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릴라전이 필요하다”
        2008년 11월 24일 03: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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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어 부쩍 ‘파시즘의 부활’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다. 독일이나 이탈리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의 장래를 놓고도 이런 불길한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개중에는 한국 사회가 필연적으로 파시즘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거나 아니면 이미 이명박 정권 자체가 파시즘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진단도 있다.

    필자는 이런 진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아무래도 과장이나 호들갑이 좀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우려가 모두 다 쓸 데 없다거나 아주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니다. 적어도 대혼돈의 시대에 한국 자본주의가 보여줄 수밖에 없을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분명 예언자(점쟁이가 아니라 구약성서의 그 예언자)의 경고를 담고 있다.

    너무도, 너무도 경직된 한국 자본주의

       
    ▲ 필자

    그 경고의 대상은 한국 자본주의의 참을 수 없는 경직성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산업화 과정에서 비롯된 경로 의존성이라고 하던데, 한 마디로 박정희 시대에 체질이 된 특정한 자본 축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중간 중간에 사뭇 심각한 변화도 없지 않았다. 10년 전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경험한 변화가 그 대표적인 예다. 다시 그 10년 전에 시작된 민주화 역시 심원한 변화의 계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시간의 마디에도 불구하고 군부 독재 정권 시기에 형성된 관성들은 의연히 지속되고 있다. 그 기본 골격이 크게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새롭게 이식된 요소들과 결합해 그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토건 국가의 양상이 그 한 예다. 이미 50여 년에 걸쳐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건설 산업이 경기 조절의 가장 중요한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이명박 정권이 특별히 무식해서 삽질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이러한 유구한 전통을 가장 솔직하게 대변하는 것일 뿐이다.

    지배 계급의 문화에도 부동산 투기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부동산 불로 소득으로 점철된 시초 축적의 신화가 대를 이어 지배층의 뇌리를 지배한다. 97년은 이 대물림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도약대가 되어주었다. 지난 10년간 본격 수입한 전 세계적 재테크 문화는 토착 투기 문화에 보편성의 외양을 더해주었을 따름이다.

    경직성의 요소들은 이것만이 아니다. 수출 대자본의 성장에 사회의 다른 모든 요소들을 희생시키는 약탈형 축적 구조, 농업과 농촌의 지속적인 파괴,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지역간 불균등 결합 발전 구조, 향락산업 등 룸펜적 요소로 내수를 지탱하는 전반적 부패화 경향 등등. 이런 것들이 이제껏 한국의 지배 계급이 경험하고 학습한 유일한 생존과 번영의 방식이다.

    어쨌든 이들은 이런 구조와 관성으로 1960년대 이래 한 세대 이상을 버텨왔다. 70년대 세계불황으로 인한 위기도 이런 식으로 견뎌냈고, 80년대 중반에는 3저 호황이라는 짤막한 영광의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또한 민주화와 노동조합의 도전도, 97년의 악몽도 어찌어찌 넘길 수 있었다.

    한데 이 모든 궤적의 이면에는 세계사의 압도적인 배경이, 그 강력한 버팀목이 존재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등장에서부터 후견자 역할을 해온 미국 헤게모니였다. 위에 지적한 것과 같은 한국 자본주의의 경직된 특성들은 모두 이 미국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그 변동 과정에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등장하고 쌓인 것들이다.

    그런데 이제, 지난 60여 년간(두 세대 이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미국 헤게모니의 단순한 변동이 아닌 그 노골적인 해체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지배 계급은 이 과정에 다시 한 번 적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지배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지배 계급으로서도 그들 나름의 ‘변화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자본의 기득권이나 부동산 투기 문화 같은 경제적, 분파적(그람시의 용어로는 동업조합주의적) 이해를 침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 자본주의의 유지를 위해 지배 체제 전체를 새로 짤 리더십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 미국 헤게모니 시대에 형성된 지배 계급 자신의 경직성이 이러한 새로운 적응 과정을 방해한다. 지배 계급의 각 분파들은 저마다의 경제적 이해에 단단히 갇혀서 그 어느 세력도 새롭고 전반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결국 교착 상태가 장기화한다.

    이 궁지의 인격적 표현이 결국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민주당의 대안 부재 상황 아닌가. 만약 전 지구적인 격변이 지속되는 가운데(특히 동아시아에서 보다 역동적으로 나타날 텐데), 국내에서는 이러한 지도력 공백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 때에는 진짜 파시즘이 현실 대안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대공황 시기의 바이마르 공화국 같은 양상이 한국 사회에서 재연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직된 것은 지배 계급만이 아니다

    상황이 더욱 비관적인 것은 경직된 게 지배 계급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민중들 역시 한국 자본주의의 경직된 구조에 깊숙이 얽혀 있다. 마땅히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할 사회 세력 역시 지배 계급의 궁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곤란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주택, 교육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부동산 시장의 과잉 성장과 지역간 불균형 결합 발전 구조 때문에 대다수 노동계급 가정은 주거비 부담에 등골이 휜다. 또한 2세의 대학 입시 경쟁을 위해 엄청난 사교육비를 쏟아 붓는다.

    이런 지출을 감당하려면 더 많은 임금 소득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자 스스로 장시간 노동에 뛰어들고, 대기업 정규직 일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리고 기업별 노조 체제는 이런 경쟁을 오히려 더욱 부추긴다.

    사실 노동자들 자신이 자본의 축적 구조나 문화에 일정하게 종속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라면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꼭 한국의 경우만 도드라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한 ‘종속’이 아니라 그것의 ‘경직성’에 있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는 확실히 유별난 데가 있다. 민중들의 선택의 폭이 유례없이 제한돼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임노동자들이 도시를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가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실제 이런 일이 예외적으로 있었다. 이 경우 임노동자들이 돌아갈 수 있는 농촌 공동체가 잔존한다는 사실은 곧 이들에게 일정한 선택의 여지가 열려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선택의 여지란 곧 제한된 수준의 자유다.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나 강력한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의 존재도 이러한 선택의 여지를 열어준다. 자유, 비록 극히 제한된 자유이지만, 어쨌든 지배 구조의 답답한 틀 속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몸을 뒤척여볼 수 있을 정도의 틈은 벌어지는 셈이다.

    저항의 경직성, 기업별노조

    허나 한국의 노동자, 민중에게는 이런 틈이 거의 없다. 기존 자본주의 구조가 제시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만큼 기존의 경직된 구조 안에 너무나 꽉 끼어 있다.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구명선에 타기 위한 경쟁이 무서운 힘으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그 경쟁 바깥의 다른 어떤 행위는, 감행은커녕 상상하기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껏 한국의 민중 세력은 이러한 경직성에 발목이 묶인 채로 지배 세력에 맞서왔던 셈이다.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민중운동 스스로 그 경직성을 강화하기도 했다. 87년 이후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이 기업별 노동조합 구조에 갇힌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 2002년 노동운동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집회모습(사진=민주노총)
     

    결국 이 나라의 지배 세력이 자신들의 구조와 역사의 포로가 되어 새로운 활로를 열지 못하는 것처럼, 민중 세력 역시 지배층을 압박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지배층의 궁지는 이제 그들의 무덤 파는 사람들의 궁지와 만나 이중의 궁지, 사회 전체의 교착 상태가 된다. 한 마디로, 출구 없는 사회의 비극이다.

    이것이 최근 10여 년 간 우리의 자화상이다. 숱한 패배와 좌절의 이면에 자리한 본질적 형상은 바로 이것이다. 만약 민중 세력 스스로 이제까지 당연시돼온 선택의 폭에서 다만 한 발자국이라도 비껴나가는 용기와 결단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제 우리를 기다릴 것은 “서로 투쟁하던 두 계급의 공멸”(󰡔공산당 선언󰡕)이라는 또 다른 비극의 한 광경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나치 집권 전야의 독일 사회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와 맥락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부르주아 우파, 프롤레타리아 좌파 모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됐다. 그리고 이런 교착 상태를 깨뜨리는 구원자로 등장한 것이 바로 독일 파시즘, 곧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약칭 나치)이었다.

    게릴라 전략으로 정규군을 재편해야 한다

    약한 쪽이 강한 쪽에 맞서 정규전을 고집한다면, 몇몇 진지를 고수하는 데 집착해서 경직된 전략을 펼친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20세기 전쟁사에는 그 풍부한 실례들이 존재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정부군이 나치 독일, 파쇼 이탈리아의 원조를 받는 프랑코 반군과 정규전으로 맞붙다 결국 패배한 사례가 있다. 또한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에게 연전연패한 사례도 있다.

    어쩌면 이제껏 한국의 노동자, 민중운동은 일본군에 정규군으로 맞서다가 패배와 후퇴를 거듭한 장개석 정부와 비슷한 처지였는지 모른다. 병력도 부족하고 화력도 형편없으면서 우직하게 참호 안에만 버틴 꼴이었다. 그래서 결국 주요 지점들이 포위되고 전선이 끊겨 각 부대가 서로 고립되고 말았다.

    노동조합운동이 그러했고, 진보정당이 그러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전농이라는 나름대로 튼튼한 요새에 주둔하고서 수세를 공세로 바꾸는 반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실 이 요새는 고립되어 있었다. 새로운 병력은 공급되지 않았다. 비록 요새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지만, 전체 전선은 이미 아군의 1단계 패배를 말해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람시의 오래된 비유(기동전/진지전)도 그렇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는 현대전에서는 ‘기동전’만이 아니라 ‘진지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 세계에 적용했다.

    그는 이 비유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군사 교리에서 따왔다. 그러나 이 교리는 그람시 사후(死後) 일어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독일군의 기동전이 프랑스군의 진지전을 압도한 것이다.

    그람시의 비유는, 그가 말한 ‘진지전’을 ‘기동전’의 대립 개념, 즉 ‘참호전’이 아니라 ‘총력전’이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현상을 뜻하려던 것으로 이해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총력전, 곧 인민 전쟁. 그리고 이것을 보다 명확히 이해한 것은 (옥중의 그람시가 아니라)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었다.

       
    ▲ ‘국민혁명군제8로군’이 항일전장을 향하고 있다 
     

    항일전쟁 시기에 마오와 중국 공산당의 군사 전략이 무엇이었는지는 이제 상식이다. 그것은 유격전, 즉 게릴라전이었다. 일본군과의 정규전에서 번번이 대패하던 국민당 군대와 달리 팔로군은 유격전을 펼쳐서 일본군을 교란하고 배후 농촌 지역에 해방구를 확보했다.

    유격전이 정규전과 구별되는 그 첫째 특성은 기동성이다. 게릴라 부대는 기존 진지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의 전선은 경직되어 있지 않다. 진지 자체가 이동한다. 그래서 이들은 퇴각 중인 정규군과는 달리 (비록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마오 식 게릴라전은 분명히 게릴라전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정규군의 건설로 발전해야 한다. 게릴라전의 목적은 압도적 다수의 근로 대중, 즉 농민에 바탕을 둔 새 정규군의 형성 과정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데 있다.

    실제로 팔로군은, 일본군에 쫓겨 도시와 도로만을 이동하던 국민당 군대와 달리, 광범한 농촌 인민들과 활발히 접촉하면서 새로운 정규군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 군대가 결국 1949년, 최후의 승자가 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인민전쟁 개념으로 재해석된 우리 나름의 진지전이다. 그것은 곧 일단 기존의 요새에 고립되어 있던 상황에서 탈피하고, 유격전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여, 결국은 민중들 사이에서 새 정규군을 다시 건설하는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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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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