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붕괴의 시대가 오고있다
        2008년 11월 03일 12: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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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진보신당 제2창당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연초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부터 이른바 ‘신당파’의 주장들 속에는 미구에 미국발 금융 위기가 닥치리라는 정세 전망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 해가 다 가기도 전에 이렇게 빨리 일이 터지리라고는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이 세계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제2창당 과정이 진행되리라고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동시대인의 광장에 써붙인 ‘자보’

       
     

    아무튼 일은 벌어졌다.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 과정이 짊어져야 할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만큼 이 상황은 우리의 고민과 선택이 보다 깊어지고 성숙해질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기회를 허투루 놓쳐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비록 설익은 단상이나 가설들이나마 진보신당의 한 당원으로서 의견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그 생각의 편린들을 <레디앙>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것은 동시대인의 광장에 써붙인 한 장의 자보다. 누구든 여기에 침을 뱉을 수도 있고, 낙서를 하거나 찢어버릴 권리가 있다. 하지만 필자가 바라는 것은, 그보다는, 이 자보 위에 또 다른 자보가, 단지 비평만은 아닌 또 다른 주장과 선언들이 덧붙는 일이다.

    또 다른 세계화의 끝은 또 다른 붕괴의 시대

    미국발 금융 위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제’보다는 차라리 ‘역사’다. 물론 이 둘을 이렇게 대비하는 것 자체가 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역사적 안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무리한 대비도 영 맹랑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사태의 핵심을 꿰뚫으려면, 정확히 100년 전의 세계사를 다시 뒤적여봐야 한다. 그 때 무슨 일들이 있었던가?

    그 때에도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도 세계화의 주역은 자본, 과잉 축적된 자본이었다. ‘죽은 노동’의 이 엄청난 시체 더미에서 거대 금융 자본이라는 흉측한 괴물이 탄생했다. 이들이 지구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제멋대로 울타리를 치던 것이 곧 ‘제국주의’라 불리는 지난 번 세계화, 100년 전의 세계화였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영구히 지속되지 못했다. 1914년의 돌연한 세계 전쟁과 함께 이 시대는 한 매듭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혁명 운동과 스페인 독감과 대공황과 파시즘, 또 다른 세계 전쟁과 대량 학살, 핵무기의 등장이 뒤따랐다. 장장 30년, 한 세대를 꼬박 채운 전 지구적 대위기의 시대로 이어진 것이다.

    1백년 전의 세계화와 그 귀결

    한편 우리의 이번 세계화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번 세계화가 1870년대에 시작됐으니까 정확히 100년만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도 주역은 더 이상 과거의 서식지에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진 자본이었다. 그리고 이번 역시 ‘죽은 노동’의 썩은 유기물 덩어리에서 새 생명을 부여받은 것은 금융 자본이라는 기괴한 기생 생물이었다. 이제 이들은 과거의 대양 함대와 해병대 대신 초고속 전자 통신 기술을 통해 지구 곳곳을 휩쓸며 약탈과 투기를 일삼았다.

    그런데 돌연 이 미친 소동의 한 복판(미국)에서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들의 도산이 전 세계를 아연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난 번 세계화가 대위기의 시대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작금의 금융 위기가 마치 100여 년 전 세계 전쟁 발발(1914년)에 견줄만한 역사의 또 한 번의 매듭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전쟁과 금융 위기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사건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열강들 사이의 노골적인 식민지 경쟁으로 점철됐던 지난 번 세계화의 모순은 강대국 간 전쟁의 형태로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금융의 위기, 전쟁의 위기

    반면 미국 금융 자본을 정점으로 한 투기 활동에 전 세계 자본이 휩쓸려간 이번의 세계화는 금융 위기의 형태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 다 자본의 세계화 전략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된 폭발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렇다면 올해 2008년은 21세기의 ‘1914년’, 즉 대폭발의 한 해로 기억될 것인가? 허나,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좀 신중해야 하겠다. 필자의 생각에는 2008년은 ‘아직’ 1914년은 아니다.

    아마도 지난 몇 주간 우리가 경험한 사태는, 굳이 비교하자면, 제1차 세계대전 몇 년 전에 이 사태를 예고했던 사건들, 즉 제2차 모로코 위기(1911년)나 발칸전쟁(1912-1913년)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는 사건일 것이다.

    이것은 결코 낙관론이 아니다. 진짜 위기는 오히려 이 다음부터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투자은행의 위기가 예금은행으로 번지는 진짜 1929년형 대공황, 지구 곳곳의 연쇄적인 금융 위기 속에서 실물경제가 최저점으로 치닫는 더 큰 위기가 몇 년의 시차만을 남겨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

    기나긴 혼란기의 시작

    말하자면 최근 몇 주일간의 사태만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붕괴를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는 20세기 말에 시작된 세계화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아직은, 힘들다. 그러나 지난 번 세계화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의 세계화도 결국은 이 혹성 전체의 기나긴 혼란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만은 이제 분명해졌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 붕괴를 경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목격한 것은 머지않아 붕괴의 시대가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확실한 신호다. 기나긴 붕괴의 한 시대가 동터오고 있다.

    붕괴의 시대, 그것은 새로운 체제의 윤곽은 좀체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기존 체제로부터 비롯된 일련의 혼돈들에 맞닥뜨려야 하는 세월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야 한다. 언제 폭풍이 잠잠해질지, 육지가 도무지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한 채 망망대해에서 비바람과 파도에 맞서야 하는 고단하고 겁에 질린 선원들의 삶, 그것이 우리의 미래다.

    지난 번 붕괴의 시대와 이번의 차이들

    그러나 21세기 초반이 100년 전의 세상(20세기 초)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일 수는 없다. 세계화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붕괴의 시대라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을지라도, 구체적으로는 많은 차이를 보일 것이다. 아니,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더 뚜렷할 것이다.

    지금 당장 필자가 지적할 수 있는 몇 가지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류의 학습 효과다. 역사의 ‘단순’ 반복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인간이 학습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보다도 체제의 주류 세력들 자신이 우리 시대와 지난 번 붕괴의 시대 사이의 유사성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정보는 기업, 국가, 국제기구 등 다양한 주체들의 행동에 분명히 영향을 준다.

    1929년 대공황 직후와는 달리, 최근 몇 주간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 사이의 협조가 기민하게 이뤄진 것이 그 한 사례다. 그리고 미국 연준 의장(벤 버냉키)이 대공황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라거나 영국의 현 재무장관(알리스테어 달링)이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 출신이라는 사실도 에피소드만은 아니다.

    인류의 학습효과와 낙관주의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결코 어떤 낙관주의의 근거는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각각의 행위 주체들이 풍부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게 곧 지혜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 행위 주체마다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선택을 시도하다가 그것이 전반적인 예측 불가능성을 더욱 높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과거보다 풍부해진 정보와 기술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정책 실패를 맛보게 되면, 그 때의 낭패감과 절망감은 대공황 직후의 미국이나 독일에서 나타났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 될지 모른다.

    두 번째는 대의 민주주의의 역할이다. 20세기 초만 해도 보통선거제도는 몇몇 나라의 예외적 실험이었다. 노동계급과 여성을 포함한 보통선거권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서유럽의 몇몇 주요 국가들에서조차 미래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반면 지금은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보통선거를 실시한다. 더구나 그 경험의 뿌리도 깊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붕괴 과정에 대한 민중 측의 대응으로서 10월 혁명과 같은 사건이 반복되길 기대하기 힘들다. 1917년 혁명 당시까지도 러시아인들은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보통선거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러시아의 혁명 소식이 뚜렷한 영향을 미친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보통선거는 그 이후에야 점차 실현되는 형편이었다.

    오판해서는 안 될 것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잊어버린 채 이번에 닥쳐올 붕괴의 시대에도 동궁 습격과 제헌의회의 해산이 그대로 반복될(수 있을) 것이라 오판해서는 안 된다. 일단 대의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하면, 그 다음부터는 노동 대중 자신이 선거를 유일한 집권 경로로 받아들이게 된다.

    벌써, 보통선거가 도입한 지 몇 년 안 됐던 전간기(戰間期)의 서유럽에서부터 그러했다. 그리고 이제는 대부분의 남반구 국가들조차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그나마 이것은 반가운 소식인가? 우리 앞의 시대는 20세기 초보다는 야만의 색채가 훨씬 옅어질 것이라는? 허나, 이번에도 답은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변혁 세력에게 선거를 통한 집권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이것은 이들의 고뇌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선거 정치가 변혁적 좌파보다는 오히려 극우 민중주의자들(그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파시즘이었다)에게 더 손쉬운 경기장이라는 것은 이미 몇몇 사례로 분명히 드러난 바 있다(나치가 집권할 때 독일에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두 좌파 정당이 존재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또한 혁명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급진적, 구조적 개혁이라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선거와 집권 그리고 급진 개혁

    그런데도 변혁 세력이 붕괴의 시대에 개입할 길은 선거를 통한 집권과 급진 개혁뿐이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든 칠레의 인민연합 정부나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혁명이 경험한 길고 지루하기까지 한 투쟁을 반복해야 하고 여기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의 시험은 훨씬 더 어려워진 셈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 시대의 위기가 지난 세기 초에 비해 훨씬 더 파괴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이번의 체제 위기가 생태 위기를 수반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에너지 위기와 식량 위기 양상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두 문제는 강대국 간의 군사 대립(지금은 그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을 폭발시킬 수 있는 결정적 변수다. 기후 변화의 가속화가 인간 사회와 국제 관계에 던질 하중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핵무기의 존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인류는 냉전 종식을 핵 철폐의 기회로 만드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대혼돈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이 시대에 진보정당을 만든다는 것 – 격랑 속의 조타수 

    이러한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새로운 진보정당의 주춧돌을 놓으려 하고 있다. 이 시간적 배경, 그것은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다. 2008년에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은 1990년대 초에 민중당을 만들던 일과 같을 수도 없고, 2000년대 초에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던 일과도 같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진보정당은 동시대인들과 함께 붕괴의 시대를 견뎌내고 그것을 헤쳐 나갈 정당이다. 이 정당은 3중의 임무를 지닌다.

    첫째, 붕괴의 시대에 한국 사회의 좌초를 막아야 한다. 둘째, 단순히 좌초를 막는 수준을 넘어 미지의 대륙, 즉 대안 체제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한다. 셋째, 전 지구적 차원에서 붕괴의 시대를 극복하고 인류 문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데 한 몫을 해야 한다.

    즉, 지금 우리가 만들려는 것은 앞으로 족히 수십 년은 지속될 격랑의 세월 속에서 조타수의 역할을 할 집단적 리더십(우리 시대의 ‘유기적 지식인’)이다. 우리는 그 일원이 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비호 아래 철권통치로 국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던 군부 독재 정권과 싸우던 일과도 다르며, 남북의 통합을 통해 민족국가를 ‘완성’하려던 노력과도 전혀 다르고, 세계화의 한 중간 국면에 남한 자본주의에 잠깐 허용된 호황기에 더 많은 임금을 확보하려고 투쟁하던 경험과도 상관이 없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이렇게, 우리 앞의 시대만큼이나 낯설고 어렵고 근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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