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PA는 무엇인가?
        2008년 11월 27일 02: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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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원제목은 「반자본주의신당(NPA)의 설립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가?」이다. 필자인 피에르 루쎄는 68세대 활동가이자 연구자로, 한국 ATTAC 회의 때 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 편집자 주

    2007년 6월, 프랑스에서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이 반자본주의 신당(NPA) 건설을 제안했다. 1년 후, 약 일천여 명의 대표들이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하나의 시도를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파리에 모였다.

       
    ▲ 필자

    2008년 11월 초, 약 400여 명의 지역위원회 대표들이 3가지 논제 즉 활동 강령, 정치적 방향성 그리고 NPA의 위상과 기능 등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다시 모였다. 지금 현재 대략 만 명의 운동가들이 이 건설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LCR의 기존 당원수보다 3배나 많은 수이다. 그러나 숫자 놀이의 매혹을 경계하자. 분명 NPA에 관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여기에 스스로를 투자할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위원회가 그들을 맞이할 만큼 잘 기능할 수 있을는지를 알기에는 너무 이르다. 게다가 새로운 정당의 설립 이후에 새로운 가입의 물결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

    NPA의 정치적 충격은 매우 중요하다. 일련의 공간들에서, 창당 과정 중에 있는 이 정당은 매우 활동적이고 사실상 벌써 LCR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2008년 11월 6일 파리에서는 2000명 이상의 참가자들과 함께 최초의 대중회의를 개최했다.(「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 제안 첫대회」)

    11월 15일, 프랑스 남부의 몽펠리에에서는 1500명이 참가했다. 이 참가자들의 수들은 2007년 LCR의 대통령 선거 당시보다 때때로 더 중요한 숫자이다. 물론 어떤 지역들은 다른 지역들만큼 진전을 보지 못하며 진행은 더욱 느리다.

    확정된 절차는 1월 29일 LCR의 정치적인 해산과 NPA의 설립회의가 2009년 1월 30일에서 2월 1일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거다. 모든 것들이 정해진 시간을 향해 진행되고 있다. NPA의 설립 과정이 진전되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그것은 명백히 하나의 정치적 기다림에 답하는 것이다.

    이 기다림, 이 ‘새로움’의 필요성이 인지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프랑스에서 지난 10여 년간 LCR보다 더 질적으로 광범위한 반자본주의 정당을 건설하려는 시도들이 모두 실패했다. 이 실패들을 넘어서기 위해, LCR은 새로운 방향을 시도하기를 결심했다. 너무나 새로워서 과거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을….

    그래서 지금 반자본주의신당 설립과정에 새로운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다른 모든 시나리오들이 실패하고 난 후…

    LCR은 NPA를 착수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 조직이 과거, 사회의 넓은 영역들 속에 사회적으로 뿌리내린 혁명적 정당의 설립을 어떻게 고민해왔는지를 되돌아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쇠진해가는 나의 세대, 이른바 68년 5월 세대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시각은 이미 LCR나 NPA 내에서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그 역사적인 유산은 고려되어야 할 그런 것이며 특히 오늘날 진행 중인 변화의 ‘새로움’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과거에는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을 바라보았는지 간략하고 단순하며 도식화된 방식으로 소개하면서 시작하려 한다.

    1960년대에 우리 세대는 활동적이고 급진주의적인 새로운 조직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이 조직들은 소규모였다. 일반적으로 수백 명으로 시작해서 이후 조직이 약화, 스스로 해체되기 전까지 최대 5천에서 만 명 정도가 참여했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우리는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결정적인 계급간의 대치가 일어나기 이전에 우리는 재빨리, 열정적으로, 위기 속에서, 강력한 실천력으로 새로운 혁명적 정당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우리는 역사의 리듬이 우리가 믿었던 것보다 훨씬 느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기적인 전망에서 대중에게 뿌리내릴 수 있는 혁명적인 정당의 구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우리 세대에게 이것은 정신적 혁명이었다).

    LCR은 사회 속에 넓게 뿌리내린 혁명적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 결코 자신의 성장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그것은 좌파와 노동운동 안에서의,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훨씬 폭넓은 ‘재구성’과 힘들의 재배열 과정의 결과물일 것이다.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시나리오를 고려했다.

    1. 노동자들이 지지하는 기존 정당(사회당, 공산당)에서 노동자들이 대거 이탈하여 급진화되는 방법

    우리는 아마도 이 도식은 이탈리아에서 불안정한 사민주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탈리아 공산당의 우경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창당된 재건공산당과 같은 형태를 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경우가 다르다. 장-피에르 슈벤느망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당 분파는 ‘좌파 국가주의자’가 되었다. 그것은 모든 내실을 잃어버리는 지점까지 몰락했다.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을 관통하는 지속된 위기는 이탈리아에서 생긴 일과 비교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허락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늙은 좌파’는 부분적으로라도 스스로를 소생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최근 사회당의 장-뤽 맬랑숑의 이탈이 이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우리는 좌파로 근본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새로운 대중적 노동자 정당의 설립에 대해 숙고했었다.

    그러나 맬랑숑은 ‘공화주의 좌파’ 프로그램을 위해 LCR보다도 적은 수의 멤버들과 함께 사회당을 떠났다. 그는 단번에 정권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좌파 정당’을 설립했고, 이는 지금 현재로서는 사회당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야망이 되어버렸다.

    2. 노동조합 운동을 통한 노동계층의 새로운 급진적 정당의 설립

    여기에는 기존의 혁명주의 조직들이 함께 참여한다. 즉 ‘브라질식 도식’이다. 노동자 정당의 창당, PT 와 같은 형태이거나 혹은 더 최근으로는 남한의 경우로 민주노총(KCTU)은 민주노동당(필자 후주①)의 창당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이 두 경우의 정치적인 시도는 군사독재의 혹독한 시기 이후 재조직된 ‘젊은’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결행되었다. 프랑스에서 주요 노동연맹체들은(CGT, CFDT, FO) 이러한 활동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위의 두 사나리오들에 잠시 멈춰보자. 이들은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며 소규모의 급진좌파가 (홀로) 원동력이 될 수 없는 노동운동 내에서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점들을 담고 있다. 이 시나리오들이 몇몇 국가에서 형상화되었다는 측면에서 이는 무모한 가정은 아니다.

    PT가 변했다고 해도(사회-자유주의 정당) 그들이 계급투쟁의 위대한 정당이었음과 그리고 1980년 그 창당이 대변하는 사건들 잊어버려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프로디 정부 내에서의 재설립의 실패가 극좌파까지 참여하는 이탈리아 좌파의 광범위한 재구성을 허락했다는 점마저 같이 잊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예들은 매우 드물다. 이들은 예외를 대변하지 통례를 대변하지는 않는다.(필자 후주②)

    3. 세 번째 시나리오 : 급진좌파의 두세 개의 중요한(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정치조직들이 함께 새로운 정당의 구성을 제안하는 것

    이는 특히 포르투갈(좌파 블록), 덴마크(적과 녹의 연합)에서 일어났다. 이는 세 가지의 시나리오들 중에서 앞의 것들에 비해 훨씬 온건했기에 가장 간단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프랑스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런 반면에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노동자 투쟁(LO)의 아르레뜨 라귀에의 득표율(5%)와 2002년 아르레뜨 라귀에와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놀라운 총득표율(10%)에서 보듯이 정치적인 공간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존재한다.

    이 영역에서의 프랑스의 교착을 설명하는 첫 번째 이유는 LCR이 급진좌파 중에서 통합정당의 설립을 희망하는 1960~1970년대 급진화의 유일한 직접적인 후손이라는 점이다. 그 시대의 ‘생존자들’인 다른 두 조직은(노동자투쟁(LO)과 람베르트주의 정파들) 이러한 관점에 어떠한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필자 후주③)

    2005년 신자유주의적, 반민주주의적, 군사주의적 제안의 유럽 헌법에 대한 선거에서의 반대 승리 이후 프랑스에서는 어쨌든 하나의 중요하고 새로운 정치적 입구가 생겨났다. ‘좌파의 좌파’ 내에서 정치적 연합체에 대한 강한 희망이 표현되어졌다.

    그러나 연합체는 프랑스공산당에서부터 LCR를 아우르는 다양한 조직들과 지역 위원회를 포함하는 강도 높은 2년여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실현되지 못했다.

       
     

    유럽헌법의 부결이라는 승리에 이어진 연합의 실패는 이 긴 협상에 참여한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 많은 냉소와 협상 실패의 책임을 누가 질런지를 알기 위한 고통스런 논쟁을 야기했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이 실패의 책임을 누가 질런지를 찾는 것보다는 여기에서 언급된 세 가지의 시나리오들이 수십 년에 걸쳐 연속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왜 항상 실패해야만 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또다시 아주 도식적인 방식으로 다음의 요소들을 강조하려고 한다.

    ‘노쇠한’ 정치적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노쇠한’ 정치적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은 급진좌파에 새로운 젊음을 다시 가져다줄 만한 잠재성이 없었다. 정당 쪽을 보자면 사회당의 사회적 뿌리는 변화하였고, 즉 ‘사회자유주의’라는 그들의 방향성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그들의 통합의 깊이를 표현한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그들은 결코 진정으로 스탈린주의에 맞선 과거가 없으며, 오늘날에는 선거에 관해서나 제도적으로 사회당의 인질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공산당은 여러해 전부터 위기 속에 있는데 그것은 불행하게도 ‘활기 없는’ 위기이다. 노동조합들을 살펴보자면, 주요한 세 연합체들은(CGT, CFDT, FO) 너무나 관료화되었다.

    이것은 ‘노쇠한’ 노동운동에 속하는 개인들이나 활동단체들이 NPA나 다른 급진 정당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우리가 1970-1980년대에 희망하던 것과는 반대로 전통적인 노동운동을 ‘재구성’ (‘재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훨씬 근본적인 방식의 ‘재건’이 필요하며 이는 매우 복잡한 일이다.

    새로운 사회운동과 조합운동

    새로운 사회운동과 조합운동이 최근 십오 년에서 이십년 사이에 일어났다. SUD의 창립과 단결(Solidaires), FSU, 실업자와 ‘없는자(sans)’들의 단체(역자 후주①), 다양한 반세계화 구성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상당히 다양한 층위이기는 하나 훨씬 전망 있는 잠재적 급진성이 존재한다. 오늘날 이 운동의 상당수 구성원들이 NPA의 계획에 호의를 보이고 있으며 참여하고 있다.

    2005년에서 2007년 사이 몇몇 조합과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서 ‘좌파의 좌파’의 단일화 방안을 논의했다(일반적으로, LCR에 대한 대항으로서). 이러한 논의는 사회운동의 주목할 만한 진화와 프랑스 정치 광경의 부동성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수 있는 긍정적인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협상들의 지체와 이후의 실패는 이러한 측면들의 노력들까지 멈추게 하는 작용을 했다.

    더욱 심오하게는, 프랑스에서 사회운동과 정치정당 간의 관계는 어려운 상태로 남았다. 노동조합들과 다른 대중조직들의 독립성은 특히 ‘민감한’ 문제이다. 이는 몇몇 부정적인 이유들(‘활동가의 환영幻影’) 때문이기도 하나 특히 합당한 이유들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과거 도구화와 막후 공작을 당했던 경험들.

    이러한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 미래에는 더욱 효율적인 상호 활동성을 보장하기 위해, NPA와 같은 급진적 정당은 실천적으로, 그리고 일관적으로 사회운동 자체의 독립성과 민주성을 존중한다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좌파의 좌파

    프랑스에서 ‘좌파의 좌파’가 무엇인지를 묘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구성체들이 정치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산당은 그 구성체들과 가장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프랑스 공산당은 깊고 불명확한 위기 속에 있다.

    LCR은 단일체의 구성을 위해 노력하는 ‘극좌’(혁명적) 조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소그룹들과 경향들, 비공식적 활동가들의 연결망, 지역구성체들, 당원들, 개인적 ‘인물들’…. 이 모두가 단순한 정당들의 연합에 비해 훨씬 넓은 하나의 ‘경향’, 하나의 ‘영역’을 형성한다.

    2007년 선거를 위해서 2005년과 2006년 사이에 단일후보를 선출하려던 시도가 왜 실패했는가? 왜 단일화의 희망이 파편화 속으로 어둡게 침잠했는가?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기존에 일어난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중심적인 정치적 질문이 존재한다. 즉 사회당과의 관계, 선거연합과 정권에의 참여에 관해서다.

    사회-자유주의, 혹은 중도좌파와의 연합이라는 문제는 정권참여가 명백한 조건이었거나 조건일 여러 국가들에서 ‘좌파의 좌파’로서는 핵심적 문제이다. 브라질, 서뱅갈,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네델란드….

    프랑스에서는 선거 시스템이 매우 반민주적이다. 의회에 선출될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는 사회당의 지지가 있어야만 한다. 그 지지는 까닭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약화된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선거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사회당과의 협약이 필요하다.

    1차적으로 공산당과 연합하려는 자는 이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때때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고 해도, 그들은 현실적으로 사회당과의 선거 블록의 관점 안으로 자동 가입하는 것이 된다.

    LCR은 -다른 ‘좌파의 좌파’의 구성체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점을 거부한다. LCR은 현재의 역학관계 하에서의 정권 참여는 어떤 식으로든지 사회-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질서의 운영을 함께하는 극단적인 타협이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탈리아에서 프로디 정부에 참여한 재건공산당의 참혹한 결과를 보라).

    LCR의 입장에서는 사르코지 정부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고 단일대오의 사회적 저항의 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정당적인’ 측면에서는, 우선 우파보다는 사회자유주의와 같은 좌파의 대안을 구현할 수 있는 급진적인 중심점을 강화해야만 한다. 이는 사회당과의 관계에서의 완전한 독립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선거연합과 사회당에 관한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경계선을 구성했었고 또 앞으로도 구성할 것이다.

    2006년 말, LCR은 ‘좌파의 좌파’ 사이에서 매우 고립된 것처럼 보였다. 2007년 초, 대통령 선거에서 마리-조지 뷔페는 프랑스 공산당을 대표했고, 도미니크 보이네는 녹색당을,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LCR, 조제 보베는 몇몇 ‘좌파의 좌파’의 구성체들을 대표했다.

       
    ▲ 연설중인 브장스노
     

    브장스노의 선거캠페인은 정치적으로 매우 활기찼고, 그는 4% 이상 득표했다. 2%를(프랑스공산당으로서는 기록적으로 낮은 수) 얻은 뷔페는 대통령선거에서 어떠한 활기도 없었다. 보이네의 실패는 명백했고(1.5%), 보베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겨우 1%를 넘는 득표율로 꼴지를 차지했다.

    방향성에 대한 2년여의 심도 있는 토론들 후에, 대통령 선거는 ‘좌파의 좌파’를 위한 더 큰 성격의 정치적 실험을 보여주었다. 선거는 LCR에 새로운 책임을 안겨주었다.

    LCR의 새로운 책임들

    정치적 방향성과 선거 승리 덕분에 LCR은 ‘좌파의 좌파’의 초점이 되었다. 따라서 문제는 “이 승리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LCR은 불붙은 활기를 예전처럼 잃지 않기 위하여 신속히 하나의 시도를 행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2007년 중반, 대통령 선거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반자본주의 신당을 설립하기 위해 다른 중요한 조직들과 동의를 맺는 것은 계속 불가능했다. ‘위에서 아래로’의 어떠한 호소도 가능하지 않았으며, LCR은 ‘아래에서 위로’의 진전을 촉진시키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정당을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NPA의 지역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되었다. 위원회들의 연결망은 새로운 정당의 기반들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LCR보다 질적으로 더 폭넓은 급진정당에는 열린 공간이 존재할 것이 명확하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놀라운 명성이 말해주고 있다. 올리비에는 뛰어난 후보이며 대변인이다. 그의 명성은 ‘미디어적인’ 현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봉급을 받고, 파업에 참여하기도 하는 우편배달부로서, 그는 대중들에게 직업적 정치인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대신 ‘동료-노동자’, ‘우리들 중의 하나’로 비춰졌다. 젊기 때문에 젊은 층은 더 쉽게 그가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말을 하나 더 하자면,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일관성 있다. 27살에 그가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2002년), 그는 이미 LCR의 정치국의 일원이었다. 방송토론회에서 젊은 우체부는 그에게 반대의견을 보이는 직업적인 정치인들과 정부요인들을 참패시켰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한다!

    LCR이 NPA를 시도하도록 허락한 이유 중의 하나는 흔히 간과되어왔는데 그것은 LCR의 지도부가 심도 있게 쇄신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LCR의 모든 ‘역사적인 인물들’은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여전히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당 차원의 지도부는 30대와 40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 내의 다른 조직들의 경우와는 다를 것이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일어난 세대의 급격한 변화를 보면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LCR은 구성원들과 지도부의 체계를 다시 젊어지게 할 줄 알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6~70년대의 LCR의 기원을 벗어나지 않는 조직으로 남았다. 그러므로 LCR은 현재의 운동세대의 정치적 경험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정당의 창조를 촉진할 수 있으며, 또 해야만 한다.

    새로운 정당으로서의 NPA

       
    ▲ NPA지역위원회 회의장면
     

    LCR의 목적은 단순히 더 크고 수가 많은 정당을 구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새로운 조직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URSS)의 해체와 자본주의의 세계화라는 시대의 급격한 변화를 체험했다. 우리는 또한 급격한 세대변화를 경험했다. 오늘날의 운동가들은 68세대와는 같은 지표들과, 같은 집단적 경험과 등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두 가지 (시대와 세대의) 급격한 변화의 결합은 정치와 운동이 생존한 방식에 있어 심대한 중요성을 가진다.

    지난 수십 년간의 정치적 경험들과 20세기의 교훈들(제국주의, 스탈린주의…)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를 잃지 않는 동시에 어떻게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LCR의 유산(모든 구성요소들)을 NPA에 전승하면서. 또한 지난 세기의 다른 혁명적, 정치 활동적 전통 중 최선의 것들과 맑시즘과 자유론자들의 다양한 경향들, 페미니즘과 환경사회주의자들, 반세계주의자들, 등을 받아들이면서….

    사회적 뿌리와 이미 구성된 능숙한 지도체계를 ‘제공’하는 동시에 NPA가 전체 대중사회의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그 영역과 분야를 넓힐 수 있도록 도우면서. 급진적인 노동운동과 자본주의 세계화의 복잡한 양상, 외곽도시(역자 후주②)에서의 저항들, 이민자들의 투쟁들, 차별에 반대하는 투쟁들을 포착하면서. 새로운 정당이 지금 세대의 정치적 언어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

    LCR에 있어서 다른 이들과 함께 더 폭넓은 반자본주의 정당을 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LCR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이를 희망해왔다! 새로운 점은 바로 ‘아래에서 위로’의 진전을 촉진한다는 것이며 NPA의 개념 속에 시대와 세대의 변화를 실제적으로 합치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지점이 아마도 가장 중요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LCR은 NPA의 구성에 참여한 프랑스 내의 ‘좌파의 좌파’ 중에서 유일하게 ‘거대한’(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구성체이다. 참여한 다른 집단들은 훨씬 소규모이다. 그런데 NPA의 설립 이후에 LCR이 정당 내의 정당으로 남는 상황은 피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엄격한 결정들이 취해졌다. LCR의 멤버들은 NPA를 운영하는 위원회들 내에서 일반적으로 소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LCR은 NPA의 설립총회 이전에 해체되어야 할 것이다.

    NPA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생산하는 동시에 정치 사회적 융화의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정치적으로 여기에 동의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쉽다. 일단 사회당과의 관계문제가 해결된다면, 오늘날에는 예를 들자면 1970년대의 ‘소비에트 연방의 성격’과 같이 분열을 일으킬만한 논쟁 주제는 없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이론적인 단련이 부족하며 전략적인 질문들은 거의가 구체적인 답을 얻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떻게 부르주아지를 무력화시킬 것인가? 등. NPA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체계적인 기반을 굳건히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많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다가올 진로는 상당히 불명확하다.

    NPA가 부딪힌 가장 기본적인 어려움은 그 이름을 정하는 것이다! 이는 전혀 우스갯소리 같은 일이 아니다. 6,70년대에는 일종의 ‘공통된 정치적 소유물’을 구현하는 단어들이 존재했으며 모든 ‘좌파의 좌파’는 이를 인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는 형용사 ‘공산주의(의)’이었으며 벨기에에서는 ‘사회주의(의)’였다. ‘프롤레타리아’나 ‘노동자’와 같은 단어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모든 단어들은 오염되었다.

    어떤 공통의 경험을 (거의) 모두가 나눌 수 있는 ‘일체화된 이름’을 재구성해 내지 못했다. 이 점은 이름을 결정하는 데 대한 어려움을 반영하며 나아가 정해진 정치적 간격을 반영하고 있다.

    LCR을 해체하는 결정은 확실히 위험하지만 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다. 현재의 기회를 잡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아마도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이는 모든 ‘좌파의 좌파’에 해당한다. NPA는 거대해진 LCR로 비춰지거나 실제로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대신 질적으로 새로운 정당이 되어야 한다.

    좋은 참여율로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정당에도 참여해 본 적이 없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예전에는 프랑스공산당과 다른 단체들에 소속되었던 많은 이들, 조합과 노조의 활동가들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만일 2009년 1월 말로 예정된 NPA의 창당이 성공한다면 현재 LCR과 연합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좌파의 좌파’ 내의 정치적 구성체들 또한 아마도 의견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과해야 했었고 또한 앞으로 통과해야 할 여정들을 어림잡기 위해서는 2009년 2월 초와 NPA의 설립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루쎄 피에르 (ROUSSET Pierre), 2008년 11월 21일, 파리

                                                             * * *

    필자 후주

    ① 올해 새로운 진보신당(NPP)이 창당하면서 민주노동당으로부터 분리되었다.
    ② 나는 여기서 동유럽의 과거 정권의 후신인 정당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될 것인지를 다루지는 않는다. 이는 내가 너무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경우이다.
    ③ 다른 ‘전통적인 극좌파’의 후신인 흐름들은 이보다 매우 작은 규모이다.

    역자 후주

    ① SUD와 Solidaire는 좀 더 강한 좌파적 성향과 투쟁적인 노동조합연맹들이며, FSU는 단위노조로서 교육공무원 노조Organisation des fonctionnaires de l’enseignement가 그 전신이다. sans은 “없다”는 말로 여기서는 무허가체류자(sans papier), 노숙자 (sans domicile fixe)등, 프랑스 사회 내 소외계층을 의미한다.

    ② 여기서 외곽도시 Banlieu는 파리외곽 특히 북쪽으로 형성된 지역을 일컫는다. 이주 노동자,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현대식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곳은 가난, 차별, 인종, 범죄의 상징체가 되었고 점점 게토화 되어가고 있다. 특히 지난 2005년 겨울 사르코지, 당시 내무부장관의 인종차별 정책과 발언에 대한 폭력적 저항이 진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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