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바마와 노무현의 ‘결정적’ 차이점
        2008년 11월 06일 10: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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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의 김종배씨가 2002년 대선에서 ‘변화’를 부르짖으며 열광적으로, 그리고 화려하게 당선되었던 노무현을 거론하며 한국에서도 ‘오바마’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글을 썼다.(한국에도 ‘오바마’가 있었다. 잠시… 프레시안. 김종배)

    물론 그의 글은 오바마에 대한 촌평이 주된 취지가 아니라 한국 정치에 대한 안타까움이 주된 취지이다. 실제로 김종배씨가 지적한 것처럼 오바마는 노무현과 몇 가지 점에서 닮았다. 그것은 ‘변화’를 부르짖었던 점에서도 그렇고,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 약자와의 연대 경험 등에서도 노무현의 인생 행적과 오바마의 그것은 닮은 측면이 많다.

    이런 시각은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오바마에 대한 의구심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모두가 일리 있는 의구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는 노무현과 다른 중요한 제반 조건들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이 글은 오바마와 노무현의 차이점이 주된 주제이다. 노무현과 오바마는 몇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오바마와 노무현의 ‘결정적’ 차이점들

       
     
     

    첫째, 오바마는 노무현보다 ‘통합’을 중시여기는 것을 보인다. 이것은 그가 노무현과 달리 실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이든의 부통령 지명은 ‘안정세력’과의 타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국민통합을 강조하는 그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그가 흑인출신 엘리트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다문화적 성장과정을 밟았다는 점에서 그는 ‘통합’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삶을 통해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무현과 같은 ‘얼치기’ 모험주의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노무현에게 약자와의 연대는 일종의 ‘시혜주의’같은 성격을 띈 것으로 보인다. 마치 70년대 기독교적 영향을 많이 받았던 한국의 노동운동이 ‘불쌍한’ 노동자들을 위해 온정주의적 기풍을 가졌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 미국은 4년 연임제라는 점이다. 오바마가 재선에 뜻이 있다면 당연히 4년의 시야가 아니라, 8년의 시야를 가지고 대통령직을 수행할 것이다. 이런 점도 변화만큼이나 통합을 중시여기고, ‘세력간 타협’을 중시 여기게 만들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셋째, 미국은 같은 대통령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달리 ‘정당정치’가 발전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한미FTA에 대한 ‘절차적’ 대안으로 제출된 통상절차법 등은 미국의 통상법을 모방한 것이다. 이 제도의 주요 특징은 통상무역은 의회가 실질 권한을 갖고 행정부는 일시적으로 ‘위임’받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의회중심’ 대통령제, 한국은 제왕적 대통령제

    미국은 강력한 분권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다. 지금은 민주당은 연방주의적 전통, 공화당은 분권주의적 전통으로 인해 마치 ‘분권주의’를 주장하면 보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천박함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무엇보다 미국의 분권주의적 전통은 미국 특유의 ‘역사적’ 맥락에 착근되어 있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 그 자체가 영국식민지에 대한 독립투쟁으로 이룩되었다는 점, 미국의 역사가 중상주의적 절대왕권 등의 봉건적 잔재 없이 시작되었다는 점, 광대한 영토의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중앙집권적인 정치적-경제적 통솔이 쉽지 않다는 점 등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유학파 신자유주의자들의 교조주의적 주장과 달리 미국의 제도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 특수적’인 것들로 볼 수 있는 측면들이 많다.)

    이러한 강력한 미국의 분권주의적 전통은 오늘날 대통령제를 유지하되, 의회(정당)의 권한이 강력한 의회중심 대통령제로 만든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최장집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 정치의 주요 문제점 중 하나는, ‘제왕적 대통령제’로 인해 ‘꼴통 대통령’이 등장할 때 견제가 어렵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정당정치도 취약하고, 의회도 취약하고, 노동과 시민사회세력도 취약하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인해 노무현과 이명박같은 ‘꼴통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오바마는 정당정치의 작동 원리 내에서 (어찌 보면 모순되지만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변화와 통합의 최적조합을 위해 노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의 후계자’ 노무현과 ‘신자유주의 극복 임무’ 맡은 오바마

    넷째, 노무현이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초입’ 국면에 등장한 정치인인데 반해, 오바마는 신자유주의가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시점에 등장한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97년 IMF 경제위기는 한나라당이 만들었다. 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신자유주의적’ 방법으로 돌파했다. 97년 구제금융 사태가 당시 경상수지 적자와 외환위기가 경제위기로 발전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국민들은 막대한 외환보유량, 대외무역 지수의 호전, 평균 4%~5% 내외의 경제성장률 등을 보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위기 돌파방법이 이런 저런 폐해에도 불구하고 타당성과 불가피성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 지점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인식이 일치한다.)

    노무현의 참모들은 주로 80년대 386 운동권들이었는데, 이들은 애초에 ‘경제적 비전’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정치적 민주화’가 이들이 배운 개혁의 전부였다. 사회주의 운동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80년대 386세대 운동권들 사이에서 ‘경제적’ 문제에 대한 고민도 물론 많았는데, 그것은 소련과 북한의 붕괴로 인해 더 이상의 고민을 진전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노무현에게 ‘변화’란, 경제적 토대에 대한 비전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정치적’ 변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노회찬 대표가 적절하게 표현했던 것처럼, 노무현이 당선되는 순간, 그 성과가 종료되고, 임무도 종료되는 그런 변화였다.

    당선 그 자체으로 인해 ‘역사적 임무’가 없어진 노무현과 그 핵심세력은 방랑자처럼 ‘변화 그 자체’를 쫒아 뭔가 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변화 그 자체를 위한 변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열린우리당 분당, 이라크 파병, 한미FTA의 ‘반짝’ 추진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렇기에 노무현은 ‘정치적’으로는 요란법석한 행태의 변화를 지향했던 반면, 경제적으로는 김대중 정부와 IMF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노선의 충성스러운 후계자였다.

       
     
     

    반면, 오바마는 노무현과 등장 시점이 다르다. 그것은 오바마의 ‘역사적’ 제약조건과 역사적 임무가 노무현과 같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바마는 신자유주의 그 자체가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상황에서 집권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의 변화가 ‘정치적’ 변화를 의미했다면, 오바마의 변화는 ‘경제적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구(舊)자유주의를 타도했던 뉴딜 정책의 본질은 ‘금융억압’

    경제사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의 본질은 ‘뉴딜의 해체’이다. 뉴딜이 이룩했던 다양한 제도적 성과와 제도적 연계를 파괴하여 ‘뉴딜 이전의 자본주의’로 복귀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정책적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바마가 수행하게 될 역사적 임무의 핵심은 ‘뉴딜의 21세기적 복원’이 될 것이다. 20세기 경제사는 ‘뉴딜 이전’과 ‘뉴딜 이후’로 구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은 같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뉴딜 이후의 자본주의는 ‘수정된’ 자본주의이다.

    경제학적으로 ‘뉴딜 이후’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하면, ‘금융 억압’이다. 혹은 포지티브한 표현으로, ‘금융에 대한 산업 우위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적 특징의 의미는 케인즈의 계급관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계급을 노동자-자본가로 구분했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케인즈는 계급을 셋으로 구분했다. 케인즈는 금융자본가-산업자본가-노동자로 구분했다.

    케인즈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는 금융자본은 ‘억압’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20세기 경제사에서 흔히 ‘황금기’(Golden age)라고 불리는 1940년대~1960년대의 놀랄만한 경제성장과 놀랄만한 빈부격차의 완화가 가능했던 작동 메커니즘은 실제로 케인즈적 세계관의 실효성을 입증한다.

    금융자본이 억압당해야, 산업자본이 ‘장기적’ 시야를 갖고 (리스크가 반드시 수반되는) 혁신적 행위를 할 수 있고, ‘장기적 혁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노동의 헌신적 도움을 받기 위해, 노사간의 ‘민주적’ 타협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의 근본 문제 – 단기주의에 의한 ‘금융헌신성’과 ‘노동헌신성’의 파괴

    그렇기에 뉴딜의 해체를 주창한 신자유주의의 근본 난점은 경제학적으로 볼 때, 경제계획과 시야의 ‘단기주의’이다. 기업이 ‘혁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장기적 안목으로 기업을 지원해줄 수 있는 <헌신적+장기적 자본공급>과 <헌신적+안정적 노동공급>을 필요로 한다.

    노동착취적인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혁신에 성공할 수 없다. ‘독보적 경쟁우위’를 의미하는 경제적 혁신은 본질적으로 시장에서 구매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내부에서 ‘장기적 협력’을 통해서만 창출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20세기 중반 자본주의 경제사에서의 ‘황금기’의 헌신적 자본공급은 ‘금융억압’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헌신적 노동공급은 ‘사민주의적’ 계급타협을 통해 이룩했다. ‘금융억압’은 산업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통일전선 구축의 상대방이었던 셈이다.

    반면, 뉴딜의 해체를 자신의 본질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의 핵심 특징은 ‘산업에 대한 금융의 우위’로 정리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냥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라는 표현이 보다 본질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산업에 대한 금융의 우위’를 핵심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노선은 뉴딜의 장점과 정확하게 대비되는 근본 단점을 갖는다.

    뉴딜과 케인즈의 장점이 헌신적 자본공급과 헌신적 노동공급에 근거한 ‘장기적 혁신체제’였다면, 신자유주의는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단기성’으로 현상된다.

    먼저, ‘자본의 단기성’으로 현상된다. 즉, 유동성이 심화되고, 통화 창조 현상의 과잉으로 인한 금융거품이 극심해지고, 포트폴리오 중심의 단기주의적 투자행태를 보이게 된다. 그에 맞춰 떼거리적 금융 행태는 증폭된다. 이제 금융은 산업의 ‘토대’가 아니라, 산업에 대한 ‘수탈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동시에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단기성’으로 현상된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하에서 장기적 시야를 갖고 투자하고자 하는 기업가(CEO)는 ‘단기적 성과’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기업이 ‘단기’에 성과를 가시화활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비용절감이다.

    하청단가를 인하하고,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는 방식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기업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할 이해관계자들은 ‘혁신의 공동주체’가 아니라 이제 단순한 ‘비용절감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반란의 ‘첫 번째’ 전쟁 – 금융에 대한 산업 우위의 복원

    그렇기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반란’을 위한 최초의 전쟁은 <금융에 대한 산업의 우위>를 다시 확보하는 것이다. 케인즈적 표현을 빌리면, ‘금융억압’이다. 물론 금융억압은 ‘국제적’ 차원과 ‘일국적’ 차원 모두에서 병행 추진되어야 한다. ‘New 브레튼우즈체제’라는 것도 그런 점에서 얼마나 실현될지는 알 수 없지만 토빈세의 도입만큼이나 몹시 중요한 지점이다.

    ‘금융억압‘이라는 최초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대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재반격은 승리할 수 없다.

    다섯째, 오바마와 노무현은 몹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정책’과 ‘참모’의 존재이다. 노무현의 참모 중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참모는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노무현의 참모였던 386은 삼성경제연구소의 ‘2만 달러’를 신봉하는 이들이었고, 국회의원 연수를 삼섬에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신자유주의 극복의 비전을 갖고 있는 참모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이정우 선생이나 정태인 선생이 여기에 해당하는 분들인데, 민주당, 열린우리당, 386 참모들 전체 숫자에 비하면 <수천명 중에 2명+약간명>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즉, 0.1%도 안되는 수치였다.

       
     

    반면, 오바마는 크루그먼과 스티글리치를 비롯한 초강력 내공을 가진 세계적 석학들을 참모로 두고 있다. 또한 오바마의 민주당은 이미 1932년 ‘뉴딜 정책’으로 집권했고, 이후 자본주의 역사를 ‘뉴딜 이전’과 ‘뉴딜 이후’로 구분시켜내는 경제위기 극복의 세계사적 경험을 주도해 본 적이 있다.

    뉴딜은 분명 민주당의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바로 그 힘으로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16년간의 민주적 장기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통령을 4번 했다. 미국은 원래 ‘임기 제한’이 없었는데, 루즈벨트 때문에 ‘4년 연임제’로 제도화되었다.)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은 지난 30여 년 간 추진되었다. 30여 년의 역사만큼 제도적 연계를 확보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노선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 역시도 그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우선, 구체적인 방향을 정립하는 데 수 년에 걸친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고, 그것이 다른 제도와 긴밀하게 연계되고, 그 사회에 착근하는 것 역시도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사에서 루즈벨트의 집권과 1933년 뉴딜의 시행이 경제사를 뉴딜 이전과 뉴딜 이후의 ‘둘’로 구분했듯이, 오바마의 집권과 21세기판 뉴딜의 시행 역시도 신자유주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바마가 그러한 역사적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문제이지만, 맑스가 즐겨 썼던 표현처럼, ‘역사적 제 조건’이 무르익은 것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의 뉴딜보다 먼저 시행되었던 1932년 ‘스웨덴 사민당’의 경제위기 극복 정책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최초 김종배씨가 프레시안 칼럼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오바마’는 누가 되어야 하며, 대한민국 진보세력의 ‘21세기판 뉴딜 정책’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 뉴딜 정책이 있기 한 해 전이었던 l932년 스웨덴 사민당은 ‘케인즈 이전의 케인즈주의’ 정책을 펼치며 화려하게 집권했다. 본질적으로 ‘노동친화적’ 경제위기 극복방법이었던 이러한 정책은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소득증대를 통한 경제위기 극복, 그리고 공공투자의 활성화 등을 실업 극복을 전면에 내걸었다. 다른 한축으로 농민당과의 계급동맹 노선을 위해 충실히 걸었다.

    ‘경제학에 대한 지적 전통’이 강했던 스웨덴 사민당은 ‘뉴딜 이전’에 뉴딜 정책을 구사했던 셈인데, 이 정책의 창안자인 비그포르스는 맑스의 과소소비 공황이론과 당시 유럽에서 떠돌던 케인즈 팸플렛에서 영감을 얻고 이러한 ‘혁신적인’ 정책을 제출했다고 한다.

    스웨덴 사민당이 45%에 준하는 강력한 득표율로 집권한 이래, 스웨덴 사민당의 정책이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보수정당들끼리 논쟁하다가 당이 쪼개지기도 하였다. 스웨덴 사민당은 ‘경제위기를 극복한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수십 년 동안 유지하며, 이후에도 1950년대 후반에 <연대임금제-적극적 노동시장의 정책조합>을 비롯한 눈부시게 멋들어지는 ‘전략적 정책수립’의 사례들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1932년부터 오늘 현재까지 네 번 정도를 제외하고 전부 집권하는, 즉 80년여의 역사 중에서 거의 70여 년을 집권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노동의 헤게모니 정치’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한국판 비그포르스’는 등장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경제성장’은 박정희가 주도하고, 민주화는 양김이 주도했다. 그런 이유로 한나라당은 ‘경제정당’ 이미지를, 민주당은 ‘민주화’ 이미지를 양분하고 있다. ‘토대’를 보수세력에게 내주고, ‘상부구조’를 개혁세력이 쥐고 있는 셈이다.

    ‘민주화 이후’ 진보가 주도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그 지점은 당연히 ‘토대의 탈환’ 즉, 경제에서의 이슈 주도권을 가지고 와야 한다. 좌파는 원래 ‘경제적 변화’을 부르짖는 집단이었다. 이러한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던 역사적 사례가 바로 스웨덴 사민당의 1932년 집권과 미국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이었다.

    2008년 오늘 현재, 진보신당은 스웨덴 사민당 혹은 루즈벨트 시절의 민주당이 될 수 있을까? 혹은 우리는 2010년 지방선거쯤에 ‘한국판 비그포르스’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을까?

    그리하여, 2010년 지방선거에서 사회복지투자 활성화를 통해 경제위기 극복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를 뒷받침하는 설득력있는 ‘정책적 이슈파이팅’을 할 수 있을까? 1932년 스웨덴 사민당이 그러했던 것처럼, 경제위기 극복과 복지투자 활성화, 그리고 노동의 권력자원 증대라는 일타삼피의 위대한 승리를 일궈낼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 ‘진보의 재구성’을 꿈꾼다면, 그리고 그것이 ‘대중적 정치적 지지’ 형태로 구현되어야 한다면, 그것의 구체적인 현실태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한국판 비그포르스’의 형태로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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