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은 왜 여성으로 둔갑당했나
    2008년 11월 28일 11: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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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가장 오랜 기록의 방식이었다. 문자를 만들어 쓰기 이전부터 인간은 자기가 본 것, 보고 싶은 것, 본 것 가운데 남기고 싶은 것, 본 것을 나름대로 해석한 것, 보지 않고 그저 상상한 것, 보았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 등등 온갖 것들을 그림으로 남겨왔다.

   
 ▲영화 <미인도> 포스터

그리는 이의 눈과 손을 거친 그림은 보는 이 밖에 있는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린 이의 시선과 생각을 더듬어 보도록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에 남겨진 동물들을 보면서 빛도 들지 않는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만 년도 넘는 세월을 살아낸 말이며, 소, 사슴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막연히 ‘소가 있네. 말도 있군. 사슴도… 저기 사람도 보이고…’라고 넘겨 버리는 대신 도대체 누가, 왜, 언제,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이 그림들을 그렸을까를 궁금해 한다.

우리가 그 참 모습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오랜 옛날의 사람들이 보았고 느꼈던 세상을 그림 하나만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림으로 남겨진 시절에 대해 기어코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또 사람의 마음이다.

그림은 문자와는 다른 이야기 방식이다. 보고 그린 이가 분명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림을 그렸으련만 그 속내는 아무리 그림을 들여다보아도 알 길이 없을 수도 있다. 그림은 생생하게 남아있으되, 그린 이의 생각이나 그려진 대상의 내력을 알 길이 없을 때조차 사람들은 한사코 그 속내를 알아보고 싶어 한다.

그림에서 영화로, 차연

그 호기심이 사실의 추구로 가면 미술사가 되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이야기의 외전이 된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확장하고, 집요하게 부추기는 데 영화도 한 몫을 한다.

화가가 살았던 시대와 화가의 삶, 그리고 작품이 영화와 만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외전이요, 또 다른 그림이 되면서 그림과 화가와 지금의 시공간을 새로 엮어내면서 또 다른 차연(差延. 자끄 데리다의 비평용어. 차이와 지연 – 편집자 주)으로 미끄러진다.

그 미끄러짐이 카메라의 렌즈를 거치고 스크린에 비춰지는 것이 받아들여진다면 그건 그 차연을 욕망하는 시대와 관객을 통해 영화가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기 때문이며, 싸늘하게 거부당한다면 그 차연이 영 시답지 않다고 무시되면서 아무런 텍스트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인도>는 혜원 신윤복과 18세기 조선의 풍속, 그리고 지금 시대의 관객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영화다. 이 영화에 관객이 몰리면서 영화를 둘러싸고 노출 장면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주인공의 성별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여부가 논란이 되는가 하면, 영화와 같은 시기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비교되면서 영화 <미인도>는 요란하게 차연의 텍스트를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 <미인도>와 KBS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 역을 맡은 배우 김민선(왼쪽)과 문근영
 

거기다 영화 바깥에서 “최근 신윤복을 영화와 드라마, 언론들이 갑자기 띄워 신윤복 신드롬을 만들어 내는 이유를 파악해주기를 바란다. 이 두 개의 작품에 이상한 여배우들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있다”면서 김홍도와 신윤복을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인물로 묘사한 것은 필시 국가 전복 정신을 부추기는 배후에 의심스러운 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떼조차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상업영화는 남의 자본을 수십억씩 들여 만들어지는 위험부담 상당한 상품이다 보니 남녀의 애정과 갈등, 그것도 기왕이면 후끈 달아오르는 노출 장면이 들어갈 소재를 고르는 것은 영화기획과 제작에서 기본의 기본이다. 가능하면 이색적인 소재, 그러면서 익숙한 갈등구조로 낯선 듯 익숙한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상업영화에서 흥행을 보증하는 안전망인 것이다.

여성, 상업영화의 안전망

그러니 신윤복이 여자라고 해보자, 그래서 김홍도와 밀고 당긴다고 해보자, 그런데 둘이만 밀고 당기면 너무 뻔하니 삼각관계, 아니 사각관계로 가보자. 일단 배경으로 그림 좋으니, 그 그림들에서 이야기 좀 엮어내고, 몇몇 장면들은 화끈하게 뽑아보자.

그러면 이야기 좋아하는 여성관객이며 야한 장면 좋아하는 남성관객까지 확실하게 불러들일 수 있겠다는 계산이 있어야 투자며 배급을 수월하게 잡을 수 있었을 것이요, <미인도>의 기획에서도 그런 상업적 밑그림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 ‘혜원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고 합시다’라는 것은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라고 하는 것처럼 시장논리에서 비롯된 아이디어지 역사적 자료와 사실관계를 추구하는 연구의 결과는 아닌 것이다.

그런만큼 <미인도>나 <바람의 화원>이 실제의 혜원이나 단원, 정조 대의 조선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영화에서 문제 삼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어차피 영상에서 재현되거나 참조되는 그림들은 실제 작품들을 고스란히 빌어온 것인 만큼 그림의 작품성이나 해석이 큰 문젯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림을 두고 어떤 이야기를 풀어냈으며, 그 이야기를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다.

하필 두 작품 다 ‘혜원 신윤복이 사실은 여자였더라면’, 그래서 ‘단원 김홍도와 농밀한 성적 긴장 관계를 맺었더라면’이라는 가정에서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를 둘러싼 논란도 신윤복 역을 맡은 ‘여배우들’의 정체성이며 가족사까지 들먹거린다.

   
 ▲영화의 한 장면
 

직접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이나 영화며 드라마에서 비중이 만만치 않은 김홍도 역을 연기한 배우들은 다 남자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혜원 신윤복은 여성의 몸을 빌어 재현되는가가 결국 차연의 텍스트를 엮어내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신윤복에 대해서는 그의 삶에 대해 시시콜콜한 역사적 기록이 몇 자 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한국 풍속화를 대표하는 작품들만으로 이미 대단한 화원임을 우리는 배워왔고, 인정해왔다. 김홍도의 작품이 그 시대 일상 속에서 사람들 하나하나의 개성과 표정을 보면서 웃게 만든다면, 신윤복의 작품은 그 시대의 은밀한 애정과 일탈을 훔쳐보면서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든다.

화풍과 관심이 남다르고, 그걸 그림 속에 이야기로 풀어내는 재주가 신통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인물이 지금 시대에 와서 정체성을 위장한 인물이 되어서야 관심이 대상이 된 까닭은 자명하다.

조선에서 현대로, 남성중심성

우리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남성 중심의 역사로 조선사회를 기억하려는 이 사회는 통념을 벗어난 그림을 그리고, 역사적 기록에서 사라져버린 인물을 여성화함으로써 지금 이 시대가 얼마나 남성중심적 사회인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로 남성으로 위장했을 때는 화원으로서 사회적 역할도 수행하고, 수제자로서 인간적 대우도 받고, 자식으로서 가문의 일원임을 인정도 받지만 위장을 벗고 여성성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은 신윤복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의 실상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인 것이다.

여성이 사람대접을 받는 것은 오로지 명예남성으로 처신할 때뿐이라고 새록새록 일깨우고, 자기 안의 여성성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가혹한 처벌뿐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또는 남성적 시선을 유지하지 못하는 남자는 능력 여부를 떠나 가차없이 여성과도 같은 처절한 대우를 받게 될 거라고 위협하는 것이다.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영화 <미인도>가 보고 느끼고 그려낸 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가 여성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크게 비판을 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거나. 선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현재의 의식 수준을 드러낸 솔직함이 대중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면서 차연의 텍스트로 미끄러진 것이다.

여기에 화들짝 놀란 보수 남성주의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렇게 스스로 이야기를 뻗어나가는 텍스트는 당연히 불온한 것일 수밖에. 그러나 영화는 기계복제시대의 문화형식이니 아무리 애써도 어두운 동굴 속에 묻어둘 수가 없다.

컴컴한 극장 안에서도 스크린만은 밝은 빛으로 관객의 의식과 시선을 매혹시키면서 극중 혜원의 입을 빌어 ‘흔들리고, 사랑하고, 유혹하는 모습이 아름답노라’고 멀티플렉스 방식의 배급망을 타고 사방에서 속삭이며 명예남성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주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한다.

   
 ▲영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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