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는 혼란한데, 자아는 선명해지고
        2008년 11월 20일 09: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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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하는 혼란한데, 자아는 선명해지고.

    거무스레한 돌담장의 양쪽으로 밝고 노란 꽃들이 들판을 꽉 채우고 있었다. 마치 꽃들이 돌담을 포위하고 있는 듯했다. 그 빽빽하게 아름다운 노란 천하를 벌들이 어지러이 오고 가며 꿀을 따고 있었다. 흐드러진 꽃밭의 모습을 돗자리를 든 소년이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소년들은 모두들 책 한 권씩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으나 그 소년만 유독 돗자리를 들고 있었다.

    그 돗자리를 든 소년이 함께 소풍을 온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저 꽃이 무엇입니까? 근방에서는 못 보던 꽃 인 것 같습니다."

    물어볼수록 알쏭달쏭한 대답

    다른 제자들은 꽃 이름 따위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경전이나 뒤적거리고 있을 때, 그런 질문을 하니 스승이 거참 특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 꽃이 바로 세상의 반대 쪽 서역(西域)의 오손국(烏孫國) 너머에서 건너온 유채꽃이다. 겉보기엔 샛노랗고 아름답지만 기름이 많아 유채(油菜)라고 하지."

    "오손국이 어디입니까? "

    "천축국에서 서역을 향해 1,000리를 열두 번 가야 있는 나라다."

    물어볼수록 더욱 알쏭달쏭한 답변이 계속되자 소년은 다음 질문을 포기했다. 스승도 잘 모르는 것 같은 얘기를 자꾸 물어보는게 왠지 미안하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소년의 이름은 현덕(玄德)이었다. 성은 유(劉)씨. 나중에 커서 사람들이 유비라고 부르는 그 소년이었다.

    때는 한고조 유방(劉邦)이 초나라의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해 한나라를 세운지 400년 쯤 지난 어느날이었다.

    세상은 오랜 부패와 혼란으로 어지럽기만 했다. 한나라는 이미 명운을 다한 듯 보였다. 한나라 말기 환관의 폐해는 극에 달해 십상시라 부르는 10명의 내시들이 실권을 쥐고 온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이상한 세상이 되고 있었다. 조정은 환관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고 황제는 점점 허울뿐인 존재가 되는 중이었다.

    한 황실 통제력 상실, 민간 군사력 활개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자 각지에서는 도적인지 의병인지 모를 민간 군사력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 지방에서 도적떼가 봉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지방에서 권력을 쥐고 있던 실력자들은 저마다 사병을 키워 사실상 중앙의 통제는 거의 무력화되고 있었다.

    천하는 형식적으로만 합쳐져 있을 뿐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누구도 황제를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한(後漢) 말 영제(靈帝) 때의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쓰러지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절에 탁군(涿郡) 탁현(涿縣)에 살던 소년 유비의 어머니는 돗자리를 짜서 번 돈으로, 아들을 당시 유명한 선비이던 노식에게 맡겼다.

    유비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황제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현덕아(玄德-유비의 자), 지금은 네가 비록 짚신과 돗자리를 짜며 근근이 생계를 삼고 있지만 네 몸 속에는 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 너는 분명히 황실의 종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는 한나라의 제왕이신 경제(景帝) 폐하의 먼 손자뻘(遠孫)이다. 어디 가도 절대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네 몸 속엔 황실의 피가 흐른다"

    유비가 고향을 떠나 멀리 유학을 오게 된 것도 어머니의 그런 열정 때문이었다. 유비의 어머니는 유비가 어릴 적에 남편을 잃고 아들 유비만을 생각하며 어려운 시절을 살았다. 그런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버지 없이 자란 유비가 밖에 나가서 친구들에게 놀림이나 받고 다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제일 컸다. 그래서 유비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매일 같이 ‘너는 황제의 자손’ 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 유비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은 별로 큰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황제의 자손’이라는 알 수 없는 자긍심이 어린 유비의 인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비의 친구들은 유비를 그냥 평범한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유비가 친구들을 생각할 때는 좀 달랐다. 유비는 친구를 만날 때도 ‘나는 황제의 자손’이라는 자긍심 속에서 항상 속으로는 남모를 여유가 있었다.

    ‘네가 지금 나의 친구로서 이렇게 마주보고 얘기하고 있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오늘의 일을 크게 영광으로 생각하게 될 걸!’

    어린 유비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속으로는 늘 친구들을 일종의 신하로 생각하며 남모를 자긍심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유비는 그런 자기만의 자긍심을 속으로 생각하기만 할 뿐, 대놓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유비는 큰 귀를 갖고 있었는데 그런 외모 때문인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런 들어주는 마음의 배경에는 이런 정체불명의 여유가 있었다.

    유비의 고민

    그러나 유비는 나이가 들어 정작 스승 노식을 만난 이후로 큰 고민이 생겼다. 멀리 고향에서 어머니가 돗자리를 팔아 보내주는 돈으로 노식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지만 어머니의 기대와는 달리 글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고 있었다.

    각종 병서를 읽으며 병법을 배우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지만 그밖에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이 만들었다는 골치 아픈 경전들을 읽고 있자니 아무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스승에게서 배우는 것들이란 다 하나마나 하고, 그렇고 그런 얘기 같았다. 유비는 어머니에게 이런 속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어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유비는 글공부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 보다는 개와 말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고 음악을 즐겼다. 또 사람들을 만나서 토론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유비에게는 책으로 보는 것보다는 말로 듣는 것이 훨씬 더 생생하고 귀에 잘 들어오는 것 같았다. 특히 공손찬이라는 동문과 마음이 잘 맞아 유비는 그를 친형처럼 대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유비를 다른 친구들도 좋아했다. 유비의 친구들은 그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았고 유비와 함께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특히 유비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직접 하지 않고 뜸을 들이다가 결국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만드는 독특한 재주가 있었다. 이것은 천자의 후손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드러내놓고 행세할 수 없었던 유비의 독특한 삶의 조건 때문에 형성된 품성이기도 했다.

    노식은 그런 제자를 보며 학문에 대한 재주는 별로 없지만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 했다. 유채 꽃밭으로 소풍을 갔을 때도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기가 읽을 책을 하나씩 들고 왔지만 유비만은 유독 벗들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돗자리를 챙겨 온 것이었다.

    "안 풀리면 굴절 큰 삶 살 것"

    노식은 속으로 ‘저 아이가 나중에 성공하면 아주 크게 되겠지만, 안 풀리면 아주 굴절된 삶을 살겠구나!’라고 생각하곤 했다.

    소년 유비는 그런 스승의 평가는 알지 못했지만, 그 즈음 들어 특히 새로운 삶의 전기를 찾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시골에서 책이나 보는 것은 왠지 시간낭비 같았다.

    더구나 스승으로부터 갑자기 천축국이니 오손국이니 하는 먼나라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심란하던 마음이 더 심란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전에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길을 떠나 새로운 것들을 듣고 보고 느끼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 싱숭생숭함 때문인지 유비는 스승 노식과 다른 친구들이 돌아간 자리에 혼자 남았다. 뉘엿뉘엿 해는 넘어가고 있었지만 유비는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서 사방에 흩어진 지푸라기를 주섬 주섬 쓸어 모았다. 돗자리를 짜볼 생각이었다.

    유비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옆에서 어깨 너머로 짚신이나 돗자리 짜는 것을 배웠다. 어머니는 그 시간에 글을 읽으라고 했지만, 유비는 어릴 때부터 한참 동안 돗자리나 짚신을 짜다보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다. 아무 말 없이 비슷한 손동작을 계속 하다보면 왠지 마음이 안정되면서 난마처럼 얽힌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유비는 한참이나 앉아서 돗자리를 짜다말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누구일까?’
    절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스스로에겐 오래된 질문이었다.

    "나는 정말 황제의 후손일까? 내 몸 속에는 정말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을까? 세상에 유씨네가 어디 한 두 사람도 아니고…"

    "나는 할 수 있을까?"

    나이가 조금씩 들고 배우는 것이 많아지면서 결국 자신이 황실의 자손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허점이 많다는 사실을 유비도 이제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순간 나약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나는 어머니의 바램대로 언젠가 먼 훗날에 몰락한 가문을 회복하고 유씨 황실을 다시 일으켜 패업(霸業)을 이룰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아무리 소년 유비라도 오늘의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황제의 먼 친척이지 어머니는 매일 돗자리를 만들어야 하고 자신은 그런 어머니의 등골을 파먹으며 당장이라도 덮어버리고 싶은 책장이나 뒤적거리면서 세월이나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세상은 어지러워 공부를 한다고 한들 벼슬길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집안도 미천한데 아버지도 안 계신 판에 누구하나 자신을 벼슬길로 끌어줄 리 만무했던 것이다.

    이래가지고서야 대체 어느 세월에 벼슬길에 나가 천자를 뵙고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도통 머릿속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온통 불확실한 미래가 유비를 혼란스럽게 했다. 순간 절망스러움이 밀려왔다. 유비는 고개를 절로 떨구었다. 그 때였다. 유비의 눈에 방금 전까지 비비꼬다만 지푸라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비가 그것들을 불러 모아 서로 엮어주기 전까지 그 지푸라기들 하나 하나는 모두 그냥 논바닥에 나뒹구는 죽은 식물의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서로 잘 엮어 놓았더니 어느덧 튼튼한 밧줄이 되고 있었다.

    스스로 희망을 만드는 재주

    유비가 물끄러미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한 가지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저렇게 쓸모없는 지푸라기들을 새로 엮어서 전에 없던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야 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순식간에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았다. 소년 유비는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자기 희망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유비는 재미가 들렸는지 좀 더 자세히 꼬다만 지푸라기 뭉치를 바라보았다. 그냥 일자로 펴져 있을 땐 아무 힘도 쓰지 못했던 지푸라기들이 비비꼬아 놓으니 서로 엮이면서 전혀 새로운 힘이 만들어지는게 보였다.

    "원래 권력이란 이렇게 천하가 혼란할 때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유비의 머리가 유비에게 말하기로는 질문형식이었지만 그것이 마음에 들어 올 때는 이미 확신이었다. 소년 유비는 벌떡 일어났다. 짜다만 돗자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지만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유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보자! 똑똑한 벗들을 10명만 모으면 천하를 얻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사실 유비는 얼마 전부터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을 뵙고 가르침을 청한 지 벌써 몇 년이 흘렀건만 이제 보고 들을 것은 어느 정도 다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뜻을 같이 하는 벗들을 모아 꿈을 이뤄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세상이 불안하다고 다들 힘들어하지만, 이 혼란한 세상을 잘 이용하면 천하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나만의 비밀로 간직해야겠다. 아무에게도 내가 황제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밝히면 안돼! 그 순간 나는 모든 사람들의 공적이 될 수밖에 없을 거야. 언젠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그날, 바로 그 일생을 통해 단 한번 찾아올 그날, 나만의 이 비밀을 만 천하에 다 터놓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제 공부는 그만두고 싶었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다시 고향인 탁현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고향으로 돌아간들 당장 무슨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오래 있었다는 이유로 이제 이곳에는 별로 있고 싶지 않았다.

    당장 스승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비는 왠지 마음이 급해졌다. 엉덩이를 비비며 일어선 유비는 돗자리를 챙겨들었다. 그리곤 길을 떠나기 앞서 먼 산을 한번 바라보았다.

    유채꽃 향기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계속-소년 조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그림=억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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