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을 긍정한다
        2008년 11월 27일 03: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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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사회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을 긍정한다

    여운형은 남북한 양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서거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분단의 책임을 물을 수가 없고 따라서 좌절된 꿈속의 통일정부의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그가 만약 남북에 단독 정권들이 서고 분단이 확정된 후에도 한 동안 살아있었다면, 결국 어떤 형태로든지 남한 정부에 참여했을 것이다.”

    몽양은 자주 영국노동당을 언급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세계인의 예상을 뒤엎고 전쟁 영웅 처칠을 꺾고 단독으로 정권을 잡은 애틀리 노동당 정부는 그에게 큰 격려였다.

    그는 영국노동당을 자기가 만들고 싶은 정당의 모델로 생각했다. 그리고 영국노동당의 집권을 가능하게 한 영국의 민주주의를 부러워하고 찬미했다. 그러므로 그는 근본적으로 서방의 사람이었고, 결코 소련식의 일당 독재체제에 참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냉전이 시작되어 미소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좌우합작 노선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몽양이 입지를 넓혀 건국을 주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분단과 남북 단독 정권 수립으로 치닫는 와중에 앞장서지는 못했더라도, 추인이든 차악의 선택이든, 대한민국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조봉암과 홍명희

    우리나라 역사에 두 사람의 비극적인 인물이 있어서 여러 가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조봉암과 홍명희의 경우다. 홍명희는 민족주의자로서 북한 정권에 참여하여 부수상을 역임하는 등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 조봉암(왼쪽)과 홍명희
     

    우파인 그가 의외로 월북을 한 것은 “친일파와는 자리를 함께 하지 말라”는 부친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남한 정부에는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친일파들이 주도 세력의 하나로서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좌파인 조봉암은 남한 정부의 초대 내각에 참여했다. 그는 민주주의자로서 남한을 선택한 것이다. 좌우 양극단이 사생결단하는 상황에서 개인들이 냉정한 판단력을 유지하는 것도, 자기의 선택으로 운명을 결정짓는 것도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이를 전제로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홍명희의 선택에 대해서도 물론 이해할 수는 있지만, 조봉암의 선택이 더 합리적이고 근대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사회민주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조봉암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한은 다당제와 삼권 분립,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헌법에 명시하였다.

    물론 처음부터 헌법이 잘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라도 하나하나 실현되어 나간 것은 처음에 방향을 잘 잡았기 때문이다. 다당제와 삼권 분립, 독립 언론의 존재는 처음부터 거의 절반 이상은 실현되었다.

    인류의 발명품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 중의 하나인 다당제와 삼권 분립, 독립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가 없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인간에 대한 불신에 기초하고 있다.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믿는 것이다.

    소인배(小人輩)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감시하게 해놓는 것이 군자(君子)들에게 전권을 맡겨두는 것보다 나은 결과를 얻는다는 점을 지난 60년간의 남북한의 변화 발전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농지개혁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중국이 1979년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면서 기적적인 속도로 경제 성장을 하기 시작했지만, 한국은 중국에 비하여 30년이나 앞서서 농지개혁을 했던 것이다.

    당시에 중국의 공산화를 보고서 농지개혁의 불가피함을 인정한 미군정 당국이나 국내 우익 세력들의 동의로 추진되었지만, 그 ‘예방 혁명’의 결과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농지개혁, 예방혁명의 성과

    농민들은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심지어 달이 밝은 밤에도 부지런히 일해서 자식을 먹여 살리고 소 두어 마리를 키워 아들 중에 하나는 고등학교에, 대학교에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독립 경영자로서 온갖 지혜를 짜내었느니 그들 가운데서 미래의 기업가들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는 농지를 분배받은 소농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대한민국 발전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게 한 최초의 원동력이라고 본다. 아니 한국 경제를 발전시킨 가장 근원적인 힘이라고 본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많은 피해를 주었지만 동시에 마지막 남은 전근대적 신분 질서의 잔재를 일거에 청산하여 양반 귀족을 일소하고 사회 문화적으로도 전 국민이 평등한 나라를 구세계(舊世界) 최초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그 후의 발전 과정에서도 후발자의 혜택을 충분히 누려서 국민건강보험을 비롯하여 4대 사회보험이나 공교육 제도, 지방자치단체나 공기업이 공급하는 상하수도와 전기와 가스 등 공공서비스를 갖추게 되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바로 이런 부분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조세제도를 중시한다. 그리고 이를 훼손할 수 있는 움직임을 경계한다. 박정희는 한 세기 전에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했던 것처럼 부국강병을 추진하면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복지제도의 기초도 일부 닦았으니, 사회민주주의자는 그의 이러한 역사적 역할을 인정한다.

    사회민주주의자가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이유는 현실주의 철학으로부터도 연유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 현실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사회민주주의자 선언]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먼저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의 국민을 사랑하고 대중과 함께 나아간다. 그러므로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는 대한민국을 현실로서 긍정한다.”

    이어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60년 역사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60년 전,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면 당연히 통일된 진보적 민주주의 나라를 만들어 독립하리라는 소박한 믿음은 미소 대립의 냉전 체제 속에서 배반당했다. 그러나 이후 탄생한 남북한 두 나라는 비록 이념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반쪽짜리 분단국이었지만 새로운 발전의 씨앗을 내재하였다.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독립운동의 도덕적 자산을 더 많이 물려받아 이상적 노동자 농민의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그리고 남쪽의 대한민국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대다수 민중의 오랜 염원인 토지개혁을 하고 보통선거권을 실현함으로써 현대 국가로서 손색이 없는 나라로 건국되었다.

    그러나 지난 60년의 역사는 역설과 모순에 가득 찬 현실 변화의 드라마를 보여주면서, 한편에서는 국가사회주의 프로젝트의 파산이 극단에 도달하여 일당독재, 일인독재 하에서 수백만 인민이 굶주리는 사태에 이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토지개혁의 심대(深大)한 효과에 힘입고 노동자 농민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놀랄만한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그를 물질적 기초로 하는 6월 시민혁명과 민주화를 실현했다.”

    5. 사회민주주의는 한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유력한 사상, 정치 세력이 아닌 경우는 드물다.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다. 물질적 조건을 중심으로 본다면 아직도 상대적으로 성장률이 높고 빈부격차와 양극화도 진행이 덜 되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정책과 복지국가의 필요성이 덜 절박한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단계는 이제 끝이 보이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은 압축 성장, 불균형 성장으로 이제 막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만큼 덩치는 크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이에 불과한 사춘기 청년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과연 조만간에 한국에서도 사회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는가? 사회민주주의는 한국의 사상계와 정계에서 유력한 세력이 될 수 있을까?

    그리하여 한국도 다른 나라들처럼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양대 세력을 중심으로 사상계와 정계를 재편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매우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이 정상국가로 가는 하나의 징검다리이며, 진정한 선진국으로 갈 수 있을지 여부를 가르는 몇 가지 조건들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지금과 같은 비생산적이고 국민 생활과 동떨어진 이념적, 정치적 대결구도로서는 과연 한국이 선진국으로 갈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좌우 구분은 “친북이냐, 반북이냐”를 주된 기준으로 했다. 거기에서 파생하여 반미와 친미, 반일과 친일 등으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그러니까 좌우를 가르는 이데올로기적 준거는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얽혔다.

    이는 매우 독특한 현상이고, 무엇보다도 국민의 생활과 ‘먹고 사는 문제’와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우리나라 정치의 바탕을 이루는 지역 문제와 얽혀 매우 비생산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을 연출하였다.

    만약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중심으로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갈등을 수렴한다면 국민의 현실적인 고민과 걱정들을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대변하고, 그에 응답하여 희망과 비전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양대 세력으로 재편돼야

    그렇게 하면 우리나라는 사상, 정치적으로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을 것이며 지식인과 정치인은 ‘지도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 문제가 아닌 사회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좌우 대결이 펼쳐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우리나라가 여러 모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미국의 경우는 다소 색다른 점이 있으니, 유럽만큼 좌우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 민주당은 강력한 급진 자유주의 전통을 근간으로 사회주의적 요소를 흡수 가미하고 있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미국의 진보주의자는 리버럴(Liberal)로 불린다. 영국의 노동당과 미국의 민주당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비슷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사는 매우 다르다.

    한국은 미국과 사회경제적, 문화적 특수성에서 비슷한 점들이 많아서 역시 사회민주주의가 성장하기 힘든 여러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가 미국사회당을 통해서 미국 토양에 독자적인 뿌리를 내리는 듯하다가 양당 체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뒤늦게 대공황이라는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루즈벨트라는 뛰어난 지도자를 통해서 민주당으로 그 주장과 정책이 흡수되어 들어갔던 과정을 재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회민주주의가 뿌리 내릴 가능성과 전략을 살피려면 먼저 사회민주주의 자체의 강점과 약점부터 살펴야 할 것 같다.

    사회민주주의는 우선 지식인들에게 매력이 없다는 점이 약점이다. 세계 일류 지식인들의 책을 읽고 논하고 싶은 지식인들에게 사회민주주의는 재미없고 해묵은 이야기, 아니면 이미 다 아는 이야기, 또는 현실이 되어버린 재미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세계적으로 철학과 담론을 이끌어가는 일류 지식인들은 대부분 선진국에 살고 있으며 그들에게 사회민주주의란 재미없는 이야기, 일상이 되어버린 그 무엇,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 주제인 것이다.

    그래서 사제(師弟) 관계로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사회민주주의는 매력이 없다. 또 지식인들과 자주 어울린 노동자들에게도 별 거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운동권’ 출신들에게 사회민주주의는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권 출신들은 젊은 시절 혁명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아 사고 구조와 관념이 형성되어 있는 탓에 사회민주주의라면 ‘합사개(합법주의, 사민주의, 개량주의)’ 또는 ‘배신자 카우츠키’라는 말부터 떠오른다.

    사민주의 지식인 조금만 나서면 노동운동에서 반길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사회민주주의는 지식인들이 식민지성, 종속성을 벗어나고 관념성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데 필요하고, 몸속의 독을 빼내는 해독제로서 훌륭하다. 발 딛고 서있는 한국의 구체 현실에 대한 관찰과 연구로, 대중과 함께 이 시대를 살고자 하는 지식인들에게 사회민주주의는 필요한 영양제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는 지식인 사회의 풍토를 혁신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강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유연성과 포용성, 현실 적응력, 관용, 실용주의 등이다. 그래서 실무 공무원들이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정서에 맞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도 맞다.

    노동운동은, 특히 민주노총은 아직은 주체사상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사고가 고정된 먹물 출신 활동가들의 영향 하에 있지만 조합원 대중을 이루는 노동자들은 이미 사회민주주의적인 의식과 정서로 물들어 있다. 그들의 생활과 생활상의 요구가 그리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인 사회에서 약간의 세력만 형성하여 나아가면 노동자들, 노동조합 간부들은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다”고, 오히려 “기다리는 데 지쳤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운동과 손을 잡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정치권에서도 하나의 주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정치구도 역시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세력화에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 여당과 차별화를 해야 하는 야권은 사회민주주의 정책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최근의 민영화, 종부세 논란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사회민주주의는 남북한 주민을 통합시키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념으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경우를 보더라도 브란트라는 뛰어난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의 ‘동방정책’이 통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사회주의 나라라고 자칭하는 동독보다 ‘더 사회주의적이고’ 노동자가 더 살기 좋은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동독 사람들의 물결을 장벽 하나로는 막을 수 없어서 마침내 통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독일 통일의 교훈은 우리나라도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다소라도 실현되어야만 평화적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보다 더 사회주의적인 사민주의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으며 앞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푸는 데 사회민주주의가 가진 철학과 경험이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 일관되고 현실적이고 의미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둘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는 점점 사상계와 정계의 주요한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대한민국은 발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미, 또는 한-EU FTA나 세계화라는 문제를 푸는 데 자유주의자들의 이론과 역사적 경험이 주도를 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사상은 사회민주주의뿐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스웨덴, 덴마크와 핀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세계화를 주도했던 경험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 ‘의료산업’을 육성하여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고 자유주의자들이 말할 때 국민건강보험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해야 상충하는 시대적 과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

    한국은 비슷한 경제적 발전 수준에 있는 나라들과 비교하여, GDP 대비 국가예산의 비중은 절반이고, 국가 예산 중에서 복지 예산의 비율은 다시 절반 수준이다. 그렇다면 선진국 평균 수준으로 가려고 하더라도 복지 예산의 규모는 네 배 늘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노령화나 양극화나 출산율 저하 등 복지의 확충을 요구하는 많은 사회 문제들이 밀려들고 있다. 바로 ‘복지국가’가 필요한 발전 단계에 한국 사회가 와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러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였다는 객관적 조건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보편적 복지국가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래서 해마다 각 언론사에서 여론조사를 하면서 “우리나라가 미국과 같은 자유주의 선진국으로 가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우리나라가 북유럽식 복지국가로 가기를 바라느냐”를 물으면, 이 어려운 질문(지식인들은 그렇게 느낀다!)에 대해서 놀랍게도 대다수가 답을 하고, 또 절묘한 차이로 북유럽식의 복지국가로 가기를 원한다는 사람이 미국식 자유주의 선진국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사람보다 많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는 지식인 사회에서보다는 노동운동에서, 노동운동보다는 정치의 영역에서 더 쉽게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좁은 울타리에서는 다소 어려움을 겪더라도 대중의 바다로 가면 많은 지지자를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용기를 가지고, 100년을 내다보면서 자신의 이념에 헌신한다면 반드시 역사와 시대가 자신에게 지운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보수ㅡ자유 양당 체제가 너무 오래 뿌리를 내리고 있는 탓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독자적 정당을 만들어서 정면 돌파로 정치구도를 뒤바꾸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보다 슬기로운 정치 전략과 열린 마음과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지적이고 정책적인 영향력으로 정치세력의 열세를 보충하면서 점차 야권 내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헤게모니를 행사해야 할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좌파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은 좌파의 업그레이드로 귀결될 것이다. 또 이러한 좌파의 업그레이드는 우파의 업그레이드와 동시에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친북좌파-수구꼴통이라는 상호 비방과 적대, 불인정, 불신 구도를 타파하고 선진국형의 좌우 대화와 소통, 인정, 신뢰의 구도를 형성하기 위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는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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