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선은 급진적 개혁"
        2008년 10월 31일 11: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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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대가’를 논급한 제 마지막 글("혁명보다 급진적 개혁이 바람직하다는 이유")에 대한 약간의 오해와 보충 설명의 요청이 있어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오해부터 씻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혁명을 ‘비판’하려 하지 않습니다. 혁명이 좋아서가 아니고 혁명을 비판하는 것이 마치 자연현상을 비판하는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준비된 지도자 계층도 필요하고 어느 정도 틀을 갖춘 이데올로기도 필요하지만, 일차적으로 혁명을 일어나게끔 하는 것은 한 사회의 토대와 상부구조에서의 해결 불가의 모순들입니다.

    예컨대, 1917년의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 임시 정부가 과감하게 대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하고, 독일과 강화 협상을 벌이고 일체 소수민족의 요구를 들어주어 러시아를 연방화시켰다면 트로츠키와 레닌은 아마도 그들의 여생을 러시아라는 부르주아 공화국의 국회에서 가장 급진적 교섭단체를 이끄느라 보냈을 것입니다.

    혁명은 자연현상

    그러나 취약하고 대지주와 프랑스 등 열강에 의존적인 러시아 부르주아들이 이와 같은 토대, 상부구조 모순의 해결을 도저히 할 수 없었으니 결국 부르주아 공화국의 파탄과 급진 세력의 권력 장악은 어느 정도 불가피했을 것이고, 그 유일한 대안은 아마도 대대적 반동이었을 것입니다.

       
      ▲ 필자
     

    상황이 이랬으니 누굴 비판하겠어요? 레닌과 트로츠키가 역사를 이끌기도 했지만 역사 전개의 논리에 이끌리기도 한 것이고, ‘이끎’과 ‘이끌림’의 변증법적 관련성을 밝혀주는 것은 바로 저와 같은 인간들의 밥벌이입니다. 즉, 역사학자가 밝혀야 할 부분이죠.

    제가 ‘비판’했다기보다는 ‘사건’이로서의 혁명의 실체를 보다 명확하게 그려주고, 역사가 우리에게 혁명이라는 선택을 만약 안겨준다면 이게 우리에게 뭘 의미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이 불가피해지기 전에 우리가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는가 이 정도로 이야기해본 것 뿐입니다.

    대체로 국내에서 혁명사를 공부하시는 이들은 개설서 (『세계민중사』 등)나 지도자들 관련 저서 (트로츠키의 자서전 등)들을 읽는 것 같아요. 아주 훌륭하고 중요한 책들이지만, 어디까지나 역사를 조감하거나 지도자 계층의 입장과 시각을 전해주는 만큼 ‘밑바닥’에서의 혁명을 이해하기에 조금 부족하죠.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되자면 ‘밑바닥’부터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컨대 혁명 시대 문학의 독서를 권고하고 싶습니다.

    예컨대, 혁명 시절에 소련 초기의 비밀 경찰 (체카)에서 잠깐 일하고 1920년에 신흥 소련 공화국과 폴란드 전쟁의 전선에서 소련 군의 편에서 취재를 한 이삭 바벨이라는 작가의 일기를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전선에서는 주로 유태인으로 구성된 주민들을 폴란드 군인들도, 카자크인/농민이 다수인 소련 군인들도 똑같이 약탈한 것인데, 바벨이 상황을 그렇게 묘사합니다:

    "Главное – наши ходят равнодушно и пограбливают где можно, сдирают с изрубленных. Ненависть одинаковая, казаки те же, жестокость та же, армии разные, какая ерунда. Жизнь местечек. Спасения нет. Все губят – поляки не давали приюту. Все девушки и женщины едва ходят. Вечером – словоохотливый еврей с бороденкой, имел лавку, дочь бросилась от казака со второго этажа, переломала себе руки, таких много"

    "중요한 것 : 우리 군인들이 무관심하게 배회하면서 가능한 곳마다 약탈을 자행하고, 이미 부상 당한 주민들의 옷을 빼앗음. 똑같은 증오, 똑같은 카자크 기마병, 다만 국가 소속이 다를 뿐. 넌센스! 유대인 마을들의 생활 – 탈출구가 없다. 군인들이 다 죽이기만 한다. 여성들이 거의 돌어다니지 못할 지경임. 어제 수다스러운 유대인을 만났는데, 그 딸을 카자크 기마병이 강간하자 이층에서 뛰어내려 팔을 다 부러뜨렸다. 잦은 일이다": 1920년8월28일: http://www.lib.ru/PROZA/BABEL/journal.txt)

    혁명군이든 반혁명군이든 도살, 겁탈, 강간이 뒤따르는 것은 똑같았습니다. 물론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와 같은 일을 막으려고 노력했다는 반론이 들어오겠지만, 레닌과 트로츠키가 혼자서 혁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총을 든 가부장적 남성들 …도살, 겁탈, 강간

    혁명을 총을 잡은 농민, 카자크마다 다 한 것인데, 총을 잡은 가부장적 남성이 ‘타자’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면 그 결과가 아주 뻔합니다. 그가 ‘혁명’하는 집단에 속하든 말든입니다. 내전과 외전들이 꼭 혁명에 뒤따르지 않는다고 반론하실 분들이 계시다면, 각종의 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은 역사 속의 혁명 하나라도 대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도자/담론/조감도의 차원에서는 혁명이란 아름다운 그림으로 다가가지만, ‘밑바닥’의 차원에서는 강간 당하다가 이층에서 뛰어내려 팔을 부러뜨린 여자의 고함소리부터 들립니다. 그런 게 불가피하다면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이겠지만, 불가피해지기 전에 일단 우리가 최선을 다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최선, 즉 ‘급진적 개혁’이란 피를 흘려 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쟁취할 수 있는 ‘최대한’을 의미합니다. 일부 대형 기업소 (일차적으로 금융 기업들)를 국유화해야 하겠는데, 무엇보다 먼저 토건 국가예산을 교육, 복지 예산으로 바꾸어 경기부양책을 무상교육/의료 실천을 통해서 하는 것, 부동산 보유세 등 부유층을 직접 집중 겨냥하는 각종 부유세들을 징수하고, 부동산 투기 적발시에 투기로 벌어들인 재산을 몰수하는 것, 대학 평준화와 명문대 개념의 불식을 위해서 최대한의 국가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 남북한 간의 공통 군축으로 군사 예산을 계속 줄이고 교육, 복지 예산을 눌리는 것 등등을 의마하는 것이죠.

    ‘개혁주의’라는 누명이 붙을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한국적 맥락에서는 이 정도면 대단히 ‘급진적’ 개혁주의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안이 국민적으로 선택되어지면 우리가 대다수의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 한 때 박헌영 선생께서 ‘진보된 민주주의’라고 불렀던 –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겠지만 지금대로 갈 경우에는 정권이 가면 갈수록 ‘밑바닥’의 불만을 짓누르기 위해서 강경한 억압, 탄압책을 채택해야 할 것이고, 결국 권위주의적 경향의 대대적 강화로 갈 것입니다.

    이명박형(型)의 ‘신권위주의’는 결국 파탄에 이르러 혁명으로 귀결될는지 아니면 민중들이 이 가중되는 고통들을 그저 참을 것인지 저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쨌든 망국의 그림자가 보이기 전에 급진적 개혁이라는 대안을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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