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어도 여기서 싸우다 죽을 거야”
    By mywank
        2008년 10월 15일 07: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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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오후 찾아간 기륭 농성장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분회원과 함께 촛불을 켠 시민들이 손을 맞잡던 농성천막은 뜯겨 없어졌고, 마지막까지 김소연 분회장이 단식을 하며 버티던 경비실 위 ‘2층 농성장’과 사다리도 사라졌다. 분회원들이 지친 몸을 누이던 컨테이너박스는 멀찌감치 옮겨져 있었다. 

    이날 새벽 사측이 고용한 용역깡패와 회사 구사대에 의해 강제로 철거된 기륭전자 분회 농성장의 모습은 처참했다. 간신히 건진 컵라면 두 박스와 생수 한 통이 농성장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바닥에는 갈기갈기 찢겨진 천막조각이 나뒹굴고 있었다.

       
      ▲ 텅빈 기륭 농성장 (사진=손기영 기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있던 기륭전자 분회원들 앞 정문에는 사측에서 고용한 10여명의 용역깡패들이 분회원들의 모습을 보고 마냥 비웃고 있었다. 한 용역깡패는 분회원들을 향해 손으로 ‘V자‘를 지으며 약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 시민들은 사측의 농성장 침탈에 항의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준비했고 사람들이 앉을 수 있게 깔개를 깔았다. 오후 3시 반 갑자기 정문에 있던 용역깡패들이 길목을 비키더니, 파란색 ‘엑스트랙’ 승용차 한 대가 정문을 나왔다.

    승용차는 바닥에 있던 깔개와 회견 현수막을 그대로 밟고 지나갔고, 주변에 있던 조합원들과 네티즌들은 차량 진행을 막으며 저항했다. 이에 정문에서는 100여 명의 용역깡패와 회사 구사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차량을 막던 분회원들과 시민들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했다.

    분회원들과 시민들은 시설물을 파손하려는 차량의 진입을 끝까지 막으며, 용역깡패들과 구사대의 폭력에 저항했다. 기륭전자 이름이 들어간 파란색 점퍼를 입은 한 구사대원은 “너희 때문에 몇 년을 고생했는데, 뜨거운 맛을 봐야 해”라고 말하며 마구 발길질을 했다.

       
      ▲회견을 방해하는 차량의 진행을 막는 시민들과 분회원들 (사진=손기영 기자)
     
       
      ▲차량의 진행을 막는 시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구사대원 (사진=손기영 기자)
     

    분회원들과 시민들은 100여 명이나 되는 용역깡패와 구사대의 폭력으로 차량을 막지 못한 채 50미터 가량 밀려났다. 폭력행위에 시민들이 계속 항의하자 용역깡패와 구사대들은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현장에는 전경과 현장지휘관 30여 명이 있었지만, 분회원들과 시민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용역깡패와 구사대들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차량이 어디론가 사라진 뒤 용역깡패와 구사대는 다시 정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륭전자 농성장 침탈 규탄 기자회견’은 예정시간을 넘겨 오후 4시 반이 돼서야 진행되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한 기륭전자 윤종희 분회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방금 전까지 용역깡패의 폭력에 저항했던 윤 분회원의 ‘가쁜 숨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그대로 들리고 있었다.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자리에 의도적으로 차량을 통과시키고, 우리가 항의하자 준비라도 한듯이 구사대, 깡패들이 뛰어나와 폭력을 휘둘렀어요. 저들은 또 다시 순식간에 몰려와서 폭력을 유발할 것 같아요. 하지만 거기에 말릴 필요는 없어요. 이 모든 것을 지시한 사측의 경영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은 존재들이잖아요”

       
      ▲기자회견 모습 (사진=손기영 기자)
     
       
      ▲농성장에 또 다시 폭력이 행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과 ‘민가협’ 회원들 (사진=손기영 기자)
     

    “그런데 저는 이해가 안가는 게 있어요. 구사대들도 우리와 같은 노동자들인데 우리들을 죽이려고 해요. 서로 약자인데, 사측의 횡포에 함께 싸워도 모자랄 판에 저들은 강자를 향해서는 허리를 굽히고 같은 노동자에게는 폭력을 휘둘러요. 모르겠어요. 정말…”

    정종권 진보신당 집행위원장도 상의가 흠뻑 젖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 정 위원장도 기자회견을 방해하려는 차량의 진입을 끝까지 막으며, 분회원, 시민들과 함께 구사대들에 맞서 저항했었다.

    “지금 접하는 현실이 대한민국의 모습이에요. 얼마 전 수천억 원을 탈세한 이건희씨에 대해 대부분 무죄판결을 내리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용역깡패를 동원해 폭력을 휘두르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에요. 얼마 전 기륭전자 최동렬 회장이 한 케이블 TV에 ‘포도주 애호가’라고 나왔어요. 저는 그게 포도주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연상되더라고요”

    용역깡패들이 또 다시 폭력을 휘둘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회견장에는 300여 명의 시민들과 시민사회 인사들이 모였다. 컨테이너박스가 있었던 곳 옆 공중전화 부스 위에는 컵라면 4개가 올려져 있었다. 뒤늦게 회견장을 찾은 이들은 컵라면이 왜 여기에 올려져 있는지 의아해 했다.

    “100일 가까이 단식을 하던 분회원들이 단식을 끝내고서 좀더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는데…. 오늘 새벽에 분회원들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을 때 농성장이 침탈당했어요. 물이 뜨거워서 식히려고 공중전화 위에 컵라면을 올려놓았던 것인데…”

       
      ▲컨테이너박스를 옮기고 있는 시민들과 분회원들 (사진=손기영 기자)
     

    정종권 집행위원장에 이어 마이크를 잡은 김명운 민족민주열사 추모단체연대 집행위원장이 그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이어서 기자회견문이 낭독되었다.

    “자본이 가진 힘은 폭력과 돈이다. 기륭전자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시민이 가진 힘은 정의와 양심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천막과 농성장이 부서져도,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컨테이너와 천막은 이곳에 다시 세워질 것이고, 비정규직이 없어지지 않는 한 마음 속에 세워진 투쟁의 깃발은 꺾이지 않을 것이다”

    기자회견에 이어 분회원들과 시민들은 공연과 자유발언이 어우러진 ‘결의대회’를 가졌다. 이어 농성장에서 50미터 떨어진 곳으로 옮겨진 컨테이너박스를 원래의 자리로 옮기기 위해 밧줄을 묶었다.

    “영차~ 조금만 더 힘내요”. 분회원들과 시민 100여 명은 서로 밧줄을 잡고 컨테이너박스를 옮기기 위해 힘을 합쳤다.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는 10여 분 만에 공중전화 부스 옆으로 옮겨졌다. “죽어도 여기서 끝까지 싸우다 죽을 거야.” 밧줄을 놓고 이마에 땀을 닦던 윤종희 분회원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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