게 돼 있습니다.

    일제 때부터 잘 만들어놓은 노예교육… 저들이 요즘 일제의 ‘근대화’에 만세를 부르는 걸로 보면 그 노예교육을 뿌리내리게 한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긴 갖나 봅니다.

    그런데 한국은 지배의 방식이 아직도 폭압에 매우 의존하는 만큼 폭압 기구의 내파와 이에 따르는 아주 재미있는 일들의 이론적 가능성이라도 있지요.(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서구는 그것도 거의 없으리라고 봅니다. 폭압 지배가 아니니까요.

    프랑스 공산당과 노조 그리고 혁명

    파리의 1968년5월~6월을 기억해보세요. 드골이 군대에 이야기해봐야 진압에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진정시키고 학생들을 고립시킨 일등공신은 누구이었습니까? 맞아요. 바로 공산당과 대형 노조이었지요. 그들에게야말로, 그들이 근로대중과 지배자 사이의 ‘조절자’의 유리한 역할을 하는 이 체제는 대단히 몸에 맞은 것이죠.

    그리고 노조 관료를 욕하기 전에, 노조 관료들이 따낸 20% 임금 인상이라는 체제와의 타협을 받아들이고 공장에 복귀한 그 당시 프랑스 대형 공업 노동자들의 의식 세계를 생각해보시죠. 위험하게만 보이는 ‘자율에의 모험’보다 관리인에게 복종을 하는 대가로 ‘편안한 여가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을 그들도 결국 선택한 것이 아닌가요?

    선진 사회에서 근로대중들이 그들의 계급적 이익에 훨씬 민감해지는 것은 맞아요. 임단협 때에 1~2% 임금 인상률 차이로 의견을 좁히지 못하면 몇 주간 파업할 수도 있고 그렇죠. 그러나 과연 그들이 임금 인상 이상의 진전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가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한번 실사구시적으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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