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만브라더스의 무능이 문제인가?
        2008년 10월 22일 03: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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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발 금융위기 상황을 일시적인 사태로 볼지, 아니면 자본주의의 체제 차원에서의 구조변동으로 볼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이 중요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사유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동시에 요동치는 한국의 정치경제학적 위기상황에 대한 사유 역시, 앞에서 제기한 문제를 토대로 진지하게 사유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칭 ‘리만 브라더스(이명박 강만수의 희비극적 통치를 일컫는 조어)’의 무능 때문에, 작금의 한국사회의 위기가 증폭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 판단에 이들이 한국사의 전개에서 맡고 있는 배역은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는 극장의 전체 구조를 고려하면, ‘소도구’에 비견할 만한 상징적 중요성조차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별다른 오디션을 거치지 않았거나, 이미 한 번의 오디션에서 실패한 배우를 무대에 등용시킨 ‘보이지 않는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통탄할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리만브라더스는 소도구일 뿐

       
      ▲ 리만 브라더스
     

    오늘의 금융위기 상황은 사실 ‘구조적인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일찍이 산업자본주의를 검토하면서 예견한 ‘주기적인 공황’과 닮아 있지만 내용은 판이하다.

    적어도 마르크스가 목격했던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는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충당할 ‘외부’란 것이 있었다. 대체로 농업 국가였던 아시아 아프리카가 대거 식민지로 편입됨으로써, 이 ‘외부’는 세계자본주의의 성장의 토대로써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연히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하고, 이들에 의해 작동했던 자본주의 체제는 당연히 안정성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착취경제에 의존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는 위기로 빠져들고, 그것이 히스테릭한 형태로 분출된 것이 대공황이며, 공황의 탈출구로 선택된 것이 제국주의 국가 상호 간의 전쟁인 세계대전으로 비화된다.

    전쟁이 끝난 후 식민지였던 아시아․아프리카들은 독립하게 되지만, 이들의 정치적인 독립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단계에서 성립된 자본주의 체제의 ‘비대칭적인’ 메커니즘은 종주국과 구식민지 사이에서 변함없이 관철된다.

    물론 1945년에서 1989년에 이르는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권의 출현은 표면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전혀 이질적인 형태를 띤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이 역시 국가가 시장의 역할을 대리한 ‘자본주의’라는 점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의 글로벌화는 변함없이 추구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원료와 노동력, 국경과 화폐의 ‘낙차’를 통한 이윤의 확보가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을 가능케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역에 필요한 ‘공간의 낙차’가 필수적인데, 1989년 이후 글로벌화한 자본주의는 그것을 가능케 할 ‘공간적 외부’를 상실함으로써(WTO나 FTA 등을 통한 관세장벽의 철폐), 극단적으로 ‘시간의 낙차’에 의존하는 세계화된 금융시장을 통해, 이윤을 확대하고자 하는 체제 유지전략이 고안되었던 것이다.

    국가 간 ‘공간의 낙차’에 의존한 경제는 실물경제이며, ‘시간의 낙차’에 의존한 그것은 금융경제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가 완숙기에 이른 오늘의 현실에서 실물과 금융 모두 체제 유지의 확실성을 찾아볼 길은 어디에도 없다.

    실물경제의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선 값싼 ‘노동력’을 찾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세계시장이라는 장 안에서만 가동될 수 있는데, 세계시장이 갈수록 ‘균질화’함에 따라 노동에 따르는 ‘인건비’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환경에 직면하게 된다.

    그 단적인 예가 지금도 저임의 노동력의 기반이 되고 있는 중국 노동시장의 변화다. 개혁개방 이후 전지구적으로 진행된 기업의 대중국 투자란 결국 신규시장의 확보와 저임 노동력 확보에 대한 기업의 기대감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산업화가 일정한 단계에 이르자, 필연적으로 ‘노동정의’에 대한 관념이 형성되고 이에 따라 임금상승 압력이 당연히 높아진다.

    자본주의, 공간의 낙차와 시간의 낙차

    다음으로 언급되어야 할 것은 과거에는 ‘비용’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요소에 대한 가격반영의 압력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이산화탄소 배출규제’를 둘러싼 이른바 ‘탄소경제’와 같은 개념의 부상이다. 산업자본주의의 초기 단계에서는 모든 ‘환경비용’ 등에 대한 기업의 책임이 고려되지 않았다. 이것이 ‘비용의 외부화’라고 하는 경제학의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의 글로벌화된 생태 위기상황은 국가와 기업으로 하여금 ‘비용의 내부화’를 강제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물론 미국과 같은 일부 국가가 ‘교토의정서’에 동의하지 않는 등 저항은 거세지만, 그러한 고집의 결과란 결국 자본주의 체제는 물론이고 지구적 생존 자체를 파괴적으로 침식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무모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각각의 개별국가들은 자국 내에서의 민주주의의 진전과 국민들의 기대수준의 상승 때문에, 교육과 의료, 복지와 같은 부문에 대한 조세의 ‘재분배 압력’이 높아지게 된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부문에 대한 타격을 가하는 방향으로 국가의 경제노선을 이끌고 가고 있지만, 이러한 ‘국가의 부도덕한 정책’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존재근거 자체에 대한 국민들의 회의를 낳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에 대한 부정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국가는 설사 그것이 자신의 동맹적 파트너인 시장 부문의 강력한 저항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타협적 복지정책 및 조세의 ‘재분배’를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작금의 실물경제 부문에서의 내수부진의 구조화는 인간노동을 천연덕스럽게 비용으로만 사유하는 기업의 싸늘한 계산과 재분배 기능을 삭제시키는 국가에 대한 대중들의 불가피한 저항이기도 하다.

    화석연료의 급진적인 고갈현상은 오늘의 상황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기요인의 상수다. 지금이야 세계경제 위기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 때문에 석유를 포함한 화석연료의 가격이 등락을 거듭하고 있으나, 적어도 한 세기 이내에 그것이 일정하게 피크에 도달한 후 생산량이 급격하게 감소할 수밖에 없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 결과는 당연히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는 세계경제의 동반몰락 또는 아노미를 초래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바이요 경제체제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있기도 하지만, 곡물가 파동에서 확인했듯 산업구조 재편에 따르는 막대한 비용을 생각해 보면, 미래의 불확실성은 해소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실물경제 또는 물질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가능케 했던 지구인들의 ‘노동’에 대한 인식 변화 역시 자본주의를 위기에 빠지게 하는 요소다. 오늘의 노동자들은 초기 산업자본의 축적을 가능케 했던 ‘금욕적 노동윤리’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다.

    월러스타인과 김종철

    실물경제 부문에서의 노동보다는 ‘증권’과 ‘부동산’을 포함한 카지노에 유사한 ‘우연성(운명)의 투기’에 이들이 더욱 애착을 보이는 이유는, 실물경제 안에서의 노동의 결과가 그의 미래전망을 낙관적인 방향으로 진전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불가피한 노동윤리의 변화다. 그런데 이 ‘우연성의 투기’란 비물질 경제 영역의 근본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초기산업자본주의는 ‘공간의 낙차’ 아래서 상품 교환을 ‘관세’의 형태로 방어할 수 있었지만, 오늘의 정보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시간’을 장악해야 하는데, 이것을 지구화된 수준에서 컨트롤한 ‘보이지 않는 손’은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거의 악무한적인 실시간대의 글로벌한 교환을 통해서 지탱되던 금융자본주의는 한 번 붕괴하면, 연쇄적으로 그 뿌리까지 붕괴시킨 후에야 멈출 수 있는 것이다.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이러한 장기국면에서의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월러스틴이 『세계체제론』 등을 통해 제기한 바 있으며, 한국에서는 문학비평가 김종철이 <녹색평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경고해 온 바 있다.

    그러나 해법의 차원에서 두 사람의 태도는 상이하다. 월러스틴은 향후 진행될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상황은 짧게는 50년에서 길게는 100년 정도 진행될 것으로 예측하는데, 이 시기가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고통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매우 험난한 시기가 될 것이라는 묵시록적 주장을 펼치는 데 멈춰 있다.

    이에 반해, 김종철은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지탱하는 ‘화폐경제’의 폐해로부터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벗어나 ‘농적 순환사회’를 모토로 한 자립과 자치의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풀뿌리민중들이 주체적으로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진단이 묵시록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묵시록적 위기에 처한 것은 현단계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고, 이 체제가 초래할 고통의 대부분은 체제의 꼭지점에 있는 지배계층들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들’이 짊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사정이라면 역시 중요한 것은 파상적인 고통에 직면할 가능성이 분명한 민중들 그 자신이, 체제가 우리에게 던지는 달콤한 약속들에 대한 거부를 인식과 실천의 양 측면에서 분명히 하는 데에 있다.

    가령 경제발전만이 살 길인데, 이를 위해서는 알 수 없는 무한 경쟁체제와 승자독식구조에 순응해야 하며, 특히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국민들이 자발적인 ‘고통분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 더 이상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구조 위기, 세계사적 변화, 지(知)의 변혁

    위기에 빠진 것은 민중들 그 자신일 터인데, 과거에도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계의 국가들은 기업을 살려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말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등장하는 국가의 위기관리 체제를 보면, 국가는 시장과의 동맹적 파트너이지 풀뿌리 민중들의 보호자가 아닌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이런 구조적 체제 변화기에는 ‘지(知)의 변혁’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세계사적 변화는 언제나 지(知)의 변혁을 초래해왔다. 오늘의 세계사적 지식생산 양식의 근거는 근대 자본제 질서에 부응하여 성립된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체계화된 철학에서의 진, 선, 미 영역의 완전한 분화는 통치방식에 있어서의 관료제의 전문화와 인문적 지식인의 추방, 테크노크라트의 부상이라는 지식과 지식인의 분화형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동시에 대학을 포함한 학문영역에서 성립된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분기와 같은 분과학문 체제의 구조화는, 학문 자체의 내재적 탐구욕보다는 체제유지와 관련된 실용학문, 더 정확하게는 체제유지학문으로서의 성격이 확고하게 강화되었음도 부정하기 힘들다.

    냉전기를 거치면서 대학에서의 지식생산은 국가의 압력에 빈번하게 노출되었지만, 냉전 이후 절대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고조되면서 그것은 다시 시장 부문의 노예적 상태로 빠른 속도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한국대학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대학의 학부교육은 좋게 말하면 ‘국민교육’, 냉정하게 말하면 ‘직업훈련교육’으로 격하되었으며, 대학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 학생과 교수, 그리고 교원 축에도 끼지 못하는 박사급 시간강사들은 그 지위와 현재적 상황은 다르지만, 지식생산에 따르는 학문의 내적 희열과는 무관한 ‘기능적 지식’의 생산압력에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다.

    그 위기가 가령 1997년의 IMF 사태와 같은 경제적인 수준에서 날카롭게 노출될 때마다, 혹은 이른바 ‘87년 체제론’과 같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가감 없이 노출될 때마다, 한국의 지식사회에 던져지는 사회적 비판은 이런 것이다. 왜 지식인들은 임박한 경제위기를 경고하지 못했나. 왜 지식인들은 도래할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지 않았나 하는 저널리즘적 힐난이 그것이다.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들리겠지만, 이 힐난을 가볍게 무시할 권리가 지식인에겐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동시에 이러한 힐난이 단순히 지식인에 대한 폄훼라기보다는 도발적인 형태로 제기되기는 했지만, 진실의 유력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식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

    국가’라는 터미널, ‘발달’이라는 자기장에서 벗어나야

    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체제적 지식인’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강화했고, 이 때문에 체제 내화된 지식생산의 카테고리 안에서 기능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요컨대 규범적인 성격으로 구조적인 변화를 이룬 근대적 지식생산의 ‘외부’가 소실됨으로써, 지식생산이 프로젝트로 불리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토가 구조화됨으로써, 지(知)의 해방적 또는 예언자적 기능이 대부분 거세되었다고 생각한다.

    국가나 시장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知)의 생산방식은 결국 ‘고용된 지식’에 불과할 뿐, 지(知)의 변혁적 기초가 되어야 할 ‘비체제적 상상력’에 입각한 근본적 사유를 보여주지 못했다.

    동시에 기능적․실용적 지식의 전사회적 환대는 근대적 지(知)의 출발점에서, 바람직하게 제기된 체제를 상대화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유혹이기도 했다. 근대이행기에 데카르트가 ‘이성’에 의해 ‘신’을 상대화했듯이, 조선후기의 실학자 박제가가 ‘한국어’를 통해 ‘중화주의’를 상대화했듯이, 방법적으로든 아니면 실천적으로든 스스로를 시스템의 ‘외부’에 위치시키는 일이 지(知)의 변혁적 기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지(知)의 변혁적 시선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적 위기를 통해서만 존속할 수밖에 없는 자본제 경제체제의 ‘외부’를 상상하는 일이며, 그것이 공산주의건 사회주의건 간에 어쨌든 ‘국가’라고 하는 터미널을 통해서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발전론적 세계관’의 강력한 자장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는 일에 있지 않을까.

    오히려 작금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국가나 시장, 세계체제의 구조적 압력에 대항하여 풀뿌리 민중들의 자율적 결사와 지속가능한 순환경제, 그리고 사람과 자연 모두가 조화적 공생을 이룰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이 아닐까.

    동시에 우리는 인문정신을 포함하여 지(知)의 변혁에 있어 기초가 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합적 비전과 영감을 촉진하는 지적 태도를 확대하고, 지(知)의 변혁과정에서 체제와 결별함에 따라 파생될 경제적 안정성의 붕괴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풍요가 결코 보상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행복의 비가시적인 가치를 재확인하는 작업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화폐체제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물신’의 무대에서 퇴장하여, 막 태어난 아이가 경이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듯이, 분노도 두려움도 없는 울음으로 세계를 껴안고 있듯이,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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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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