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운동, 침묵의 소리를 들어라"
        2008년 11월 17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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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들의 뜻에 따라 ‘한국노동운동연구소’라는 거창한 간판을 걸었다. 이름에 값하는 구실을 어찌 해낼 수 있을지, 자못 난감하고 두렵기만 하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닐 터이고, 여러 노동 조직들 모두가 지금은 그 이름을 버거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러 일을 젖혀두고 남행길에 오른 것은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 연구소 활동의 방향을 잡아 보자는 뜻에서였지만, 현장의 상황은 어깨에 무게만을 더했을 뿐이다.

    불황의 그늘

    거제에서 창원을 거쳐 울산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라 상황은 조금씩 달랐지만 한걸음씩 다가오는 경제위기의 그늘은 어디서나 느낄 수 있었다.

    조선 산업의 중심지인 거제는 신규 수주가 거의 중단되고 기존 발주물량의 취소도 잇따르는 가운데, 중소 조선소부터 위기감이 짙어지고 있었다. 대우조선해양이나 삼성중공업 등 대기업들은 확보된 물량으로 당분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로 설비투자는 중단되거나 미루어지고 있는데, 확보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내년, 내후년에는 같은 설비로 50% 이상 작업량을 늘려 나가야 할 것이라는 고민이 겹쳐 있기도 하다.

    창원공단의 경우 이미 불황의 그늘은 지역 경제에 반쯤 발을 들여 놓았다. 대우(국민차), 쌍용(엔진) 및 부품업체들을 선두로 휴업 및 조업 단축, 그에 따른 고용조정의 압박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미 두어 차례 부동산 투기 붐이 휩쓸었던 지역 경제도 소비 위축에 따른 불황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분위기이다.

    울산의 경우도 대동소이했다. 아직 다른 지역보다는 여유가 있어 보였지만, 자동차의 생산조정이 코앞에 닥쳐 있다. 파업에 따른 생산물량 보전과 연말 실적 달성을 위해 일부 라인을 제외하고는 정상가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내년 초부터의 생산 감축은 이미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있었다.

    정중동(靜中動)의 노동운동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의 긴장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노민추 세력이 집행부를 장악한 대우조선해양은 ‘한화’로의 매각 협상이 진행 중이라 조합원이나 노조의 관심 역시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매각 이후의 고용조정은 아마도 사무관리직에 집중될 것이고, 따라서 생산직 조합원들은 인수기업이 조합원들에게 얼마의 인수보상금(위로금)을 지급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정도의 분위기이다. 노조 역시 이 문제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다른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일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다.

    창원이나 울산의 경우에도 노동조합들의 불안감은 느낄 수 있었으나 분주한 대응 움직임을 읽을 수는 없었다. 여러 노조들이 차기 집행부 선거에 즈음해있고, 민주노총 지역본부 선거가 임박하여 그에 따른 준비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 경남본부와 울산본부 모두 경선이 예상되고, 정파 혹은 계파별로 선대본이 꾸려지는 상황이다.

    이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사회운동, 정치운동에서 노동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큰 지역이다. 지역사회의 규모가 작은 거제의 경우, 대우조선해양 노조의 향배가 정치운동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분당 과정이 진보신당 우위의 지역정치 구도로 귀결된 거제에서는 노민추 집행부의 출범으로 이 구도가 더욱 굳어질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창원(경남), 울산의 경우 진보신당은 현재로서는 ‘고난의 행군’에 가까운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울산은 당 상근자도 두지 못할 정도로 당세 확장에 제동이 걸려 있다. 두 지역 모두 활동가들이 민주노총 지역본부 선거에 집중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지역정치 상황도 크게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진보신당으로 균열된 노동정치의 상황이 한편으로는 당(정치)운동과 대중운동과의 간극을 키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의 지도부, 활동가와 조합원 대중과의 간극 역시 키워 놓은 것도 분명해보였다.

    상층 지도부와 활동가들은 여전히 분주한 듯하지만, “바닥 정서는 써늘합니다”라는 자평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닥은 조용하고(靜) 위만 분주하다(動). 조합원들이 노조를 불신하거나 도구주의적으로만 바라보고, 당을 이탈한 노동자들의 80%가 노동정치의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정파와 계파를 계선으로 완고한 계급 내(內)정치(intra class politics)에 몰두하는 이상의 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노동운동, 노동정치의 모습이라면 굳이 새삼 위기 운운 하지 않더라도 사태는 참으로 난감하다.

    복원의 가능성 찾기

    ‘복원’이라 말하려니 다소 찜찜하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 지향적인 어감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이 과거보다 후퇴한 상황이라면 전진을 위해서라도 복원의 과정은 거쳐야 한다. 우회나 도약의 길도 있겠으나, 그것은 새로운 노선의 확립을 전제하는 것이며, 우리 운동은 아직 그것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바닥이 조용하지만은 않을 터이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조용하기는커녕 도처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고, 경제위기가 심화될수록 싸움판은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박한 목소리라도 공명(共鳴)의 장치가 작동하지 않으면 그 소리는 ‘침묵의 소리’에 그친다.

    멕시코의 현대 노동운동사를 기록한 미들브룩(Middlebrook)이 그 책의 제목을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라 붙인 이유가 그것이다. 이 비유에 의하면 노동운동, 노동정치는 바로 노동자계급의 절박한 목소리가 사회적, 정치적으로 울려 퍼지게 하는 공명의 장치에 해당한다. 이 장치가 고장나 기계적 파열음만 요란하다면, 그것부터 수리하는 것이 복원의 지름길이다.

    이번의 짧은 기행에서 이 점을 다시 확인한 것을 그나마 위안이라 여긴다. <레디앙>에서 전개되고 있는 주장과 토론들도 지금은 여기로 수렴되었으면 한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출발점은 지금, 여기일 수밖에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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