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 사회주의에 주목하자
    2008년 11월 14일 08: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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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복지국가’, 맞다. 그런데

   
  ▲필자.
 

그렇다고 공공 부문이 이제는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공공 부문을 새로 구축하고 확장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공공 부문’이란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 당국이 소유 주체인 영역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필자는 조세-재분배에 의한 자원 배분 체계, 즉 공적 복지 제도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요즘 노동운동 내에서 ‘사회 공공성 강화’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한국 사회의 복지 수준이 아직 일천하고 공공 부문의 비중도 극히 적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서구에서 복지 축소 반대가 좌파의 주된 의제인 것과 달리 우리에게는 그 확대가 현안이다.

따라서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은 공공 부문 확대가 한국 진보 정치의 핵심 의제가 될 것이다. 진보 좌파는 선거에서든, 일상 정치 활동을 통해서든, “신자유주의 재테크 문화인가, 아니면 공적 복지의 확대인가”라는 선택을 선명히 제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의 당면 과제는 ‘복지국가 건설’이 맞다. ‘우리의 소원은 복지국가’, 맞다. 적어도 이 당면 과제에 관한 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는 의견 대립보다는 공동 실천의 드넓은 지대가 존재한다.

기본소득제 주목 필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복지국가로 나아간다는 것이 꼭 북유럽 ‘모델’을 수입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나라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다. 따라서 공적 복지를 확대한다는 방향은 같을지라도 공적 복지의 구체적 내용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제 구상을 예로 들 수 있다. 기본소득제란 요즘 서구 좌파 내에서 논의되는 새로운 공적 복지 형태다. 간단히 말해, 모든 시민들에게 일정 액수의 현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즉, 복지 수당을 임금 소득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임금과 함께 모든 시민의 소득의 주요 구성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너무 급진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서구 복지국가의 맥락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 동안 주택 수당, 아동 수당 등의 형태로 지급되던 각종 현금 지원 제도를 하나로 통합하고 보편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구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이 구상은 우리의 복지 확충 과정에서도 상당한 현실 적합성을 지닐 수 있다. 아니, 이미 이전의 복지 체계가 깊이 뿌리를 내린 서구 국가들보다는 오히려 이제야 막 새로 복지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 구상이 보다 더 설득력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등 저소득 노동자의 증가 때문에 그렇다. 이들의 가장 긴급한 문제는 낮은 임금 수준이다. 이 문제가 생기는 구조적 이유는 노동은 사회적으로 이뤄지는 데 반해 임금은 기업 단위로 결정된다는 데 있다. 모두가 사회 전체의 생산에 기여하는데도 어느 기업에 속했는지에 따라 분배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

북유럽 따라배우기로는 안된다

이것을 해결할 방안 중 하나는 다수의 노동자를 대변하는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이 강력한 연대임금 교섭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임금 편차를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를 실현시킬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타개책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게 기본소득제다. 임금 교섭으로 안 된다면 기본소득제 같은 조세-재분배 체계를 통해 이 문제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기본소득제는 하나의 정책 구상일 뿐이다. 앞으로 더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놓고 이념 논쟁을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단순한 북유럽 따라 배우기는 아니라는 점만은 확인하자. ‘21세기 초 혼돈의 시대’에 ‘한국 사회’에 맞는 공공 복지 체계를 설계하고 실현하는 일은 훨씬 더 독창적이고 그래서 더 어려운 시험이 될 것이다.

더구나 중앙정부를 통해 공공 복지의 전면 확대를 추진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먼 미래에나 기약할 수 있는 일임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가능성이다. 지방정부를 무대로 제한적인 수준에서나마 새로운 공공 부문을 건설, 운영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적 지지를 넓혀 나갈 가능성.

역사적으로는 1920년대의 ‘붉은 비엔나’나 80년대 초 런던광역시의 ‘도시 사회주의’, 최근 라틴아메리카의 참여민주주의 실험 등의 사례들이 있다. 이제 이 대열에 우리의 또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야 할 때가 됐다.

부문 간에 평화 공존은 없다

새롭게 등장한 풀뿌리 부문과 공공 부문은 기존 경제 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은 사적 시장과 상당 기간 공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 사이의 관계가 ‘평화 공존’인 것은 아니다.

사적 시장이 지배하는 영역은 점차 축소돼야 한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부문들에서 훈련한 행위 양식들을 사적 시장으로까지 확산시켜야 한다. 맑스주의 전통에 따라 이야기하면, 시장 자체가 생산자와 소비자 등 민중들 자신의 자주관리 아래 놓여야 한다. 폴라니 식으로 말하면, 시장이 다시 사회에 끼워 넣어져야 한다.

공공 주택 확대를 예로 들어보자. 공공 주택을 늘리는 것이 현존 부동산 시장과 장기간 공존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부동산 시장을 대폭 축소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새로운 부문들의 구축과 사적 시장에 대한 개입이 무슨 단계론적인 선후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일단은 풀뿌리 부문과 공공 부문을 만드는 데 주력하다가 그 이후에야 사적 시장의 복속을 꾀하는 식일 수는 없다. 금융 위기 같은 상황이 닥치면, 오히려 사적 시장의 제압이 가장 긴급한 과제가 될 것이다.

세 가지 경로

기존 경제 구조의 핵심에 개입해 들어가는 경로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지금 필자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다음 세 가지 경로다.

첫째, 앞으로 예상되는 연쇄적인 금융 위기 때마다 이를 거대 금융 세력과 대결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체제 위기의 부담을 거대 자본 자신에 물려야 하고, 강력한 공적 금융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물론 그 수단 중 하나는 금융 기관의 국공유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유화’만을 외친다고 그것이 만병통치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 구축한 공적 금융 체계를 통해 어떻게 자본 소유 구조를 바꿔낼지, 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축적 구조에서 양극화의 피해 대상이 돼온 영역들에 어떻게 자본을 새로 분배할 것인가? 국공유화는 이러한 종합적인 대안 경제 정책의 일부로서만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

둘째, 에너지 전환 과정과 지역 순환 경제를 만드는 과정(수도권-지방 관계의 재편 등을 수반할)에 주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장 바깥의 사회적 결정에 따라 경제 활동을 재편해가는 값진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후 대안 사회의 기본 원리가 될, 경제 활동에 대한 사회적 자주관리의 도제 과정, 숙련 과정이 될 것이다.

스탈린주의 계획 경제(더 정확히 말하면, 명령 경제)는 1930년대 소련 경제의 초고속 성장을 추진하면서 등장했다. 성장 일변도의 실천들 속에서 중앙집권형 경제의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그 꼴을 갖추었다.

반면 우리 시대의 자주관리 경제는 성장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재편하며 제어하는 과정에서 등장할 것이다. 생태 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쌓인 경험들이 미래 경제의 원리로 스며들 것이다.

사회적 자주관리, 노동운동의 이상과 원칙돼야

셋째, 개별 기업 내에서도 끊임없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자주관리를 제창해야 한다. 이것은 지금의 계급 역관계로는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먼 미래의 일로만 미뤄둘 일도 아니다.

지금부터 노동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이상과 원칙임을 확인하고 그 공감대를 늘려가야 한다. 진보정당도 그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해야 한다.

다만, ‘사회적 자주관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노동자 자주관리에 대한 과거의 협소한 시각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미 모든 경제 활동은 다 지극히 사회적으로 이뤄진다. 그럴수록 자주관리의 주체와 그 범위도 더욱 사회적이어야만 한다.

자주관리의 범위가 기업 단위 안에만 갇혀서도 안 되고, 그 주체가 해당 기업 노동자들만일 수도 없다. 유관 업체의 모든 노동자들, 지역의 모든 노동자들이 그 주체여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소비자, 지역 주민 등도 그 주체여야 한다.

따라서 자주관리 운동은 개별 노동 현장의 운동에 머무를 수 없다. 보다 많은 노동자들 사이에 단결을 확대하고 광범한 민중 세력들 사이의 동맹을 촉진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에 보다 주목해야 한다.

혼합 경제에서 다주체의 복합 사회주의로

혼합 경제는 그 자체로 어떤 장기 지속 체제는 아니다. 물론 북유럽 복지국가들처럼 과도적인 혼합 경제가 하나의 체제로서 장기 지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도기’의 장기화일 뿐이다.

진보 좌파의 목표는 대위기의 진원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이다. 혼합 경제는 이 극복 과정, 즉 탈자본주의 대안 사회로 나아가는 여정 그 자체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과도적인 경제 구조가 소극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지향할 탈자본주의 대안 사회는 과거의 국가사회주의 같이 어떤 전일적 지배 요소로 이뤄진 일괴암(monolithic) 사회일 수 없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단지 국가를 민주화한다는 점에서만 ‘민주적’인 것이 아니다. 국가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이 주역이 된다는 점에서 또한 ‘민주적’인 것이다.

위에 제시한 것과 같은 혼합 경제는 이러한 민주적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데 가장 적합한 경로다. 혼합 경제는 다주체의 복합 사회주의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물론 진화 과정에는 단절적 변혁의 계기들도 포함된다). 21세기의 대안 사회는 1930년대에 어느 소련 공산당원이 생각하던 사회보다는 차라리 길드 사회주의(생산자 연합, 소비자 연합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에 더 가까울 것이다.

대안사회의 성숙도 지표

그럼 탈자본주의 대안 사회의 성숙을 확인할 잣대는 무엇인가? 옛날처럼 사회적 소유 부문이나 계획 활동이 차지하는 몫을 양적으로 표시하는 게 그 지표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지표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필자가 아래에 제시한 것과 같은 몇 가지 원칙들이다. 이들 원칙이 과도기 경제 내에서 서로 다른 각 부문들 사이의 경계를 넘어 얼마나 관철되고 있는지가 성숙의 가늠자가 될 것이다.

그 첫째는 생산 및 소비 활동의 생태적 지속 가능성의 확보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전환과 농업 회생, 지역 순환 경제 구축 등을 중심으로 한 전 사회적 생태 전환의 진전 여부.

둘째는 시민들의 경제적 자치 능력의 확대, 즉 경제 민주주의의 근본 조건 확보다. 이것은 다시 보편적 복지의 충족과 노동시간의 전반적 단축, 그리고 다양한 자주관리 활동에 대한 참여로 나타날 것이다.

셋째는 지역 순환 경제와 일국 경제, 지역(동아시아, 유럽, 라틴아메리카 등) 경제 그리고 세계 경제 사이의 최적 결합을 찾는 것이다. 어떤 폐쇄 경제나 환상적 세계화가 아니라 각 경제 단위 사이의 생산 및 교역 활동의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균형을 형성하는 일.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혼돈의 시기에 우리가 반드시 도전해야 할 과제다.

민주적 생태적 사회주의 – 하지만 이름은 뭐라든 좋다 

여기까지가 요즘 필자가 고민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진보신당 제2창당 토론에 한 명의 당원으로 제시하고픈 생각의 더미다.

한데, 사람들은 어떤 내용이든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마음에 가장 흡족한 것은 ‘대지와 뭇 생명과 인간의 사회주의’다. 하지만 내용의 빈약함에 비해 너무 거창하고 허황되다는 느낌이다. 좀 더 축약하면, 아마 ‘민주적 생태적 사회주의’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름은 어디까지나 이름일 뿐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이름은 어떻든 좋다. 공동의 궁극 목표를 확인하고 거기까지의 여정을 함께 고민하며 그 첫 발자국을 함께 떼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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