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석영, 창작적 역량에 조종?
        2008년 11월 06일 04: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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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석부근’과 황석영 신화

    1960년대 문학청년들에게 황석영과 최인호는 영웅이었다. 황석영은 1962년 고교생의 신분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상하는 기염을 토했고, 서울고 재학 중이던 최인호도 1963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입선을 해 부러움을 샀다.

    당시, 황석영은 황수영이라는 이름으로 「입석부근」을 투고해 가작을 받았는데, 경복고를 중퇴한 시점에서 수상이 결정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새로운 문인의 탄생으로 일간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 황석영

    1950년대 후반에 문인 인구가 3백여명 정도였으니, 황석영과 같은 젊은 신예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신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유추할 수 있다. 눈여겨 볼 부분은 1962년 11월호 <사상계>에 발표된 신인상의 당선작이 서정인의 「후송」이었고, 공동가작이 박순녀의 「아이․러브․유」였다는 사실이다.

    서정인과 박순녀는 1960~70년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하게 평가하는 문인이다. 이렇게 입상작이 많게 된 이유에 대해 <사상계>는 ‘심사경위’에서 “금년에는 당선작 하나만 낼 것이 아니라 버리기 아까운 두 작품을 가작으로 하여 발표하자는데 심사위원들은 원만히 합의를 보았”다고 밝혔다.

    황석영은 개인적 고통의 근원을 찾기 위해, 사회적 고통으로 뛰어든 작가였다. 젊은 시절에 그는 자기 표현에 목말라하며, 등산의 여정에 빗대어 삶의 고난을 구체적으로 그렸다. 이것이 「입석부근」(1962)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가출과 방랑생활의 편린들은 「삼포가는 길」(1973)과 「객지」(1971)에 흩뿌려져 있으며, 베트남전쟁에서 경험한 부조리한 상황과 ‘박정희 군대’의 어두운 역사는 「탑」(1970)과 「낙타누깔」(1972), 그리고 『무기의 그늘』(1988)에 고스란히 둥지를 틀고 있다.

    그는 개인적인 길을 걸으며 시대의 길을 가늠했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끌어안아 문학으로 육화시킴으로써 ‘인간과 문학’의 관계를 밀착시켜 나갔다. 이제, ‘위대한 청년 황석영’이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다. 과연 황석영은 삭정이 같은 노년의 스산함을 넘어 ‘세대와 공감하는 문학’을 구현해 낼 수 있을까? 그 실험대에 황석영의 신작 『개밥바라기별』(2008)이 놓여 있다.

    불을 삼킨 혀의 이야기

    『개밥바라기별』은 1960년대 젊은 황석영의 ‘방황과 좌절, 그리고 영웅담’을 담고 있는 장편소설이다. 황석영의 청춘이 『개밥바라기별』에 ‘회색의 바탕화면에 낭만적 색채를 가미한 채색화’로 그려지고 있다. 문청들의 질시와 기대 속에서 화려하게 성장했을 듯한 황석영의 이면에는 ‘아픈 청춘의 몸부림’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에 이르러 한국문학은 대중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문학적 실천의 소임을 완수하는 것처럼 이야기되곤 한다. 대중성과 상업적 반향이라는 측면에서 『개밥바라기별』은 성공한 작품이다.

    하지만, ‘대중적 성공’이 ‘문학적 성공’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개밥바라기별』은 찬사로만 환호할 수 없는 소설적 약점을 곳곳에 노출시키고 있다. 따라서,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작품의 찬란한 후광을 뒤로 한 채 문학적 의미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절실하다.

    『개밥바라기별』은 1960년대의 현실에 2000년대의 감각을 덧씌운 소설이다. 일종의 대중성을 의식한 전략적 글쓰기의 흔적이 소설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소설은 연재될 당시의 매체환경부터 특이했다. 2008년 2월부터 5개월간 포탈사이트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했고, 그 연재의 의도 또한 문학과 대중의 접촉면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연재되는 동안 하루 100~200개의 댓글이 달리고, 180만명의 네티즌이 블로그에 접속했다고도 한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것은 인터넷 연재라는 매체환경의 변화가 소설의 서사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문체는 의도적으로 단문으로 끊어 쓴 흔적이 역력하다. 모니터로 읽어야 하는 인터넷 환경에 맞춰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의도적 변화이다.

    게다가 소설의 전개도 끊임없는 사건의 연쇄를 중시하고, 성격화가 약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문학의 대표하는 작가라 할 지라도 인터넷 환경에서 글을 연재할 경우 기복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변화가 긍정적이지 않고, 소설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은 분명하다.

    황석영은 ‘전혀 새로운 젊고 어린 독자들’을 위해 1960년대적 상황에 2000년대적 내면성을 입힘으로써, 쿨하면서도 낭만적인 색채만 강화했다. 시대의 풍경만 바뀌었을 뿐, 제도교육에 고통받는 ‘준과 인호의 상황’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편적이다.

    사실, 이 보편성은 황석영이 1960년대적 상황을 약간 비틀어 놓음으로써 소설 속에서 얻어진 ‘만들어진 보편성’이기도 하다. 2000년대 젊은 독자를 위한 황석영의 대중적 배려가 1960년대의 시대적 풍경을 ‘내면적 주체의 갈등’으로 치환해 버린 것이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개밥바라기별』 표나게 ‘성장소설(Bildungsroman)’을 강조했다. 황석영은 1960년대와 2000년대 청(소)년들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자아의 내면 풍경’을 통해 ‘자유로운 영혼’은 어떻게 쟁취되는가를 보여주려 했다. 혹은 젊은 시절의 어두운 방황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삶의 긍정성을 발견해내려 했을 수도 있다.

    소설 속 화자들은 1960년대와 갈등하거나, 좀더 극단적인 몇몇은 시대의 주류적 관점을 거부하고 일탈을 감행함으로써 자아를 찾으려 한다.

    이제는 좀더 나아가 냉정하게 황석영이 구현하려 했던 성장 소설이 어떤 성취에 가 닿았는가를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개밥바라기별』의 문학적 실패를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소설은 ‘자기 안의 닫힌 세계관’ 때문에 ‘자기 밖의 억압적 세계’와 불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 불화가 화해를 향한 여정인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자기 파멸이라는 매혹적인 결과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준․인호․정수가 예술에 대한 열정 때문에 제도교육과 불화하는 이유는 ‘강한 자의식이나 자기애’ 때문이다.

    성장소설의 서사는 강한 자아가 세계와 새롭게 관계 맺게 되는 과정을 ‘균열 – 대립 – 통합(조정)’ 순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자아와 세계 사이의 극한적 대립 속에서 주체는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세계를 변화시키면서 ‘자아의 성장’을 이끌어낸다.

    즉, 성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내면과 주체 밖 세계 사이의 조율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소설은 회고담이 아니며, 내면에 대한 진술도 아니고, 역사에 관한 사실적 재현은 더더욱 아니다.

    성장소설과 자기 드러내기

    이 소설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10대들의 방황을 그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황석영이 겪었던 1960년대를 소설적으로 회고하는 ‘자기 드러내기’이다. 그런데도, 황석영 스스로 『개밥바라기별』을 한국적 성장소설의 등장이라 주장한 바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2000년에 정리된 ‘황석영 연보’(『황석영 중단편전집』)와 거의 그대로 겹쳐지고 있으며, 황석영 자신도 준의 형상을 통해 “이 작품을 쓰면서 주변으로 밀려났던 나의 청춘시절을, 단편소설을 쓰던 때의 나를 비로소 되돌아볼 수 있었다”(285쪽)고 토로했다. 이렇다 보니, 소설의 서사가 정교하게 구상된 극적 요소에 의해 절제되기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내맡겨진다.

    성장소설은 시간의 흐름과 갈등하는 내면의 성장이라고 했을 때, 이러한 연대기적 서술은 안이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베트남 파병을 앞둔 준의 회상이 소설의 처음과 끝을 감싸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장황하게 이어지는 준․인호․정수의 무전 여행 등은 여정 보여주기에 급급해 낭만적 치기로 채색되어 있다.

    이는 황석영이 자신의 과거와 거리두기에 실패해 ‘기억의 기록’에 급급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자기객관화에 실패한 ‘회고담’이 됨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 탐구에도 미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이 소설에는 당혹스러운 해설자의 개입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소설의 구성상으로는 ‘특박 나온 준’이 과거를 과장하는 서사의 주체여야 한다. 하지만, 소설 텍스트 속에는 노년의 황석영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목소리가 곳곳에 등장한다.

    예를 들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라진 내 젊은 날의 인생에 대한 예감이었을 것이다”(101쪽)라거나, 좀더 노골적으로는 “나는 나중에 베트남에 가서 산과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가 얼마나 밋밋하고 의미가 없는지 알게 되었다”(175쪽)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쨌든 내가 그때의 그 모퉁이에서 삐끗, 했던 것은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필연이었다”(186쪽)라고 사후적으로 진술한다.

       
     

    세 부분의 시간이 소설 속에 혼재함으로써, 독자에게 혼란을 가중시키는 이러한 소설적 진술은 치명적 약점이다. 이는 황석영이 『개밥바라기별』의 서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준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부분에서 유독 회상조의 정조가 강하게 드러나며, 작가의 직접적 해설도 준의 장에서만 빈번하다. 심지어는 ‘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 규칙’이 1970년에야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 “나두 학교 때려치우구 검정고시나 볼까봐”(163쪽)라는 대화가 등장하는 것은 작가의 불성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진술의 혼란은 소설 속 화자와 작가의 목소리가 겹쳐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황석영이 『개밥바라기별』을 창작하면서 무의식 중에 자신의 1960년대와 준의 상황을 중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개밥바라기별』이 과거를 회고하는 작가의 자의식이 투영된 ‘기억의 서사’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작가의 준의 거리두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혼란이 발생해 소설의 미적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서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준에 비해 영길․인호․상진․정수․선이․미아는 조력자에 머물고 있다는 점도 아쉽기만 하다. 준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은 세계의 일부이면서 준의 일부이기도 하다. 준의 성장은 바로 이들로부터 촉발될 수 있고, 이들과의 성격적 갈등 속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런데도, 인호․정수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사건에 대한 부가적 진술자이거나, 성격화가 덜 된 풍경적 인물로 제시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개밥바라기별』은 이야기성과 사건은 풍부하지만, 작품적 완성도는 떨어지는 작품으로 전락했다.

    황석영의 ‘중박’과 문학상업주의

    황석영은 부끄러움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는 『개밥바라기별』을 출간하면서 “외국에는 여러 작가들의 수많은 성장소설이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 문학사에는 단편소설 몇 편이 있을 정도다”(283쪽)라고 개탄했다.

    이는 이 소설이 한국문학사에 남을 장편 성장소설이라고 스스로 웅변하는 것과 같다. 황석영의 진술은 한국문학사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던 윤흥길의 『장마』(1973), 김원일의 『노을』(1977),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1981), 은희경의 『새의 선물』(1995),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1999), 그리고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2002) 등과 같은 장편 성장소설에 대한 존중의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과거를 부정하려는 무의식적 태도에서 공공연하게 읽을 수 있다. 스스로 기원이 되고자 하는 자는 ‘역사와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권력이 되고자 하는’ 감성의 소유자이기 쉽다.

    더군다나 황석영은 회고담류의 이야기를 극적 긴장에 대한 고려도 없이 소설화해 ‘상업주의적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그는 ‘젊고 어린 독자들’과 소통한다는 명분 아래 ‘대중성에 포박된 작품’을 ‘문학적 성취’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나의 문학적 연대기의 새로운 표지석’이라는 이름표까지 달아 기념하려 하고 있다.

    또한, 10만 명을 넘어섰다는 판매량에 열광해 ‘중박’(문학성과 대중성의 중간, 대박에 못 미치는 중박)이라는 비루한 용어까지 만들어 자신감을 과도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대중적 성공이 문학적 성공을 보증하지 않는다.

    앞에서 지적한 『개밥바라기별』의 소설적 약점은 황석영의 문학세계가 태작을 생산하는 노쇠화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작가가 자신의 작가론에 대한 주석서의 역할을 할 회고담류의 작품을 생산하게 되면, 그 작가의 창작적 역량은 고갈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조종(弔鐘)을 스스로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밥바라기별』보다는 그의 등단작인 「입석부근」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입석부근」은 답답할 정도로 촘촘한 태도로 세계와 대결하며, 자아의 성장이 어떤 대결적 태도 속에서 쟁취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길들여지지 않는 자’의 야성을 갈무리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청년 황석영은 “모든 사랑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으로 파고들어가서 직접 그것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한다”고 갈파했다.

    바라보지만 않고, 먼저 다가서서 몸을 섞음으로써 ‘이웃들의 삶의 진실’을 배우려는 연대의 태도가 청년 황석영에게는 있었다. 1960년대의 청년 황석영은 소설화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의 황석영이 되돌아 보아야할 ‘부끄러움을 비추는 거울’이다. 모든 과거는 그리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주체를 구성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문득, 황석영의 젊음이 애절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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