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그리의 꿈을 엿보다
        2008년 10월 31일 04: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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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톨릭 신자이자 20대의 교수, 이탈리아 사회당의 시의원, 테러혐의, 수형, 망명을 거쳐 존경받는 세계의 지성이자 막강한 판매력을 지닌 작가가 되었다. 네그리 말이다.

    그를 읽기 전에 그려본 그의 계보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델라 볼페와 프랑스 공산당의 알뛰세르에게서 반헤겔주의와 ‘맑스 책 다르기 읽기’를, 들뢰즈로부터는 스피노자를 영감받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국(Empire)』은 홉슨 이래의 냉정한 폭로보다는 월러스타인의 모호한 긍정처럼 읽혔고, 『다중(Multitude)』은 20세기 노동의 변화를 살핀 브레이버만의 실증 같은 것은 거의 없이 미래경영학류의 예언을 남발하고 있었다.

       
     
     

    경박한 오독일 이런 인식에서 구원해주기에 네그리의 책들은 너무 어려웠고, 그래서 그는 그랑제꼴 정도는 나와야 겨우 알아먹을 수 있는 ‘프랑스 철학 교수’였다. 그의 책은 서가의 왼쪽 위 먼지 쌓인 고전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마케팅 책들이 자리하고 있는 오른쪽 아래 서가를 차지했다.

    『제국』과 『다중』의 공저자인 미국 교수 마이클 하트가 쓴 『네그리 사상의 진화(갈무리)』가 네그리의 주장을 조금은 알기 쉽게 풀어주지 않을까 한 기대는 오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책은 들뢰즈와 네그리를 연구한 하트의 박사 학위 논문이었고, 완숙기 이전 네그리의 활동 전개를 다루고 있었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자율주의가 어떠하다고 설명하는 개설서가 아니라, 통사적 네그리학이다.

    당으로부터 억압받지 않는 대중 폭력

    그러나 책은 다음과 같은, 네그리 사상의 요체를 가감 없이 전한다.

    “네그리의 논의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국가의 거울 이미지이며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기구이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가 자유롭게 적대를 표현하는 것을 억압하는 당 혹은 전위의 구축이다.

    네그리는 대중의 폭력에 대한 이러한 억압과 통제가 굴락(Gulag)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자기조직화와 함께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더 일반적이고 다가적인 폭력사용을 주장한다.” – 『네그리 사상의 진화』

    지금의 네그리가 제한 없는 폭력 사용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당 등으로부터 제한되거나 억압받지 않는 대중의 자기행동 전면화를 주장하는 것은 여전하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는 그런 사상이 스피노자로부터 연유함을 언뜻 비쳐준다.

    “스피노자는 … 어느 누구도 자신의 판단력을, 따라서 자신의 지배력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이렇게 초월적인 사회적 권위를 구축하는 사회계약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홉스적 국가를 거부하는 토대이다.

    물론 이러한 거부는 사회를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주체인 다중의 힘에 기초할 때에만 가능하다.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에서 네그리는 이러한 정치적, 철학적 대안을 권력(potestas)과 힘(potentia)의 차이로 자리매김한다.”

    2.

    『네그리 사상의 진화』가 밝히는 네그리와 스피노자의 관계는 여기서 멈춘다. 하지만, 인간 개체나 그룹이 국가나 정당에 양도되지 않는 폭력의 보유자이려면, 그리고 폭력과 그 사용의 판단을 결정하는,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지배자이려면 스피노자의 인간론이 개입되어야 한다.

    스피노자를 스피노자 자체가 아니라, 헤겔이 아닌 스피노자로 말하는 것은 낙관적 스피노자와 비관적 헤겔의 대립적 인간관, 즉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이기적이라거나 이타적이라는 근대과학 이전의 인간관에 입각하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지배의 조건, 쿠피디타스

    “아래로부터의 지배”나 자율주의는 그런 권력을 가진 인간 단위가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리라는 기대, 믿음, 희망에서 출발한다. 즉, 그 구성체의 의사결정과 행동이 구성원 사이에서 조화롭고, 자기파괴적이지 않으며, 다른 구성체의 가해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가정을 전제한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자기 존재 유지의 무의식적 욕망인 코나투스(conatis)를 넘는 이성적 이상(理想)-쿠피디타스(Cupiditas)가 작동해야 한다.

       
    ▲ 네그리와 하트 (사진=갈무리)
     

    정치와 과학을 말한 때 우리는 인간 개체나 인간 집단의 총합 평균, 일반적인 경우를 전제한다. 이 문제에 있어 우리는 헤겔이나 스피노자가 이르지 못한 자연과학의 성과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굳이 선인들의 가르침에 근거하려면 헤겔의 비관이나 스피노자의 낙관보다는 인간의 욕구와 행동이 후천적이라는 묵자의 소염론(所染論)이 사실에 더 부합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경험적으로 우리의 정치와 운동은, ‘비타협적 노동계급’이나 ‘이타적 개인들’이라는 희망 섞인 가정이 아니라, 극우 정치인과 대자본가, 얄밉기 그지없는 이웃이나 원수 같은 아내와 남편, 이 글을 읽지도 않고 악플을 달 게 뻔한 수많은 네트워크 주민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경험적 진실을 이미 획득하고 있다.

    맑스에 미친 헤겔과 스피노자의 영향 중 어느 쪽 면을 주로 해석하고자 하거나, 맑스를 프로이트나 니체와 섞어 보려는 포스트맑시즘 조류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헤겔과 스피노자, 프로이트와 니체 모두가 기독교 신과 맞서 싸운 철학자들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관념은 불가피하게도 신의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신은 신에 가깝다고 하였는데, 나로서는 그의 코나투스는 다른 신들과 경쟁하는 구약적 신으로, 쿠피디타스는 자기 희생의 신약적 신으로 읽혀진다.

    마트에서 아기 분유를 훔친 엄마는 마트 투자자들과 노동자들에게는 코나투스적 위해를 끼쳤겠지만, 만약 성공하기만 했다면 아기에게는 쿠피디타스적인 구원의 여신이었을 게다. 경찰서 조서의 그녀는 범죄자이지만, 신문 사회면의 그녀는 가련한 피해자다.

    이 분유 절도범은 네그리의 동지일까, 아닐까? 미국조차도 제 의지대로 못할 정도로 강력한 ‘제국(Empire)’에서 이 연약한 여성은 어떻게 탈주할 수 있을까? 자아를 보존한 상태의 그녀는 자율권의 주체로서 해방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네그리는 “맑스의 연구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너무도 앞서 나갔기 때문에 봉쇄당했다”고 말하는데, 네그리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의 고전 철학 이어붙이기, 탈기독교라는 전근대적 인간관에 기초한 운동론은 현대 사회의 현실에 너무도 뒤처져 있는 것이 아닌가?

    3.

    맑스는, 스피노자의 낙관과 헤겔의 비관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을 게다. 그런 점에서 네그리는 스피노자가 맑스에 남긴 잔재의 복원자이다. 그리고 맑스주의의 가장 밝은 면이다.

    밝은 네그리, 어두운 미래

    나는 네그리뿐 아니라 공산주의를 꿈꿨던 맑스보다도 더 비관적이다. 『네그리 사상의 진화』 표지 색인 분홍보다는 더 어둡고 붉으죽죽한 연옥까지만 도달 가능하리라고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유의 의지를 접자고 말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자유란 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지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 수만 년 동안 인류 사회가 문화적 진화를 이루었고, 그 문화적 진화가 어느 정도는 되고 싶은 바가 이루어진 라마르크적 진보라 믿으므로, 무엇보다도 앞으로 남은 인류 전진의 방향이 타자에 대한 존중과 공유하는 자유뿐일 것이므로.

    10년쯤 전 제주도로 출장갔을 때 서귀포에서 비키니 입은 처녀들 훔쳐보며, 딱 발목까지만 바닷물 적셨었다. 철 들고서는 옷 훌떡 벗고 따뜻한 바닷물에 몸 실은 적 거의 없다. 기름 둥둥 떠다니는 마산인가 거제 조선소 옆에서 주대환과 해수욕한 것이 지난 30년 동안 유일하다. 촌스런 외투 벗기 어렵다. 추워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안주하고 싶고, 그 안에 숨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자유주의, 사회주의 같은 유럽 합리주의의 정통, 공자에서 박정희까지로 면면히 흐르는 사회공리와 계몽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세속의 그늘 아래서 햇볕 가득한 라틴의 네그리나 조정환 같은 천생의 반역자들의 열변을, 하승우나 우석훈 같이 발랄한 이들의 상상을 흠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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