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때 아닌가?
        2008년 12월 03일 09: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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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LA현지 교민과의 간담회에서 "지금 주식사면 1년 안에 부자 된다"고 했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야당에서는 ‘증권브로커나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사회 각계에서도 모든 경제 지표가 하향세를 그리고 있는 판국에 그런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펴는 것은 오히려 국민의 정부에 대한 불신만 가중시킨다면서 그의 경솔함을 질타하고 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이 대통령은 "나라면 펀드를 구매하겠다"고 해서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진보진영, 독자적 해법과 담론 형성해야

    이 대통령의 이런 행동은 그의 경제 위기에 대한 진단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줄곧 이번 경제 위기를 유동성 위기, 신용경색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즉 문제는 돈이 잘 돌지 않는다는 것, 금융권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가 회복되고 돈이 돌아간다면 곧 경제는 원상회복될 것이라는 거다. 그래서 국민들은 정부와 시장을 신뢰하고 주식에 투자하고 펀드에 가입하고 하면 위기가 쉽게 끝날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금의 대거 투입과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 협정체결로 잠시 안정을 찾는 듯하자 정부는 이제 위기는 끝났다고 진단했지만 불과 열흘이 지나면서 다시 주가가 1000포인트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달러 환율은 1500원을 오르내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이미 금융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실물 경기지표가 급격하게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영악한 투자자들은 선뜻 주식시장에 뛰어 들어오지 않고 있다. 거기다가 외국인이 대거 한국 주식시장에서 이탈해 있는 상태이다.

    흔히 이번 위기의 진원지라고 하는 미국도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정확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가 불투명하다. 이미 연방정부 차원에서 2조 달러가 넘는 돈이 금융권 지원에 투하됐지만 위기해결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위기는 총체적, 전지구적, 체제적

    얼마나 더 쏟아 부어야 될지도 모르고 또 그렇게 한다고 위기 해결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미국에서도 금융위기라고 했지만 이미 거의 동시적으로 각종 실물 경제지표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미국이 진원지라고 하지만 동시적으로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아이슬란드,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등이 IMF구제금융을 신청했고 다른 나라들이 줄줄이 신청 대기하고 있다. 내년에는 세계 경제성장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국내에서도 이미 외국 증권사에 이어 국내증권사인 삼성증권이 한국의 내년 경제성장에 대해 마이너스 전망치를 내놓았다. 동시에 거의 모든 언론에서 내년 봄이면 대규모 구조조정과 실업, 기업과 가계의 파산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보도되고 있다.

    국내외에서 이번 위기와 관련한 원인과 전망에 대한 논의들이 줄을 이었다. 대체로 경과와 원인에 대한 진단은 이러하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부르주아 학자들과 언론의 진단이다.

    먼저 경과를 보자. 미국에서 90년대 닷컴 버블이 꺼지자 그 자금이 대거 부동산으로 몰렸다. 또한 부시의 선동에 따라 경제적 능력이 없는 많은 미국인들이 모기지에 의존해서 대거 집을 샀다. 부동산 투기 붐이 일었다.

    이와 함께 클린턴 행정부 때 소위 루빈 사단에 의해 투자은행의 상업은행 겸용 법안이 통과되면서 부동산에 모인 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생 상품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결국 빚으로 자산을 늘렸으나, 이자상환 부담을 견뎌내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린 저소득층들에 이어 이들이 담보로 제공한 부동산 값이 폭락하자 프레디맥 등 모기지 업체가 파산했다.

    뒤따라 모기지 업체가 판매한 금융상품으로 각종 파생 금융상품을 개발한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 그리고 이번 위기 본격화의 시발점인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의 파산, 메린린치의 합병,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 AIG의 구제신청 등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세계적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분석과 해법만 난무

    원인들에 대한 진단은 이렇다. 무엇보다 월가 CEO들의 탐욕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험을 가중시킨 파생상품의 문제고 이를 통제하지 않은 FRB와 그린스펀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를 그대로 방관한 미국 의회의 무능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린스펀은 미 의회 청문회에 나와서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이론에 결함이 있었음을 시인하고 파생상품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했다고 했다. 이제 이번 위기의 원인과 주범이 규명된 것 같다. 신자유주의다.

    그래서 일련의 개혁주의자들과 소위 개혁적 성향의 언론들로부터 신자유주의에 대한 성토가 더 힘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안은 케인즈주의다.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금융 통제와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줄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규제를 더 풀고 시장만 믿으라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도 쏟아졌다. <한겨레>, <경향신문>, <프레시안> 등은 부시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경제학자이고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의 진단을 싣는가 하면 케인즈와 하이에크의 가상 대담도 싣고 이정우 등 신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전직 관료와 학자들의 주장을 줄곧 인터넷 판의 톱기사로 올렸다.

    필명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논객이 인기를 끌고 있다. 정보기관으로부터 위협 까지 받자 그는 정말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소위 주류 언론에서도 그의 경제 예측을 주요 기사거리로 올리고 있다. 정보기관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는 증권업에 종사한 일이 있고 외국에 체류한 적이 있는 50대 초반의 남자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경제전망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예측했지만 극복될 수 있는 위기를 이명박 정부가 단순히 정책적 잘못으로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점점 더 사태를 악화시킨다고 했다. 그는 절필 선언을 하면서 막스 베버를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이를 통해 예측해보건대 그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신뢰만큼은 이명박 대통령만큼이나 강한 것 같다. 

    자본의 본질적 속성 들여다봐야

    그런데 진보진영 내에서의 논의도 이 이상의 내용과 전망을 가지고 활발히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치 케인즈주의적인 원인분석과 해법이 진보진영의 시각인 것처럼 보여 지기도 한다. 간간히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번 위기를 진단하고 그 해법을 찾아야 된다는 주장을 펴는 진보적 인사들도 보인다.

    논자들마다 차이점은 있지만 금융자본의 속성,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를 거론하며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이번 위기가 파생됐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논의의 폭이 대중적으로 확대되지 않고 한계지워져 있는 만큼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천 대안 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린스펀은 FRB 의장 재직 당시 날로 확대되어 가는 파생상품의 위험성에 대한 미국 의회 의원들의 질의에 대해 리스크는 일상적이라고 답변했는데, 그의 이 같은 답변은 뒤에 바로 이번 위기 국면을 조성한 안일한 사고방식과 잘못된 경제정책관의 상징적 일화로 이야기 되곤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정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의 문제 뭉치들이 은폐된 채 실타래처럼 엉켜져 있는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리스크는 일상적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금융위기라고 했던 이번 위기는 이미 세계적으로 전 실물경제 영역으로 퍼져 재빠르게 총체적 위기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번 위기가 금융시장의 일시적 교란으로 인한 것이라면 정부의 적절한 개입으로 수습되고 안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의 과도한 집중과 거품

    그러나 지금 상황은 전혀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미 미국에서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2조 달러가 넘는 돈을 쏟아 부었지만 수습될 기미는커녕 오히려 전 경제 영역에 걸쳐 위기 국면이 확산되고 있으며 수습 전망도 경기 전망도 매우 암울하다.

    문제는 오히려 보다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은 그 속성상 지속적으로 이윤율을 유지, 상승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미 이윤율 제고의 한계에 부닥쳐 과잉 축적된 자본은 끊임없이 높은 이윤율을 찾아 이동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영역과 국경, 각종 규제 틀 등 일정한 안전장치(?)의 빗장마저 쉽게 풀고 이윤을 좇아 발 빠르게 움직인다. 닷컴으로 부동산으로 옮겨 갔다. 자본이 과도하게 몰리면서 실제 가치 이상의 거품을 만들어낸다.

    높은 이윤을 실현하기 위해서 실질적인 가치에 기반 하지 않고 순전히 모기지에 의존한 가짜 신용에 의해 일시적인 고이윤율이 유지됐다. 그러나 곧 실체가 드러났다. 자본은 기대한 이윤율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

    요술방망이처럼 갖가지 신용을 창출하면서 가치를 부풀려 온 파생상품은 허깨비임이 드러났다. 위험을 분산시키고 줄인다는 월가의 각종 금융기법은 다만 위험을 일시적으로 은폐시키는 수단에 불과했다는 것도 드러났다.

    모든 걸 신자유주의 탓이라 하면 안돼

    즉 이번 위기는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인 생산과 소비(생산된 가치의 실현)의 분리,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이윤율의 한계에 부닥친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통해 일시적으로 위기를 벗어나며 돌파구를 찾은 자본이 또 다시 본질적인 한계에 부닥친 것이다.

    20년대 말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이 2차 세계 대전을 맞으며 엄청난 파괴, 군수물자에 대한 막대한 수요, 이후 전후 복구사업, 위기와 전쟁 국면에서의 노동 진영에 대한 탄압으로 이윤율을 제고시키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던 자본이 1970년대에 이르자 미국을 중심으로 성장 동력이 소진되자 그 위기 탈출구로 나온 것이 신자유주의다.

    그런 점에서 닷컴으로 부동산으로 끊임없이 자본이 몰려다닌 것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생 금융상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위기 탈출을 위한 자본의 한 속성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위기의 근본 문제를 오로지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틀 안에서만 바라보고자 하는 잘못된 시각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번 위기를 금융위기로 한정하고 신자유주의와 파생상품, 월가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정부의 잘못된 정책 탓으로만 돌린다면 해법 역시 케인즈주의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진보진영의 독자적 분석과 해법, 담론 형성해야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당장 반자본주의 혁명투쟁으로 떨쳐나서자는 말인가? 모든 문제가 다 자본주의 때문에 발생했다고 하면서 자본주의 환원론적으로 설명하려들고 실천적 대안 없이 공허한 이념 논쟁만 남발한 것은 이미 20년 전에도 충분히 하지 않았는가?

    그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남한 내의 진보진영조차도 한편으로는 사회주의권의 몰락에도 영향을 받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 신화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정서적으로 동화되고 포섭되어가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최근에 와서 사회주의나 반자본에 대한 주장을 너무 아끼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최근 진보신당의 제2창당 논의에서 그나마 정종권 집행위원장이 캐치프레이즈에 사회주의 또는 반자본을 넣자고 한 것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글에서 실천적 대안까지 다 제시할 수도 없고 또 어쩌면 그럴만한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도 못하다. 이 글을 쓴 것은 다만 당면한 위기 국면에서 진보진영이 나름대로 이 부분과 관련한 독자적 담론을 형성하고 그 논의를 대중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든 많은 전문가들이 이번 위기는 70년대의 경제 침체는 물론 30년대의 대공황을 능가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

    어떤 논자는 자본이 30년대의 위기를 케인즈주의를 통해서(?), 70년대의 불황을 신자유주의로 넘어선 것처럼 이번에 또 한 번의 레짐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폴 크루그먼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도 총자본의 대응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정세가 그처럼 심각한 만큼 진보진영에서의 논의 역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분석과 해법에 기초한 담론을 분명히 넘어서지 않으면 더 이상 진보진영이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사회는 현실 속에서 창조적으로 구성해 나가는 것

    그리고 한 가지 여기에 덧붙이고자 한다. 왜냐하면 진보진영의 이데올로기적 혼란과 관련될 수도 있고 사회주의 이념의 방향성과도 일정 정도 연관되는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최근 사민주의(?)와 관련된 주대환씨의 글 2편이 <레디앙>에 게재됐다. 

    앞에 한 개만 읽고 뒤에 것은 읽지 않았다. 솔직히 다 읽자니 너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먼저 밝히거니와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다 읽지도 않고 그것도 생비난을 하려고 하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차근차근히 다 읽고 근거를 대면서 비판하는 게 올바른 태도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런데 내가 그의 글에 대해서 차분히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부르주아 매체에서다. 적어도 여기 진보 매체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이런저런 근거를 대며 부르주아 매체에 비판하는 글을 투고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그를 역겨운 감정으로 비난하거나 아니면 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논리를 전개하지, 그의 잘못을 증명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주대환씨의 앞 편의 글을 읽어 본 감상은 한마디로 개념 구성부터 60~70년대의 반공주의 이념의 복사판에 민주주의니, 실용주의니 하면서 약간의 이명박식 현대성을 덧칠한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훼절한 운동권 인사들이 중심이 된 <시대정신>에 그 글이 실리기도 할 것이고 또 거기에 실리기에 아주 적절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진보진영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주창하면서 어떤 이는 소련, 어떤 이는 중국, 또 어떤 이는 북한을 전범으로 하여, 변혁의 방식과 지향에 그것을 유용하게 참조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꿰맞추려는 경향이 있었고 거기에 덧붙여 인맥관계가 얽히면서 파벌을 형성하였다.

    주대환의 문제점

    어쩌면 NL이니 PD니 ND니 하는 정파들도 그로부터 출발했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그 이전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구별되는 것은 공상적 사회주의가 어떤 이상적인 사회를 설정해 놓고 거기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 하는데 반해 과학적 사회주의는 현실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데서부터 미래의 사회상을 구축하고자 하였는데 있다.

    한국에서 그런 공상적 사상가들 중 일부는 소련이 붕괴하는 것을 보고 좌절하고 사회주의적 이상에 절망했고 북한의 현실을 접하고 그들의 성정에 맞지 않자 반대의 길을 걸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서부터, 우리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을 진보운동의 시발점으로 한 사람은 그런 것이 자기를 절망케 하고 신념을 포기하도록 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시대정신>의 어떤 주요인사는 한 때 북한의 열렬한 예찬자였지만 언젠가부터 마치 분풀이 하듯 누구보다 철저한 반북 인사가 되었다. 북한은 그대로인데 북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바뀌었다. 나는 그가 북한에 대해 열 올려 비난하기에 앞서서 오히려 생각이 바뀌었다면 그전의 경솔한 자기 판단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 앞서야 된다고 생각한다.

    주대환씨는 그와 정치적 주장에 차이가 있었지만 가는 길은 매우 닮아 보인다. 진보진영에 있다가 힘들어서 그런 삶을 포기하고 성실한 소시민으로서 살아간다면 그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최근 한나라당 신 모의원의 행동에서 보는 것처럼 한 때 자기와 같은 이념적 지향을 가졌던 사람을 끝까지 철저히 파괴하는데 온 정렬을 쏟는 사람이 있다.

    주대환씨의 행태도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당면한 국면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우익세력의 진보진영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에 일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글을 마치며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현존하고 있는 특정한 어떤 사회가 아니다. 과거의 사회주의 국가가 주로 봉건제 사회에서 갓 벗어나면서 이루어졌고 그 때의 자기 과제들에 일차적으로 집중한 탓에 우리가 당면하게 추구하고 지향하는 사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미 훨씬 더 높은 생산력 수준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자주적 각성의 수준도 훨씬 높다. 또한 새롭게 등장한 많은 과제, 의제들도 있다. 민주주의의 내용도 훨씬 더 풍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환경, 생태 문제,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미혼모, 노인 문제, 갖가지의 발전된 민주적 제도와 장치 등등.

    사회주의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결코 비뚤어진 욕망으로 가득 찬 세상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딱하고 재미없고 융통성 없는 사회도 아니다. 그런 사회주의는 만들어서도 안 되겠지만 만들 수도 없다. 그런 사회주의는 대중들의 마음을 끌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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