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암동의 밤, 눈물은 바다가 되고
    “510일 투쟁하며 우리는 행복했다”
    By mywank
        2008년 11월 15일 03: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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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것이 ‘정의’였다면, 이날 그들의 눈물이 흘러넘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진 자들이 주목하지 않은, 그러나 끊어지지 않고 흘러온 연대가 없었어도, 이날 같은 눈물은 없었을 것이다. 회한과 기쁨, 분노와 자긍 등 온갖 교차되는 감정들은 공간을 휘휘 도는데, 그들은 상암동의 마지막 밤을 떠나보내고 있다.

    “어서 와서 사진들 좀 찍어. 500일 넘게 여기에 있었다고 후세들에게 남겨야지.(웃음) 여기 있는 천막도 이제 없어지잖아.” 이경옥 부위원장이 농성장 주변에 있던 조합원들에게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농담을 던졌다. 그래서인가, 농성 천막을 바라보는 아줌마 조합원들의 눈엔 물기가 촉촉하다. 

       

      ▲마지막 ‘이랜드 금요문화제’ 모습 (사진=손기영 기자)

     

    14일 저녁 7시, 컴컴해진 지 이미 오래다. 이랜드 일반노조 조합원들은 지난해 6월30일부터 20일 동안 매장 점거 투쟁을 벌인 홈플러스(구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마지막 ‘금요문화제’를 열었다. 510일 장기투쟁의 막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견뎌내고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이제 무대 위에서 내려와 서로들의 가슴 속에 심어지는 중이다. 

    투사들 파전을 부치다

    이긴 것과 진 것들, 기쁨과 슬픔의 목록이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에 가지런히 기록돼 ‘정리’돼야 하겠지만, 이날 만큼은 그런 것들을 잊고 지내도 용서되는 날이다. 행사 시작 전부터 아줌마들이 이 자리를 찾은 ‘외부 세력’을 위해 파전을 열심히 만드는 풍경도 그래서 더 어울린다.

    파전을 부치는 주변에서는 그 동안 어려운 시기를 함께 했던 시민들과 조합원들이 스스로 땀과 눈물로 써내려온 ‘투쟁사’를 안주삼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박금봉 이랜드 일반노조 계산 분회 조합원은 막걸리를 단숨에 마신 뒤, 큰 소리로 말한다. 

    “그동안에 고생했던 것을 막걸리 잔에 녹여버리죠. 이제 좋은 생각만 해요. 예전처럼 자주 보지는 못하겠지만, 산행이라도 같이 하면서 지내자고요.” 투쟁 이후 돌아갈 그들의 일상 또한 만만치는 않을 것임이 틀림없겠지만, 그들의 ‘산행’은 어쩌면 투쟁보다 어려울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이 생각이 틀렸으면… 

       

      ▲’파업 511일, 천막농성 137일?’ (사진=손기영 기자)

     

    상암동 홈플러스(구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 자리한 농성천막 한편에는 ‘파업 511일, 천막(농성) 137일’이라고 적힌 ‘스코어판’이 걸려있었다. 이경옥 부위원장은 이 판을 손으로 가리킨 채 웃으며 말한다. 

    “어제 파업투쟁은 끝났는데, 아직 농성장에 있어서 방금 510일을 511일로 고쳐놨어요. 더 이상 여기에 놓아둘 필요가 없어서, 기념으로 집에 가져갈까 생각하고 있어요” 511. 그건 숫자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장편대하소설의 제목으로 기억될 것임이 분명하다.

    510번째 ‘임을 위한 행진곡’

    행사가 시작되자, 조합원들과 시민들은 510일 동안 투쟁을 하면서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힘들 때 위안을 주던 ‘노래의 힘’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표정들이었다. 이어 대학생들의 준비한 율동공연이 진행되었고, ‘이랜드 일반노조 월드컵분회 지원대책위’ 사람들이 앞으로 나왔다. 

    “점거 투쟁할 때, 매장에서 얼굴 봤던 기억이 나요. 나중에 매장에서 맛있는 것 많이 주세요”, “투쟁을 시작할 때 끝까지 함께 하기로 약속했는데, 정말 ‘평생 A/S’ 해줘야 겠어요”, “앞으로 홈플러스 단골이 될 거예요. 여러분들 보고 싶어서요.” 이들의 짧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진한 교감이 물씬 배어있었다. 

       

      ▲피켓에 적힌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조합원들 (사진=손기영 기자) 

     

    황선영 이랜드 일반노조 월드컵점 분회장 직무대행이 나왔다. 그의 임무는 ‘연대동지들에게 드리는 글’을 낭독하는 것. 그가 눈물을 흘렸다. 참으려 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기나긴 투쟁을 마무리 하는 이 순간,
    투쟁에 함께 해주신 분들의 얼굴이 먼저 떠오릅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이 땅의 노동자로 사는 게 힘들다고 여겨질 때에도
    우리가 사는 용기와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앞으로 있을 많은 나날들은 동지들의 사랑의 힘으로,
    현장에서 당당한 노동자로 살아가겠습니다. (중략)

    한 단어, 한 문장은 그냥 한 단어, 한 문장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한 저 단어와 문장들은 상암동 사람들의 머리와 심장 깊은 곳에 녹아있는 기억들과 감성을 한 웅큼 길어올리는 커다란 두레박들이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우물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합원을 안고 울고 있는 이경옥 부위원장 (사진=손기영 기자)

     
       

      ▲사진=손기영 기자

     

    황선영이 울었다. 눈물은 너무도 쉽게 전염됐다. 아줌마 조합원들이 울었다. 조합원이 아닌 아줌마들도, 아저씨들도, 처녀 총각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들이 자꾸 눈을 부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지 못했던 이곳에, 눈물이 바다를 이룬다.  

    이경옥 부위원장은 “저까지 눈물을 흘리면 난리가 날 것 같아서 앞으로 나왔다”며 가수 지민주가 부른 ‘길, 그 끝에서’를 열창했다. 하지만 그도 눈물을 이길 수 없었다. 

    눈물 바다

    이날 마지막 ‘금요문화제’에는 진보신당 심상정 공동대표도 참여했다. 심 대표는 현장에 도착하자,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을 끌어안으며 “정말 고생했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 노동조합운동에 몸을 담았던 심 대표가 조합원들에게도 말했다. 

       
      ▲’잡은 손 놓지 맙시다’ (사진=손기영 기자) 
     
       

      ▲문화제가 끝난 뒤, 폭죽을 터트리고 있는 시민들 (사진=손기영 기자)

     

    심상정 "노조 간부 결단, 굴복 아니다"

    “그동안 너무 잘 하셨어요. 고생 많으셨어요. 모든 것을 걸고 싸우셨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몇몇 노조간부들이 복직을 못했는데, 여러분의 책임이 아니에요. 또 노조 간부들의 결단이 굴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진보정치가 아직 힘이 부족해서 그런 거예요. 진보정당의 대표로써 여러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어요. 다시는 여러분에게 설움을 주지 않는 날이 오도록 노력할게요.”

    이어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김 위원장은 표정이 무겁다. 누군들 속에 커다란 납덩이 하나씩 달고 있지 않을까마는, 그가 느끼는 무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사의 인사는 짧게 하겠습니다. 회사와 교섭 타결을 앞두고, 노조 간부들이 복직 포기에 동의하셨어요. 우선 노조 간부들에게 너무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농성천막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있는 조합원들(사진=손기영 기자)

     

    하지만 파업 투쟁 510일 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연애도 500일 이상하기 쉽지 않은데, 500일 넘게 투쟁을 벌인 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돼요. 여러분 정말 잘 싸웠어요. 그리고 저는 해고되었지만, 홈프러스가 여러분을 탄압하면 다시 돌아올 거예요”

    탄압하면 다시 돌아온다

    이날 밤 10시 반, 문화제를 마친 조합원들과 ‘잡은 손 놓지 맙시다’라고 적힌 현수막 문구를 장미꽃으로 장식하는 상징의식을 진행 했으며,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조합원들은 농성천막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제 농성 천막을 철거할 시간이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투쟁의 집’, 고난의 긴 시간을 버텨오게 한 ‘오기와 희망의 집’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게 만든 ‘길 위의 노동자 학교’를 철거할 시간이다. 

    천막 주변을 말없이 돌고 있는 이들이 지난 510일 동안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투쟁과 오기와 희망, 그리고 온전하진 않지만 분명히 쟁취해낸 ‘승리’ 같은 것들은 상암동이 아니라 그들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듀, 상암동의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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