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의 아들은 전장에 나가도 되는가?
        2008년 12월 02일 09: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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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교회가 저희 불교와 늘 좋은 교류 관계를 가지고, 또 종교계가 하도 혼탁스러운 대한민국에서는(교회를 개인적으로 소유,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비교적 ‘상식적’이고 ‘깨끗한’ 이미지를 지니기에 호감을 갖고 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제약이 있기에 <경향잡지>에서 제 글이 2008년12월호에서 약간 축약된 모습으로 게재되었기에 여기에서 그 전문을 냅니다.

       
    ▲ 필자

    예수님이나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보면 군주권/권력을 필요악으로 보고 "황제에게 황제의 것을 돌려주자"는 식으로 약간의 타협성을 보여도 전쟁만큼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거의 4세기 초기까지 기독교인들의 참전이 없어 보이는데, 그 뒤로는 국교가 돼서 이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바로 초기 기독교의 비타협적으로 반전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오늘날 양심적 기독교인의 과제가 돼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기독교도 아닌 불교도로서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게 다소 외람될 수도 있는데, 우리와 친구가 돼야 할, 또 제가 상당히 좋아하는 이웃 종교이기에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초기 기독교, 전쟁은 무조건 반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글을 보내달라는 청탁에, 처음에 망설였다. 자본주의•국가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인, 정의와 사랑이 원천적으로 결여돼 있는 이윤추구 체제에 적응한 어느 종교조직도 태생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지 않을 수 없지만, 종교학자 최준식 교수 (이화여대)도 일찍이 지적했듯이 국내의 종교조직 치고 가톨릭교회는 그나마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될 만한 소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보기만 들자면, 불자로서 필자에게 중요한 사실이 가톨릭교회가 불교와 화목한 교류관계를 맺어 ”종교간의 상생”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을 이야기하자면, 전쟁과 평화, 폭력과 비폭력 저항의 문제를 보는 국내 가톨릭교회의 시각에서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유구한 역사의 숨결도 해외교회들과의 유기적 관계성도 느낄 수 없다는 부분이다.

    20세기에 군사적 폭력에 가장 멍든 사회라면 분명히 두 쪽으로 갈라져 아직 평화협정도 맺지 못하고 있는 한반도부터 이야기해야 하지만, 이 폭력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 힘을 국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서 얻기가 힘들다는 것은 한탄스러운 일일 뿐이다.

    전쟁, 폭력이란 예수의 교회에 있어서 애당초부터 ‘우상숭배’, 즉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로마제국의 어용종교와 거의 같은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였다.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시킨 교부 테르툴리아누스 (155-222)도 예수를 따르는 ‘평화의 아들’이 전장에 나갈 일이 없다고 주장한 바 있었지만, 대체로 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평화주의와 병역거부는 다수 초기 기독교인들의 굳은 자세이었다.

    단,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국교화되자 교회와 국가 사이의 타협의 일환으로 교회가 신약의 가르침에서 분명히 없는 ‘의전'(義戰: 정의로운 전쟁)의 논리를 받아들여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 능력을 일시적으로 잃게 된 것이었다.

    전쟁은 우상숭배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 5:29)는 말씀이 망각됐을 때에 교회는 결국 상처를 입어 만신창이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주 등 비(非)유럽 지역에 대한 서구 자본주의의 침략에 편승하기도 하고 그 침략을 선교의 이름으로 합리화한 것도 교회로서 씻겨지기 어려운 죄악이 됐지만, 독일 가톨릭들과 프랑스 가톨릭들이 서로를 전장에서 죽이게 된 제1차세계대전과 같은 상황들은 새삼 교회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을 많은 신자들에게 일으켰다.

    이 세계에서 최대의 종교조직이라 할 가톨릭교회마저도 그 신자들이 각자 세속 정부들의 명령에 따라 서로 죽이게 되는 사태를 예방할 수 없다면 신자 개개인이라도 예수의 평화정신을 따라 제 양심을 살려야 하지 않는 것인가?

       
    ▲ 1962년 10월 로마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회식 광경

    이와 같은 반성이 제1, 2차 대전 사이, 그리고 그 뒤에 축적된 결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는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유의미한 결론을 내려 개개인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권리를 신앙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그 덕분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많은 미국 가톨릭들의 병역거부가 미국 주교회의의 지원을 얻어, 1970년에 이르러 가톨릭계 거부자들이 전체 거부자들의 8%나 됐다. 이와 아울러 1980년대 이후에 전쟁에 대한 바티칸의 입장도 많이 분명해졌다. 지금의 이라크 침략은 물론이거니와 1990-91년의 제1차 걸프 전쟁도 교황청이 반대해온 것이다.

    물론 예수와 초기 기독교인들의 평화정신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이것보다 훨씬 더 수위가 높은 전쟁 반대가 필요했을 것이지만, 교황청의 반전 입장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좋아할 일이 없는 중남미, 아프리카 등 수많은 주변부 국가들에서의 신자들에게 환영 받았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이와 같은 평화주의적 자세를 교회가 취하지 않는 이상 세계 체제의 주변부, 준(準)주변부 빈민들이 신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오늘에 과연 그 교세를 유지라도 할 수 있겠는가?

    유독 한국 가톨릭은…

    그런데 준(準)주변부의 국가 중에서는 가톨릭들의 반전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작았던 한 나라가 있는데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라크 침략이 시작됐을 때에 한국 주교회의는 평화 촉구 성명서 (2003년2월14일)를 내는 등 세계 가톨릭 교회와 보초를 맞추었지만 국내 정치적 문제로서의 이라크 파병을 다룰 때에 교황청보다 훨씬 더 보수적, 그리고 거기에다가 상당히 자가당착적 입장은 일부 고급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확인됐다.

    한국 가톨릭의 최고의 권위인 김수환추기경이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서, 이라크 전쟁 자체는 잘못된 전쟁이라고 전제를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병문제에 대해 노대통령이 나에게 물었을 때 이라크의 평화를 위한 파병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평화를 위한 봉사단 성격으로 파병할 것을 권했습니다. 다만 그들이 공격받을 때를 대비해서 자위수단의 병력은 가야 할 것입니다.

    이라크 문제는 이라크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평화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이라크는 석유보유국이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라크에 평화가 복구되도록 이라크 자치정부 수립을 함께 걱정해야 합니다.” (김추기경의 인터뷰, <경향신문>, 2003년11월24일)

    생각하면 할수록 비(非)논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전쟁 자체가 침략이었다면 침략국의 편에 서서 파병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평화와 복구’를 위한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침략국의 편에 서서 파병된 한국 군인이 이라크 애국자들의 공격을 당해 “자위수단”으로서의 화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이는 침략 동참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겠는가?

    세계 교회가 이라크 침략을 반대했을 때에 한국교회의 가장 존경 받는 어른은 예수의 평화정신을 배반하고 가톨릭교회의 비극적인 역사의 교훈들을 무시하는 침략 옹호의 주장을 피력한 것이었다.

    평화정신의 또 하나의 축인 병역거부 등 적극적 반전 행동의 차원에서도 국내와 국외 교회의 온도차가 뚜렷하다. 아직까지도 미국에서의 철저하게 반전적, 병역거부 지향적 가톨릭 노동자 운동과 같은 대규모 좌파 가톨릭 단체들이 국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일부의 기능을 정의구현사제단 등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서 태어난 가톨릭 사제 단체들이 담당하지만, 그 역량의 한계가 있어 가톨릭 교회의 전체적 보수성을 깨뜨리기에 역부족인 듯한 느낌이다. 그러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분명히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대체복무제에 대한 국내 가톨릭의 입장도 놀라울 정도로 ‘온건'(?)하다.

    대체복무제에 대한 한국 가톨릭의 놀랍고도 온건한 입장

       
    ▲ 김수환 추기경
     

    2002년3월에 김수환추기경이 <교육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국가의 안보를 크게 해치지 않는다면 병역 의무에 못지않은 사회봉사로 대체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대체복무를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라도 천만다행이지만, “국가 안보를 해치지 않는다면”라는, 종교인보다 정치인에게 더 어울리는 전제와 “강력한 요구” 대신에 단순히 “괜찮다”고 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구미 가톨릭에게 보기 드문 무관심을 나타낸다. 실제로 지난 2005년10월19일에 가톨릭 청년 고동주가 국내 가톨릭으로서 최초로 병역거부를 선언한 바 있었는데, 그에 대한 교회의 제도적 지원이 너무 취약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폭력을 거부한 이들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다 죄가 있는 만큼 예수의 재림까지 전쟁의 위협이 계속 임박할 것이다. 그러나 죄악을 사랑의 단결을 통해 지워버릴 수 있다면 폭력도 아울러 정지시킬 수 있는 것이다…” (“Non possumus non laudare eos, qui in iuribus vindicandis actioni violentae renuntiantes.. Quatenus homines peccatores sunt, eis imminet periculum belli, et usque ad adventum Christi imminebit; quatenus autem, caritate coniuncti, peccatum superant, superantur et violentiae”).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의문을 충심으로 실행할 만큼 한국 교회가 과연 그 특유의 보수성을 약간이라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사유제와 사유제가 부추기는 탐욕, 가족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전쟁을 모두 다 거부한 예수의 – 진정한 의미에서의 – ‘공산주의적’, 즉 사랑으로 뭇 존재들을 아우르는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많아져 제도권에서의 안주의 관습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폭력 정지에 대한 바티칸 제2공의회의 말씀이 한국교회에서 공염불로만 남지 않을까 걱정이다.

    * 이 글은 제가 청탁을 받아서 가톨릭 교회의 <경향잡지>를 위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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