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갇힌 노동으로는 안 된다
        2008년 11월 25일 02: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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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급적 관점에서의 공공성 강화’

    21세기의 다양한 의제들이 정치의 다원화(여/성평등, 생태, 안전, 다양한 소수자정치 등)를 요구하고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개인의 파편화가 극단화될수록, 모든 삶의 현장과 정치의제 속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진보(정치)의 시각은 모든 의제들을 관통하는 계급적 관점을 분명히 세우고 상황을 판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보다 냉철하고 근본적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 필자 (사진=최현숙 홈페이지)

    또한 이전 진보정치의 한계였던 ‘의제의 서열화’의 극복이, 단지 의제의 다원화나 비주류 의제의 주류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의제를 관통하는 중심축을 바로 세우고 이 중심축을 근본적 관점으로 하여 진보정치의 모든 상황과 의제를 분석하고 해석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평등 평화 생태 연대’ 라는 진보신당의 가치에 대해서건, 노동, 생태, 여/성, 장애, 인권, 평화 등 진보의 다양한 의제들에 대해서건, 혹은 여성주의 생태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이든, 다양한 의제와 담론과 현장을 관통하는 진보(정치)의 관점은 ‘계급적 관점을 통한 공동선의 추구’이다.

    노동, 생태, 여/성, 장애, 인권, 평화 등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삶(정치)의 현장에 그리고 한 개인 속에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의제들이며,  노동, 생태, 여/성, 장애, 인권, 평화 등의 모든 문제에서 발생하는 피해 집단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임이 갈수록 확연해지기 때문이다.

    ‘공동선을 위한 계급적 관점’이란 ‘정치적으로 깨어있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관점’이라는 면에서 ‘노동’은 여전히 진보정치의 중심축이다. 그러나 새로운 진보정치가 말하는 ‘노동’은 조합주의와 경제주의에 빠져있는 현재의 대기업/남성/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의 ’노동’도 아니고, 여기에 다양한 ‘비정규직’과 ‘여성노동’을 추가하는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갇힌 노동의 개념과 노동운동의 범주를 깨고, 소위 ‘조직된 노동’과 ‘임노동’의 범주조차 벗어나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노동’과 ‘노동정치‘의 관점이어야, 자본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 찾아질 수 있다.

    자본(주의)에 갇힌 노동정치

    자본(주의)에 갇힌 노동정치로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전 현 노동운동의 ‘노동’에 진보정치가 갇혀 있는 한 자본과의 투쟁에  한두 가지를 더 얻어내는 투쟁에 진보정치가 몸을 대주는 것일 수는 있지만, 여전히 자본의 논리 신자유주의의 체제에 갇힌 채 반자본을 넘어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진보정치의 역할은 방기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경쟁적 강박관념과 파편화를 추진력으로 삼아 작동/강화되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진보정치 역시 개인과 조직의 희생과 극단을 추진력 삼아 당분간의 지속 연장만이 가능한, 그러나 대안은 없는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며 혹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노동력을 팔아 번 돈으로 당분간의 지속을 연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경쟁력과 효율성과 속도의 관점을 노동운동/진보정치가 그대로 답습한 채 파편화되고 있는 노동자/시민/활동가/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세우지 못하고, 우리도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편화된 한 조각으로서의 진보정당에 모여 ‘진보의 중심 노동이다’라는 공염불을 되뇌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최근 진보신당 비정규직 운동의 한계이기도 하다. 40~50대 기혼 여성들(250여 명 조합원) 중심이었던 기륭 현장에서 먼저 투쟁현장을 떠난 채 파편화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성 조합원들의 구체적 삶에는 관심이 없고 (혹은 다른 부문의 의제라고 생각하고) 남아서 파편화를 거부하고 있던 10명의 극한적 투쟁에만 몸을 대주는 진보정치는 그저 노동조합에 대한 지원활동에 불과했다.

    생산 현장과 투쟁 현장을 넘고, 조직된 노동과 모든 임노동을 넘는 자리,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자리가 진보정치가 서야하는 노동정치의 자리이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의 현 노동운동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첫째, 임금투쟁과 일자리 지키기 투쟁만에 머물고만 있는 현 노동운동의 내용을 비판하는 것이고, 둘째, 나아가 시장 안의 노동만을 노동으로 규정하는 노동운동의 시각으로는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며, 셋째, 그러한 한계 속에 있는 노동운동을 중심에 놓는 진보정치 역시 진정한 계급적 기반을 중심축으로 하는 진보적 대안을 사회 전체에 제시하고 성숙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건 밀려남에 의해서건 이미 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나 지역에, 가정에, 비공식 노동현장에, 장애인 복지시설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노동정치가 최우선적으로 함께 해야 할 ‘정치적으로 깨어있는(깨어있을 가능성이 있는) 노동하는 사람들’은 결코 노동운동이 말하는 생산 현장(시장영역의 노동)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깨어 있는 많은 노동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비시장 영역에서 자본주의에 최대한 갇히지 않은 다양한 노동과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깨어있는 채 우리보다 더 높은 현장의 감각을 가지고 다양한 실천들을 통해 시민사회영역의 대안적 활동을 하면서 지역과 현장에서 시민으로 노동자로 반자본주의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역과 노동을 분리하는 사고

    이러한 제안에 대해 노동운동 진영의 반응은 노동운동은 시장영역의 노동을, 지역운동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면서  필요에 따라 연대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시장영역이든 비시장 영역이든 이미 노동자들로 채워져 있는 지역을 시장영역의 노동자들의 잠자리로만 보면서 노동운동과 분리시키는 사고로서 노동운동의 한계의 다른 중요한 하나이다.

    지역과 노동을 분리하는 사고는 노동을 남성의 영역, 생활과 지역을 여성의 영역으로 하는 사고의 연장일 뿐 아니라 정치를 생활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왔다. 또한 이는 공사영역분리(여성-사적영역, 남성-공적영역)의 가부장제 존속을 기반으로 강화되는 신자유주의를 더욱 유지 확대시켜주는 관점이다.

       
    ▲ 지난 20일 열린 ‘무지개연대(가)’의 토론회 모습(사진=정상근 기자)
     

    나아가 이러한 분리적 사고로는 다양한 지역 활동들이 계급적 관점을 확립하지 못하는 현재의 한계도 극복할 수 없고 노동 운동 역시 노동자의 전반적 삶을 다루지 못한 채 생산 현장만의 과제에 머무는 한계를 지속하는 것이라 본다.

    지역과 노동을 계급적 관점을 분명히 한 공공성의 관점에서 꿰어내는 것이 진보정당 노동정치의 역할이다.

    ‘대안적 노동’ 영역의 확장과 네트워크

    신자유주의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퇴출시키는 노동으로는, 임노동자의 생계를 해결하거나 자본효율성의 순서대로 고임금을 보장받거나 혹은 경기 변동에 따라 때때로 노동운동이 성할 수는 있더라도 근본적으로 소외된 노동을 벗어나지 못하며, 노동자의 자아정체성 실현도 신자유주의의 대안도 바라볼 수 없다. 그 노동의 출발지점과 영역이 자본주의에 철저히 갇혀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단지 생계 뿐만 아니라 자아정체성과 인간 실존의 문제이다. 따라서 경제적 필요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여성 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노동을 욕망하며 또 노동하며 살고 있다. 또한 인간은 노동을 통해 타인 및 사회와의 관계를 맺는 사회/정치적 존재이다.

    진보정치가 찾아야 할 노동정치의 대안은 임노동의 현장에 갇혀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아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를 통해 사회 공공성을 확장하는 다양한 노동의 자리들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시민(주민)노동, 지역노동공동체, 진보정당 활동 등 다양한 시도와 사례들 속에서 비시장영역에서의 일자리 창출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노동의 과정과 목적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 정체성과 일치하는 노동(자, 운동, 공동체, 기업)이자 사회적 공공성을 확장하는 노동현장이 바로 진보적 노동정치가 발딛고 서야할 자리이다.

    그리고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함께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정체성이 확립된 사회 구성원을 양육하는 현장으로서의 다양한 가족공동체들이 늘어나고 그 확장과 연계로서의 다양한 교육 현장들을 만들고 개혁해 내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 문제인 가족이기주의와 가부장적/이성애중심의 가족이데올로기 그리고 교육 광증의 문제에 대안을 만들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중장기적 대안을 만들어 가는 출발지점일 것이다. 

    임금투쟁 등 경제투쟁을 통해 얻은 성과를 자녀의 사교육비(자본에게 최고의 노동력을 제공하여 신자유주의를 대를 이어 강화시켜주는)와 부동산투자(투기)/ 주식투자 등 재산증식에 쏟아 붓는 노동자(노동운동가)의 삶들을 통해 어떻게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노동운동 노동정치를 하겠는가?

    진보정당 뿐 아니라 다양한 시민사회활동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활동을 하는 와중에 많은 활동가들이 생존의 어려움 속에 놓이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 시장에 포섭되거나 혹은 운동권 룸팬으로 되고 마는 현실에 대해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간의 노동 개념과 노동운동의 범주가 낳고 있는 자본주의 확장 속에서의 대안적 운동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나아가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폐쇄회로에 막혀 ‘노동정치’라는 퍼즐 조각을 비워놓은 채 ‘노동정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노건추와의 대표단 간담회에서, 필요하다면 제2창당의 일정까지도 노건추의 입당 결정까지 더 미룰 수 있다는 노회찬 심상정 대표의 발언) 현재 진보신당 제2창당 과정의 현실이다.

    이는 민주노총에게 모든 노동정치를 다 맡긴 채 민주노총에만 노동정치의 목을 매고 민주노총만을 닭쫓던 개처럼 바라보다가 노동운동도 진보정치도 수렁에 빠진 지난 진보정치의 오류를 시작단계에서부터 다시 반복하는 어리석음이요, 현재 진보신당이 제대로 된 ’노동 중심성‘을 찾지 못해 제2창당도 진보의 재구성도 그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 이유이다.)

    신자유주의가 강화시키는 ‘소외된 노동’을 넘어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 공공성을 지향하는 대안적 노동과 노동공동체, 생산공동체, 소비공동체는 이미 우리 주변에 수없이 시도되고 혹은 확장되고 있다. (생협운동, 주민들이 만든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유기농 먹거리의 지역식당, 공정무역운동, 지역화폐운동, 다양한 대안교육운동)

    다양한 지역과 현장에서 현실의 다양한 문제와 상황들 속에서 ‘계급적 관점을 관철하는 공공성’을 확장하는 많은 공동체들을 만들고 참여하며 그들의 네트워크를 잇고 이를 확장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주요한 역할이자 지역정치의 관점이며 노동정치의 출구이다.

    그 자리에서라야 현재의 노동운동이 공염불처럼 되뇌이고 있는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의 만남도 가능하며, 진정한 ‘노동 중심성‘을 근간으로 하는 진보정치의 길도 찾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이 노동, 여/성정치, 생태, 장애, 인권, 평화 등이 함께 어우러지는 진보적인 무지개 정치의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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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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