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상공론할 여유도 기분도 아니지만"
        2008년 11월 12일 02: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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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인가 <레디앙>에서 혁명 관련의 제 여러 글에 대한 ‘다함께'(국제주의적 사회주의 혁명 단체) 회원이라고 하는 정병호 님의 반론(‘근본적 변혁’이 더 현실적이다)을 읽었어요. 그걸 읽고 나니 일종의 죄책감이 드네요.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제가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느라고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까?

       
    ▲ 외국 ‘국제사회주의자’ 그룹의 활동상
     

    전세계가 점차 대공황에 휩싸여가고 있고, 제가 사는 노르웨이의 동종동문의 형제국인 아이슬랜드가 사실상 경제 파탄 상태에 빠져 한국의 10년 전의 IMF사태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경제적 뇌사에 가까운 상황이고, 우리 대한민국도 1~2%성장 시대에 다 온데다가 은행의 악성채무라는 이름의 부실, 부동산 버블 등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파탄 직전 상태이고 ….

    생산성이 좀 나아지고 정부들이 위기 관리의 케인즈주의적 수법이 약간 진화해서 그렇지, 구조적으로 봤을 때에 우리의 역사적 시계는 지금 다시 한 번 1929년입니다. 그리고 케인즈주의적 위기 관리의 수법들이 ‘진짜 위기’의 도래를 연기시킬 뿐 구조적으로 불가피한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자본주의 공황론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것입니다.

    미국이 세계 소비의 40% 가까이 담당하면서 세계 생산의 20% 정도만 담당하는 ‘금융 지배의 패권국가’가 됐다면 전체적인 이윤율 하락의 추세가 금융권을 강타했을 때에 그 소비량도 결국 적어도 20~30% 가까이 축소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미국 시장에 의존하는 중국과 일본, 미-일-중 시장에 의존하는 우리 등등은 다 연쇄 파탄의 파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탁상공론할 여유도 기분도 없다"

    우리가 건국 이후의 최고의 위기권으로 지금 빠져들어가고 있는 중이죠. 그럴 때에 민중의 권익을 위해서 같이 나란히 서서 같이 싸울 동지들과 굳이 탁상공론할 여유도 기분도 없습니다.

    왜 탁상공론이냐고요? 정병호님 등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을 긍정하시는 것까지 다 좋은데, 혁명을 긍정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혁명의 지도자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마찬가지로 저처럼 "제발 인명을 경시하지 말라"고 외친다고 해서 막상 내전과 같은 상황이 닥칠 경우에는 결국 혁명의 편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혁명이 아름다워서가 아니고 반동이 더 무서워서 그럴 수도 있고, 마르토브 선생처럼 "노동자들이 잘못된 길로 간다 해도 그들과 같이 가겠다"는 철학일 수도 있고….

    볼셰비키들 같으면 벌써 1905년에 이바노보의 총파업과 최초의 소비에트 운동을 이끄는 등 진보적 노동자의 지도 단체, 수많은 파업들의 조직자들로서 명성이 높았어요. 저는 볼셰비키에 대해서 상당히 다면적인 평가를 합니다.

    그 민중성이나 급진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하고, 그 구조적 경직성이나 농민들을 무시하는 도시 제일주의적 버릇에 대한 안좋은 생각도 있고. 그러나 어쨌든 간에 볼셰비키들은 이미 1917년 이전부터 전위적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이었어요.

    ‘다함께’도 과연 그런가요? 과문의 탓일 수도 있지만, 저는 ‘다함께’가 이끈 파업이나 ‘다함께’가 지도하는 노동조합을 아직도 본 바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함께’가 공장 노동자로 적위군을 조직하여 청와대를 포위, 공격할 확률이 현실적으로 아주 낮기에 그가 좋은가 나쁜가에 대한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당분간 그만둡시다.

    다함께의 파업? 다함께의 혁명?

    뭐, 망국 직전으로 가면 파국을 그렇게라도 해결해야겠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이명박과 그 친구들의 망나니짓들이 좀 끝이 나고 민중의 가장 절실한 요구부터 관철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해봐야죠. ‘다함께’ 회원 분들과 함께.

    그런데 현실성이 낮은 일에 대한 탁상공론을 그만두더라도 ‘혁명’ 관련의 이론적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 핵심적 문제들을 좀 다루어봐야겠어요. 역사 이해의 중심적 부분이기에 피차간에 역사관 정리에 좀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다만, 한 가지 양해를 구해야 할 부분은, 제가 낮에 글을 쓸 시간이 없고 대체로 깊은 심야에, 이미 거의 힘이 빠진 상태에서 글을 쓰기에 이 이야기를 몇 회로 나누어서 천천히 조금씩 적겠습니다. 다 한꺼번에 할 만한 여력이 없는 거죠. 오늘은 첫 회인 셈인데, 가장 기본적 틀부터 제시해보죠.

    이 세계의 역사는 계급적 지배, 즉 권력 행사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생산력이라는 토대의 진화에 따라 거기에 상응하는 상부구조상의 관계, 즉 권력 행사의 방식 등도 계속 진화됩니다. 생산성이 가장 높고 일반의 소비 수준이 가장 높은 세계 체제의 핵심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입니까? 바로 계급 권력 행사의 가시적인 ‘탈폭력화’죠.

    예컨대 준핵심부의 한국만 해도 정병호님과 같은 분들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관헌들은 지금도 필요만 생기면 법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폭력적 지배로 회귀하지만, 노르웨이 같으면 우리와 같은 공무원노련의 조합원인 경찰들은 지금 월급이 적다 하여 파업할 지경입니다.

    노르웨이판 다함께와 노르웨이 지배자들

    경찰의 임금도 배관공보다 훨씬 안좋기에 경찰지망생이 없다고 난리죠. 경찰도 그렇게 2만 명이 될까 말까 하는, 징병제 군대도 그렇고 여기에서 이미 지배계급이 반민중적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못됩니다.

    그러면, 노르웨이 지배자들이 노르웨이판 정병호들에게 타도를 당할 것 같아서 밤잠을 설치고 있나요? 아니죠. 정병호님들과 취향이 비슷하신 분들이 여기도 있지만 요즘 감시 대상도 안된다고 합니다(이슬람 혁명가들은 감시대상이고).

    그러면 그렇게 자신이 있는 이유가 뭐죠? 바로 저들의 지배에 아주 두꺼운 ‘동의적 기반’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 연간 평균 2~3%씩 실질 소득이 향상돼온 노르웨이 민중들은 이 체제를 교정 대상으로 볼 수 있어도 타도의 대상으로 볼 일은 당분간 없습니다.

    그러면, 이 체제의 기반이 ‘대중적 동의’라면 체제를 바꿀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방식도 레닌의 시기와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잘 아시겠지만, 제정 러시아는 동의가 아닌 총검으로 다스려지는 기아와 문맹의 왕국이었잖아요? 그러면 이처럼 크게 바뀐 상황에서 체제의 비판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음 회에서 계속 이야기해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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