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구 민중에 대한 낭만적 꿈 버려라"
        2008년 10월 28일 09:25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지난 번에 미 제국 패권의 위기 및 몰락 과정에서 수많은 국지전들이 발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요지의 글을 쓰고 나니 이에 대한 한 반론이 들어왔습니다.

    반론의 요지는, 패권 위기 과정에서 전쟁이 발발될 수 있어도 주요 핵심부 (구미 지역) 국가들의 민중의 반전 운동이 크게 일어나 제국주의 전쟁을 막을 수도 있다는 주장, 그리고 반전 운동을 자본과 국가와 같은 수준의 행위자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 즉 핵심부 민중의 반전 – 나아가서 혁명 – 운동 역량에 대해 보다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혁명’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걸 다 읽고 보니 좀 묘한 느낌이 드네요. 한편으로는 남들이 다 돈 계산하고 출세하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줄기차게 ‘반전’과 ‘국제 연대’, 나아가서 – 요즘 거의 딴 데에서 들어보기 힘든 – ‘혁명’까지 외치는 <다함께> 류의 분들의 열정을 대단히 존경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대체로 도심 중산계층의 가정에서 곱게 커 배고픔을 한 번 겪어본 적이 없는 이 분들이 ‘혁명’을 이야기할 때에 과연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머리가 아닌 피부로 아는지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알았다면 아마도 그런 용어의 사용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혁명’이란 정확하게 권력과 부의 대이동, 그리고 권력 구조의 본격적인 재편성을 의미합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원칙상 권력 그 자체의 극복, 즉 권력과 부가 없는 사회를 지향하지만 우리가 역사에서 아는 ‘현실적’ 사회주의 혁명들이 다 빠짐 없이 대대적인 반동, 즉 권력과 부의 재등장과 그 체제의 재편성으로 귀결됐습니다.

    그 사실을 (저처럼) 아주 안타깝게 여길 수 있어도 어쨌든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말씀이죠, 권력과 부의 대이동이 대대적인 유혈없이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을 들어 ‘비폭력 혁명’의 가능성을 자주들 이야기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직까지의 베네수엘라에서의 변혁 사업의 진척은 대체로 ‘발전된 사민주의'(무상 교육/의료 + 기업 운영에서의 노동자 참여) 정도지, ‘혁명’은 아닙니다. 그리고 급진적인 부/권력의 재분배로 나아간다면 틀림없이 유혈화될 가능성이 높고요.

    혁명과 닭장 투어

    혁명을 외치자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하죠. 자기 목숨과 남의 목숨 말입니다. 그리고 혁명의 칼이 칠 ‘남’들이 꼭 ‘악질 반동’만이 아닐 것이라는 것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혁명이란 것 무엇인지 파데에프라는 작가의 <궤멸>이란 소설에서 학교 수업때에 잘 배웠습니다.

    일제 시베리아 출병 때의 연해주에서의 공산주의적 유격대 대장인 레벤손이란 마음씨 착한 유태인이 그 주인공인데, 밀림에서 자신의 유격대 대원들을 먹여주고 살려주기 위해서 한 조선인 농민에게 그가 정성껏 키운 돼지를 몰수해야 됐던 것이었습니다.

       
      ▲ 필자
     

    돼지를 빼앗으면 조선인의 가정이 굶어죽을 확률이 크지만 유격대는 살고, 놓아두면 조선인이 살게 되지만 유격대는 죽는다, 이게 설정입니다. 레벤손의 심장이 찟겨지는 듯한 고통을 받지만, 그가 일단 돼지를 빼앗고 조선인과 그 가정, 그 작은 아이들을 굶어죽게 놓아둡니다.

    그렇게 하고도 계속 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혁명가인 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참, 파데에프란 대체로 꽤 어용적인 작가이었는데, 어쨌든 그가 적어도 밀림에서 일본 병사를 쏴본 경험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혁명을 이야기할 때에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이야기했죠.

    ‘위대한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젓먹이 아이라도 죽일 수 있는 처참한 광경이야말로 혁명입니다. 이건 한국 경찰에 의한 ‘닭장 투어’ 정도를 벌써 심각한 탄압으로 아는 이들로서는 상상이 잘 안가는 일일 것입니다.

    서구의 개혁주의적 대중조직들 

    그런데 그들이 굳이 그러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들이 사는 준(準)핵심부 나라에서 진짜 혁명이 일어날 확률이 대단히 낮기 때문이죠. 갑작스러운 중국 자본주의의 몰락이나 중-미 무력 갈등으로 국내 산업 구조가 망가지면 모를까, 그러한 극단적 시나리오가 실현되지 않는 이상 준핵심부/핵심부 국가에서는 혁명을 일으키기에 필요한 원한과 증오가 잘 축적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정규직 양산 등으로 민생의 파탄이 심해도 1917년의 러시아나 해방 직후의 조선과 달리 개개인의 물리적 생존 그 자체가 아직도 어느 정도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보장의 정도가 한국보다 훨씬 더 좋은 핵심부 국가의 경우에는 피지배계급은 개개인별로 자본/국가 체제에 대단히 잘 포섭, 편입돼 있습니다.

    전체 가구 중의 약 절반이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인생의 어떤 문제에 대해 복지 사무소나 학자융자관리국 등 국가 기관을 찾아가 해결할 수 있는 노르웨이는 그 포섭/편입의 정도가 가장 두드러지지만(사민주의적 복지 자본주의야말로 가장 공고한 자본주의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개개인들이 국가/자본과 개별적으로 거래하면서 그 생존은 물론 상당히 높은 소비의 수준까지도 유지할 수 있죠.

    물론 그들의 파편화 상태를 완화시키는 대중 조직들도 있지만 이 조직(노조, 사민주의 정당 등)들은 철저하게 개혁주의적입니다. 즉, 국가/자본 체제 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고 단지 개인이 그 체제와 보다 유리한 조건 하에서 거래하도록 노력할 뿐이죠.

    개혁주의적 대중 조직들이 과연 제국주의 전쟁을 멈추도록 강력한 압력을 넣을 수 있는가요? 글쎄, 중산계층들의 이해관계가 직접 개입되면 가능할는지도 모르죠. 예컨대 징병제 하의 1960년대 말의 미국에서 중산계층의 곱게 큰 젊은이들마저도 월남의 밀림으로 끌려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상황에서 말그대로 체제를 무너뜨릴 만한 듯한 반전 투쟁이 일어났죠.

    우리가 사는 현실

    미 군대가 장학금 등 미끼로 주로 가난뱅이들을 사들여 총알받이로 만드는 오늘날 같으면 중산계층들의 반전 운동의 열정도 훨씬 덜하죠. 중산계층의 개혁주의자들의 반(半)자유주의적 사고 구조로서 비판하기 어려운 전쟁이라면 반전 운동이 대단히 미약할 수도 있죠.

    예컨대 1999년의 유고 공습 때에 노르웨이의 노동당과 사회주의좌파당, 그리고 주요 노조들이 다 나토의 만행을 ‘알바니아인을 위한 구제’ 이름으로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지금 같으면 노르웨이나 덴마크에서는 아프간 침략 정지 및 침략군 철수 운동은 중간적 수준입니다.

    즉 정부들은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인식하지만, 미국의 입김을 거스르면서 철수를 감행할 만큼 센 압력은 전혀 아닙니다. 덴마크 군인들이 탈레반 전사들을 50명이나 죽인 어제처럼 스칸디나비아 침략군들이 계속 승승장구를 할 경우에는 아마도 운동은 크게 활력을 받지 못할 듯합니다.

    반대로 탈레반이 귀하신 덴마크 군인 50명의 몸을 주검으로 만들어버리면 아마도 침략군 철수 압력이 갑자기 강화될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니 제발 서구 민중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본주의적 계산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그들은 침략 전쟁이 그들에게 크게 불리하다는 걸 몸으로 이해하면 크게 움직일 수도 있는데, 그들의 이해를 가장 잘 돕는 것은 피침략국들의 군사적 패배입니다.

    제국주의와 동거하는 사민주의자들

    글쎄,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자면 제게 아프간에서의 노르웨이군 주둔을 합리화하고 있는 노르웨이 노동당 정치인보다 차라리 레벤손 대장이 훨씬 더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입니다. 둘 다 살인의 악업에 관련되지만 노동당 정치인과 달리 레벤손이 곧 굶어죽을 조선인의 고통을 적어도 마음으로 느껴 자신이 악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아는 것입니다.

    악행의 실체를 바로 보는 정견(正見)이야말로 선의 시작이죠. 레벤손형(型)의 인간에게 고통과 회개, 속죄가 있을 수 있지만, 제국주의와 동거하는 ‘사민주의자’들에게는 그 안정된 삶에 대한 집착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국이나 노르웨이에서 혁명이 일어날 확률이 낮다는 사실, 즉 급진적 개혁운동이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또 반기기도 합니다. 레벤손과 달리 저는 조선인 농민의 아이를 굶겨 죽이면서까지 혁명할 자신이 개인적으로 없기 때문입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