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즐겁지 않았다"
        2008년 11월 11일 10: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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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들 그렇지 않았을까. 봄부터 여름까지 광화문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싱싱하게 저항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모르는 얼굴들이 정겨웠다. 입시학원과 서열화에 찌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10대들의 거침없는 발언은 어찌나 상쾌하던지. 어깨도 안아주고 싶고 손도 잡아보고 싶었다.

    유모차를 끌고나온 어머니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줌마의 힘으로 경찰의 폭력을 무력화시켰고 청와대로 가는 길이 막혀 밤새도록 싸우는 새벽이면 경찰이 퍼부어대는 물대포에 “더운 물”을 달라고 외치며 군중들은 권력의 폭력을 조롱했다.

    도대체 청와대에 가서 뭘하려고 이렇게 아우성인 걸까? 옆에선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일단 명박이 보고 나오라고 해서, 얘길 해봐야지.”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보냐고 큰소리치는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상상을 해보면 우리가 모두 청와대 안뜰에 가서 이명박 대통령더러 나오라고 하고, 잠옷을 입고 나온 이명박 대통령이 졸린 눈을 비비면 “광우병 걸린 미친소는 너나 먹어!” 이렇게 말하고 나온다는 건가?

       
      ▲ 촛불을 든 소녀들 (사진=손기영 기자)
     

    그런데 나는 왜 즐겁지 않은가? 

    그렇게 온몸의 에너지를 자유롭고 발랄하게 표현하는 군중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마땅히 춤추며 기꺼이 그 군중의 한 명이 되어야 할 나는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발랄하지 않았고, 나는 즐겁지도 않았다.

    광화문 그 뜨거운 광장에서 발랄한 군중들이 너무너무 부러워서, 슬펐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초라한 농성장이 머릿 속에서 맴돌았고, 너무 많은 사업장에서 올라간 크레인과 철탑과 굴뚝의 외로움이 몸에서 떠나질 않았다.

    단식을 하는 동지에게 밥을 먹으라고, 우리가 싸움에서 패했으니 그만하자고 말할 수가 없어 입 다물고 가슴을 치는 억울함이 돌덩이처럼 징징 울었다. 비정규직 싸움을 하는 우리는 왜 외로울까? 그리고 심지어 불쌍할까?

    광화문 촛불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간 이후 마치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좌파에게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허기지다. 그동안 상상력이 없어서 비정규직 투쟁이 고립되어 외로웠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동안 가장 좌파적인 상상력으로 투쟁해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발견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는 것이다.

    ‘좌파적 상상력’ 이전에 우리가 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면 주는대로 받고, 해고되면 찍소리 없이 나가라고,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숨죽여 살아도 아무 때나 해고되고,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싸워도 아무 때나 해고되어 길고 지루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반복해서 살아낸 후에도 여전히 길거리 천막에서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밖에 살 수 없어서 싸우는 노동자들은 물론 발랄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무엇인지 알지못했고 비정규보호법이 어떻게 현실에서 비정규직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던 가난한 사람들이 해고될 위협에 처해 할 수 없이 만든 노동조합. 하루이틀은 아니지만 한 달 두 달이면 싸움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가난한 노동자들이, 설마 쉽게 끝나지 않아도 내년 여름까지 싸우기야 할까 상상도 하지 못했던 끈질긴 투쟁을 서로의 야윈 어깨에 기대어 지난 몇 년처럼 오늘도 싸운다.

    우리는 사람도 아니었구나… 그렇지만 상상한다

    어째서 경찰은 거짓말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은 우리에게 그토록 성내며 위협하는지, 어째서 법은 늘 회사의 편인지, 알고 보니 우리는 사람도 아니었구나!

    그렇지만 상상한다. 어제까지 단식하던 동지가 작업복을 입고 라인에서 일하면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경쾌할지 상상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넘어 자동차를 만드는 모든 공장의 노동자들이 어깨걸고 싸우는 것을 상상하고 배 만드는 노동자들, 전기를 다루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죽지 않는 것을 상상한다.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화물연대 트럭을 타고 시민들과 함께 광화문을 지나 청와대로 질주하는 상상을 한다. 청와대 안뜰에 모여 앉아 이명박을 세워놓고 술을 마신들 어떠랴!

    그런 날은 없다고 하겠지.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유연화된 노동 위에서 더많은 이익을 얻는 것들이 술잔을 들며, 계란으로는 절대 바위를 깰 수 없다고 잘난 척하며 코웃음치겠지. 그러나 우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배고픈 비정규직 투쟁은 전복의 상상력이다. 우리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고 싶다. 발랄하게.

                                                      * * *

    앞으로 <레디앙>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 현장의 소식을 전해줄 권수정씨는 강원도 정선 산골 광산촌에서 자랐으며, 봉제공장과 과자공장에서 라인을 타며 광부였던 아버지의 노동을 이해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노동자다. 

    ‘비정규직 24시’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하는 권수정씨는 2003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 사내하청지회 설립 이후 해고됐으며 현재 비정규직 싸움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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