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보수, 학부모 이름으로 '대연합'
    2008년 11월 14일 08:41 오전

Print Friendly
어린이 잡지 <고래가 그랬어>를 발행하고 있는 김규항님이 <레디앙>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주로 아이들 교육을 비롯해 한국 교육 현실에 비판적 성찰과 대안을 고민하는 글들을 써주실 예정입니다. 독자여러분들의 많을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지금 중학 2학년인 딸이 다섯 살 때인 98년부터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간간히 쓰긴 했지만, 교육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02년께부터였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어느 날 나는 깊은 의문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사람으로 키워지고 있는가, 상품으로 키워지고 있는가?’의문이 고민이 되고 고민은 다시 번민이 되어 결국 ‘이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고래가그랬어>를 만들게 된 사연이다.

자식이 중학생이 되면 부모는 바뀐다

개가 제 새끼를 개로 키우고 원숭이가 제 새끼를 원숭이로 키우듯, 사람이 제 새끼를 사람으로 키우는 건 자연스럽게 이어져온 인류의 전통이었다.

제 아무리 이기적이고 보수적인 아비라 해도 제 어린 자식에게만은 “동무들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 전통이야말로 인류를 유지해온 힘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아무리 망가져도, ‘사람으로 키워진’ 새로운 인간들이 끊임없이 공급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인류의 전통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보수적인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적이라는 부모도 제 아이에게 “동무들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라고 말하지 못한다.

물론 아이가 아주 어릴 땐 다르긴 하다. 그들은 아이가 공부보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누구보다 많은 체험학습 신청서를 학교에 제출해가며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 쯤 되면 그들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고,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급기야 보수적인 부모들과 ‘대통합’을 이룬다.

물론 그들은 ‘정말 이래야만 하나’ 고민도 하고 그 일로 부부 갈등도 벌이고 아직은 대통합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 민망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민도 갈등도 민망함도 빠르게 사라져간다.

민망함은 공격적 태도로 변하고

대통합에 참여한 사람들이 확연한 절대 다수가 되면, 뒤집어 말해 여전히 대통합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극소수가 되면 민망함은 공격적인 태도로 뒤바뀌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이를 희생시켜서야 되나?”나 역시 몇 해 전 후배에게서 들었던 말이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살풍경은 끝이 없다. 몇 달 전 전교조 어느 지회 강의에서 한 교사가 내게 질문했다. “전교조 교사가 자기 아이 과외 시키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 교사가 질문의 형식을 빌려 동료를 비판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외를 하는가 안 하는가로 나눌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에둘러 답변을 했지만 씁쓸함을 감출 순 없었다.

그 얼마 후 울산에서 만난 50대 노동자는 막막한 얼굴로 말했다. “고등학생 중학생 둘인데 녀석들 필수과목 과외 시키는 돈이 만만치가 않아요. 그 돈을 대느라 제 삶이 월급구조를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가 여느 평범한 50대 노동자라면 그 이야기가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울산에서 그 연배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좌파 노동자고, 게임에 빠진 고등학생 아들과 ‘생산하는 삶과 소비하는 삶’에 대해 토론을 할 만큼 특별한 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울산, 50대 그리고 좌파 노동자의 고민

그 정도의 사람이 그토록 막막해 하는 문제라면, 그건 더 이상 서로 정색을 하고 비판하거나 정죄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 문제를 ‘우리 모두가 함께 앓고 있는 병’으로 인정하는 게 옳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진보적인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이 제 아이 교육문제 이야기만 나오면 석연치 않은 얼굴을 하거나 막막해만 하는 풍경이 지속되어서도 안 된다.

이 문제를 계속 덮어두고서 무슨 놈의 진보와 운동을 말할 것이며, 설사 말한다 한들 그 진보와 운동이 무슨 놈의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이젠, ‘우리 모두가 함께 앓고 있는 병’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자. 그리고 동병상련의 정으로 함께 고민하며 토론을 시작하자. 곧 갈피가 잡히고 대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 *

* 자신의 글이 ‘자본의 신과 싸우는 일에, 사람들의 위엄과 존경을 되찾는 일에 개입하는 운동’이길 바라는 김규항은 현재 아이들이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라면서, 그 아이들을 위한 월간지 <고래가 그랬어> 를 만들고 있다.

1998년 영화전문 주간지 <씨네 2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칼럼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홍세화, 진중권 등과 만든 사회문화비평지 <아웃사이더> 편집주간을 지냈다. 써낸 책으로는 『B급 좌파』, 『나는 왜 불온한가』, 『예수전』(근간) 등이 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