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혁명, '거창한 얘기'하기 전에
        2008년 11월 09일 11: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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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에 ‘혁명’과 ‘급진적 개혁’ 문제에 대한 <다함께> 회원인 김종환 님의 기사(박노자씨에 대한 반박)를 읽었습니다.  저는 누구의 것인지도 잘 모르고 김종환님의 블로그에 게재된 구미 지역 반전 운동에 대한 다소 희망적/낙관적 의견을 읽고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는데, 제 의문에 대한 답변인 셈입니다.

    그걸 읽고서 사실 이 논쟁을 과연 더 이상 지속시켜야 하는지 약간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죠. 일어날는지 어떨는지 저도 모르고 김종환님께서도 모르실 ‘혁명’에 대한 의견만 제외하고서는, 저와 김종환 님의 사이는 어디까지나 ‘뜻(志)을 같이 하는(同) 사이’, 즉 동지적 사이죠.

    혁명과 신학

       
      ▲박노자 교수
     

    미래의 혁명에 대한 논쟁이란 현실이 아닌 막연한 가능성을 갖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어디까지나 신학적 성격이 강하죠.

    사후에 영혼이 사는지 죽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고, 죽은 자들이 말이 없기에 ‘신학’이란 어디까지나 사실이 아닌 가능성을 가지고 하는 학문(?)인데, 미래의 혁명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같은 측면이 없지 않아 있죠.

    그러나 현실을 이야기하게 되면 최고 세율을 약 60%까지 높이자든가, 부동산 투기꾼의 재산을 몰수하자든가 쓸데 없는 군대부터 좀 축소시키자든가 등등 제게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김종환님께서도 아마도 빠짐없이 다 지지하실 것이기에 굳이 애를 쓰고 논쟁을 할 만한 맛이 안나죠.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도 있고 종교에 대해서 신경을 아주 많이 쓰긴 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는 종교가 아닌 통계 등 사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걸 미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구미 지역 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해서 ‘사실’을 바로 잡는 차원에서는 몇 줄을 적는 것이 바람직할 듯해서 이렇게 자판을 다시 두들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이 글을 보시는 분의 다수에게 ‘구미 지역 노동자’들이란 레닌이나 트로츠키만큼이나 머나먼 추상적 타자지만 제게는 매일 직장에서, 지하철에서, 아이의 학교에서 부딪치는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제 출생이나 국적을 망각하고 이야기하자면 저도 현실적으로 ‘구미 지역 노동자’인 셈이죠.

    유럽 노동자들의 현실

    구미 지역 노동자들이 반신자유주의적 투쟁의 전선에 나서는 것도 사실이고, 대다수가 미국의 지배자들이 유럽 지배자들을 종범 삼아 벌이는 아프간 침략 등 국제적 횡포에 깊이 회의적이라는 것은 순순히 사실입니다. 그만한 투쟁정신도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복지국가를 과연 어떻게 쟁취했겠습니까?

    제 이야기만 해도, 저희 조합(NTL – 노르웨이 공무원 노련)은 제가 오슬로대에서 근로해온 지난 8년 동안 3번이나 파업을 선포했습니다. 물론 파업을 선포하자마자 사용자측에서 당장 우리에게 양보를 했기에 실제 파업 일수가 적었는데, 어쨌든 늘 투쟁할 자세가 돼 있죠.

    지금도 저희 노련과 사용자(오슬로대) 사이에서의 임단협이 결렬 상태에 있고 양쪽에서 투쟁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저희 조합에서 학교 교직원 중에서 43%나 차지하는 임시직(박사 과정생 포함 – 여기에서는 박사과정생도 원칙상 교직원입니다)에 대한 학교의 임금 인상 제안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http://universitas.no/nyhet/52488/).

    상대적 약자인 임시직들을 박대하게 되면 결국 정규직들도 나중에 찬밥 신세가 되기에 우리는 당연히 연대 투쟁을 하죠. 그리고 여태까지 연대해서 막아낸 각종 개악들은 사실 한 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예컨대 학교측에서 개도국 출신과 교환학생이 아닌 일체 외국학생들에게 입학 제한시키거나 돈을 받으려고 했는데, 이를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연대해서 막아버렸죠.

    그러니까 오슬로대에 오셔서 공부하실 분들은 지금도 그냥, 돈을 안내고 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특별히 애타심이 있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단지 우리에게 그나마 정상적인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주는 복지국가제도를 살리지 않고서는 공멸이 올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우리의 계급적 이해관계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연대와 계급적 이해관계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구별을 꼭 해주시기 바랍니다. ‘신자유주의 반대’와 ‘자본주의 반대’는 엄밀히 두 가지 다른 이야기죠. 신자유주의야 노르웨이 좌파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정성과 이 사회의 장기적 미래를 염려하는 상당수의 우파들도 반대하죠.

    그러나 자본주의 반대는, 복지 국가 쟁취 투쟁이 한참이었던 1930~1940년대까지만 해도 일각의 노동 운동가 사이에서 인기 있는 구호였다 해도, 복지국가가 제도화된 이후로는 그 대중성을 많이 잃은 것도 사실이죠.

    예컨대 지난 1년간 노르웨이 각 정당의 지지율 추이(http://home.online.no/~b-aardal/siste12.pdf)를 보시면, 혁명이 아닌 급진적 개혁(노르웨이에서는 급진적 개혁이란 아프간 침략 중지, 나토 탈퇴, 유치원 무료화, 주요 기업에서의 국가 지분 최대화 그 정도입니다…)을 지지하는 사회주의 좌파당(SV)만 해도 잘 나갈 때에 9%, 못나갈 때에 7%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정당이기에 속이 터질 정도죠.

    복지주의 현상 유지만를 주장하고 친미를 외치는 노동당은 30~32%인데, 저 같은 이들이 노동당을 아주 싫어해도 결국 협력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동당과 농민당인 중앙당과 협력을 해야 그나마 간신히 노르웨이 사회에서 ‘총좌파적 헤게모니’를 유지하여 신자유주의자들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죠.

    세계혁명에 대한 거창한 이야기를 쓰기 전에

    ‘지금, 여기에서의 혁명’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공당은 노르웨이에 없고(공산당 2개가 있는데 현실에서의 혁명을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혁명에 준하는 급진성의 개혁과 궁극적인 세계적 사회주의 혁명을 외치는 적색 선거 연합-적색당" (http://en.wikipedia.org/wiki/Red_(Norway))은 요즘 잘해봐야 지지율 1% 정도입니다.

    그 분들의 원론적 강령 (http://roedt.no/program/prinsipprogram/)을 보면, 저도 크게 봐서 많은 부분에 대해 동의를 하죠. 문제는, 그 듣기 좋은 원론적 이야기를 현실 정치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인데, 노르웨이의 혁명당은 아직도 노동자 사이에서 거의 하등의 지지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선 지지자들을 보면 거의 다 노조 활동을 안하는 젊은 지식인들이죠. 굳이 원론을 따진다면 저만 해도 적색당에 지지를 보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 소속 계급을 이탈하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노조에 가입하고 노조 활동을 하는 노르웨이 노동자(교수도 노동자의 일부죠) 중에서는 복지주의의 유지 및 증강의 현실적 투쟁을 떠나서 ‘더 이상’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여유가 있는 이들을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 즉 신자유주의로부터의 방어선 유지도 아주 버겁기 때문에요. 그게 우리가 사는 현실인데, 김종환님께서도 먼저 구미 노동자들과 직접 만나보시고 그들의 삶과 투쟁 이야기를 좀 들어보시고 그들의 동향을 직접 살피신 뒤에 ‘세계 혁명’에 대한 거창한 이야기를 쓰시기 바랍니다…

    총좌파 전선 유지를 위해

    그리고 침략 전쟁에 대한 태도 같으면, 아프간 파병 반대는 느르웨이에서는 50%, 독일에서는 무려 75% 정도죠. 그게 다 좋은데, 수많은 독일 노동자들은 아프간 침략을 반대해도 그 침략을 지지하는 독일 사민당에 대한 지지를 끝내 철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노르웨이 사정과 마찬가지로, 보수적 사민주의자들을 빼놓고서는 ‘총좌파’의 전선 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총좌파의 영향력 유지에 따르는 복지제도의 유지는, 유럽 노동자들에게 이름모를 아프간 민간인들의 무고한 죽음에 비해 훨씬 더 일차적인 과제입니다.

    오늘날 유럽의 복지주의적 현실은 노동자와 지배자 사이의 타협의 산물인데, 우리 계급이 이 타협 과정에서 지불한 대가의 일부는, 지배자들의 세계 정책에 대한 일정 정도의 ‘묵인’이죠. 즉, 반대를 한다 해도 어느 정도의 수위를 넘는 반대를 하지 않고 이 문제에 일차 순위를 매기지 않습니다.

    김종환님과 같은 열성적인 분께 듣기 불편하신 이야기지만, 그게 우리가 사는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철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피범벅이의 러시아 혁명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시는 대신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 조합원들에게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대의 순위를 높여야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피부에 와닿는 논리를 개발해주시기나 했으면 좋겠어요.

    제게 같으면 그러한 논리는 바로 ‘생명의 신성함’이죠. 노르웨이가 아무리 살기 좋은 곳이라 해도 노르웨이 군인이 아프간에서 한 사람의 현지인을 죽인다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죄악이 되고 말고, 우리 복지주의의 존재의 이유, 즉 생명의 존중이 무너집니다.

    남의 이론 번역 소개보다 중요한 것

    제가 제 동료들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말이라도 통하는데, 크론슈타드 수병을 잔혹하게 학살한 이웃 나라 과거의 정치인들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기 시작하면 말이 더이상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급’을 단순히 들먹이지 말고, 우리 노동 계급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현실적으로 ‘급진화’의 효과를 얻을 것인지, 과거 이야기나 남의 나라에서 만든 이론의 재탕삼탕이 과연 우리 계급에게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지 남의 이론을 충실히 번역해주고 ‘소개’해주는 차원을 벗어나서 한국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얻어 ‘복지주의 동맹’을 형성할 방법이 무엇일는지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이 글은 박노자 글방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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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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