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는 박정희에게, 좌파는 루즈벨트에게
    2008년 10월 13일 06: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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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유화 선데이를 축하한다

드디어 외신들이 미국 정부가 북유럽식 은행국유화 모델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에 시달리던 미국 정부가 이제 많은 민간은행들을 국가가 소유하는 방식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지난번 AIG에 구제금융을 쏟아 부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다. 원래 AIG가 신청한 구제 금융의 규모는 400억 달러 수준이었지만 미국 중앙은행격인 연방준비은행(FRB)은 이의 두 배가 넘는 890억 불을 주고 아예 지분의 80%를 인수해버렸다. ‘금융지원’이 아니라 ‘국유화의지’를 드러낸 대목이었다.

피의 일요일, 누구의 피인가

그래서 나는 지난 9월 14일을 ‘국유화 선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원래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이 확정된 2008년 9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을 미국 증시는 ‘블러드 선데이’라고 불렀다. 가끔씩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블랙먼데이’니 ‘무슨 데이’니 하는 어법이 이번에도 동원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피의 일요일’이란 어디까지나 자기네들의 심리를 표현한 주관적 명칭이었다. 피의 일요일에 나오는 피는 바로 ‘자본주의자’들의 피였기 때문에 이런 공포영화 같은 제목이 붙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바로 그 역사에 남을 일요일의 정확한 개념은 ‘국유화 선데이’였다. 국유화 선데이 1주일 전에 모기지 업체 두 곳이 공적자금을 투하 받고 ‘국유화’의 길을 걸었고 이틀 뒤에 AIG의 지분 80%가 국가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국유화 해법’이 본격 개시된 일요일인 셈이다.

결국 한국에는 빼빼로데이(=11월 11일), 짜장면데이, 화이트데이, 덥데이(=8월15일), 춥데이(=12월 15일) 등이 있다면 미국에는 ‘국유화 선데이’가 있었던 것이다.

2. 파생상품 위기는 며느리도 모른다

우리가 세종대왕 얼굴이 찍힌 종이 쪼가리를 ‘화폐’라고 부르면서 거기 적힌 숫자만큼의 교환능력을 인정하는 유일한 근거는 그 자산가치의 효력을 ‘국가’가 보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간금융’이란 국가처럼 직접 돈을 찍어내지 않으면서도 화폐를 창출하곤 한다. 은행은 ‘지급준비율’ 만큼만 돈을 갖고 있고 나머지는 다 대출한다. 그리고는 모든 예금주들에게 맡긴 돈을 아무 때나 찾으러 와도 100% 줄 수 있다고 ‘뻥’을 친다.

예금주들은 모든 예금주들이 다 짜고 갑자기 한꺼번에 돈을 찾으면 망하지 않을 은행이 하나도 없음을 알면서도 이런 뻥에 속아준다. 결국 모든 은행은 늘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 돈을 빌려주고 있는 것인데 단지 실제로 이런 예금인출 사태가 안 일어날 뿐이다.

은행들의 공인된 ‘뻥’

이 때문에 돈을 은행에 넣어둔 사람도 돈이 있다고 생각하고, 은행에서 돈을 빌린 사람도 돈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같은 돈을 가지고 양쪽에서 계산을 하게 된다. 실제 화폐가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구매 잠재력은 양쪽에서 발생한다. 화폐가 창출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종의 ‘공인된 사회적 사기’에 ‘보증’ 혹은 ‘맞교환'(스와프 거래) 같은 장치들을 계속 추가하면서 마치 계단을 오르듯이 점점 더 무궁무진한 화폐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이른바 파생금융상품이다. 결국 민간금융은 모두 국가의 허락 없이 화폐를 창조하는 속성이 있다. 이런 민간금융(파생통화)이 많아질수록 한국은행이 직접 찍어내는 ‘본원통화’는 의미가 없어진다.

민간의 자유로운 화폐 창출 능력! 그것은 무엇인가? 경찰이 위조지폐범을 잡아들이는 이유는 바로 ‘민간의 자유로운 화폐 창출 능력’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이 능력을 통제하지 않으면 금융시스템은 어느 날 순식간에 붕괴될 위험이 상존한다.

그런데 특히 한국산업은행 민영화의 모델이 되었던 투자은행(IB)이란 이런 일반적 상업은행보다 이 화폐창출활동이 극심한 은행을 말한다. 이런 은행들은 자기자본의 15배~20배 정도를 대출, 운용한다. 심할 경우 30배까지 이른다. 따라서 하부가 무너지면 급속도로 부실화될 위험이 늘 상존한다.

파생상품과 적벽대전의 연환계

미국 위기에 묻혀 그냥 지나갔지만, 스위스 최대은행인 UBS도 9월 12일 모기지 부실 상각으로 3억5,800만 스위스프랑의 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대규모 손실이 나기까지 해당 직원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는 점이다. 은행 간부도 모르고 은행장도 모른다. 파생금융상품의 위기는 성격상 며느리도 모른다.

   
  ▲ 그린스펀 FRB 의장

재임기간 중에 파생상품의 규모를 거의 5배 이상 키워놓은 전 FRB의장 그린스펀은 아직도 파생상품에 대해 높이 평가했던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단지 "파생상품의 운영자가 문제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파생상품은 마치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이 모든 배를 다 연결시켜 놓는 바람에 순식간에 모든 수군이 불구덩이에 빠졌던 것과 비슷한 위험이 있다. 차단벽 없이 모든 금융을 다 연결시켜, 단 한순간에 신용경색이 전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는 근본적인 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결국 국가는 (다른 영역은 차치하고)금융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장악할 의무가 있다. 사실상 화폐를 창출하고 있는 금융파생상품을 완전 통제해야 할 의무도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금융국유화는 전통적으로 좌파의 핵심적 경제 강령 자리를 지켜왔다.

3. 월가는 박정희한테 배워야 한다

해방 이후 이승만은 미국의 선진금융기법을 들여온다는 미명 하에(?) 금융자유화와 은행 민영화 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민간 은행들을 국유화시켜버렸다.

그 이후로 군사정권들은 김영삼 정권이 시작하기 전까지 이른바 관치금융이라는 비판의 화살을 수없이 몸에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국책은행들을 지켜왔다. 한국 금융의 역사로 보면 5.16 구테타는 이승만식 금융체제의 먹구름을 확 걷어내는, 말 그대로 ‘혁명’이었다.

자본주의를 전제로 한 금융 국유화

그러나 지금은 ‘우리은행’ 외에 정부의 소유권 지배를 받는 은행들이 별로 없다. 김영삼 정권 이후 김대중-노무현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일관되게 진행되어온 이른바 금융선진화란 실은 이승만 시절로 복귀하는 조치에 불과했다. 8,000개의 민간은행을 갖고 있으면서 변변한 감독 장치 하나 없었던 미국 역시 이승만 시절의 금융노선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박정희식 모델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를 전제로 한 금융국유화 였다는 점에서 바로 이 모델이 미국의 당면 금융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해법이 된다.

이제 금융은 미국이 한국에서 배워야 할 차례이다. 특히 은행장들을 군대 쫄병 다루듯이 다루었던 박정희 시절의 금융기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선진금융기법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선진 야동기법이면 몰라도.

4. 신자유주의 매뉴얼 어디에도 국유화 해법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자본주의자들의 ‘해법’은 분명하다. 그것은 금융국유화를 통해 민간의 자유로운 화폐창출 능력을 회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법을 추구하는 한, 금융위기 이후의 경기하락까지는 어쩌지 못해도 금융위기 자체는 진압할 수 있다.

미국 정부의 ‘국유화 여력’은 아직은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번에 의회를 통과한 국유화 자금은 미국 GDP의 5%가 안된다. 또 기축통화라는 달러화의 성격상 국유화 여력이 비교적 클 수밖에 없다.

미 의회에서 월가의 잘못을 ‘납세자 부담’으로 처리하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다. 현대 소득세 시스템 하에서는 미국의 주요 납세자란 결국 기업들, 고소득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부실 금융자본이 일으킨 문제를 산업자본가, 중소상공인 등 이른바 납세자로 불리는 ‘총자본’이 해결해주는 것이다.(이를 메인스트리트가 월스트리트를 구제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커다란 문제를 잘게 쪼개서 공동운명에 처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 가능한 수준으로 나눠주는 과정이다. 이는 경제활동 참가자 모두에게 매우 합리적인 대안이다. 금융시스템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구제금융이 훨씬 낫다. 전체 핏줄 망이 붕괴되는 것보다는 그냥 피가 모라자라는 것이 백번 유리하다.

자본주의자들의 사회주의적 해법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국유화 해법’이 다름 아닌, 금융국유화를 적대시해 온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매우 신속하고 과감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신자유주의 매뉴얼 어디에도 국유화로 자본의 위기를 돌파하라는 구절이 없다. 원래 자신들의 철학대로라면 망하는 회사는 망하게 놔두어야 정상이다. 국유화 해법은 자본주의자들이 적대시 해온 사회주의적인 해법이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되자 염치도 없이 좌파적 해법을 슬쩍 가져다가 마구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이 대목에서 잠시 혼란과 저항이 있을 법도 한데, 전혀 이런 소음이 없이 매우 매끄럽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자본주의자들의 이중인격’이라고 부른다. 어떤 상황이 도래하자 자본주의자 중의 자본주의자라고 할 JP모건 출신의 재무부 장관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색 한번 안 바꾸고 그동안 남의 칼이었던 금융국유화의 칼을 마치 제 것인 양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구제금융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 일부 순수 자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신분열을 못 이겨서 처음엔 반대표를 던졌지만 어차피 ‘통과’는 예정된 수순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자본주의자들의 인격장애 혹은 정신분열이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다.

5. 좌파의 제2 경제 강령 : "정보의 공동소유"

대공황 시기에 대통령이 되었던 ‘루즈벨트’를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뉴딜정책(=권력형 토목공사)을 떠올리지만 내가 볼 때 루즈벨트의 더 큰 업적은 뉴딜 정책보다도 ‘자본주의의 투명성 강화’에서 찾아져야 한다.

루즈벨트는 ‘투명성 확보’를 공황극복의 대안으로 판단했다. 그는 연방정부 부처의 하나로 상무부를 설립하고 GDP 같은 각종 통계수치를 개발하며 요즘 회계사 수험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기업회계기준’을 제정하는 등 자본주의 투명성 강화에 매진했다.

심지어는 통계확보를 위해 인구조사까지 했다. GDP니 GNP니 하는 중학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단어들이 알고 보면 ‘대공황극복’을 위해 만들어진 개념들이다.

자본주의 투명성과 루즈벨트의 공헌

그런데 왜 투명성이 요구되었을까? 투명해야 한다는 것은 뭔가 감독과 감시를 위한 전 단계이다. 어떤 문제에 대한 정보의 투명성, 신뢰성이 보장되면 그 문제에 대한 ‘사회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공감대와 조건이 자동으로 마련된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향후 미국자본주의의 반성과 성찰은 그동안 산업자본에 대한 통제의 조건만 만들어두고 정작 금융부분에서는 감시, 감독을 실시하지 못한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 분명하다. 1890년에 존셔먼이 반독점법을 주창하고, 1930년대 루즈벨트가 상속세 강화와 ‘투명성’을 중심으로 역사에 남았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금융국유화와 ‘감시, 감독’으로 역사에 남을 차례가 된 셈이다.

경제의 투명화, 즉 ‘경제정보의 공동소유’는 공산당 선언에 없는 얘기지만 이제 좌파의 경제강령으로 추가되어야 할 개념이다. 좌파는 금융국유화를 제1경제 강령으로, 경제정보의 투명성 확보를 제2강령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 지구당 폐지를 거부하는 바람에 전조직이 이중장부, 삼중장부를 돌려쓰고 ‘불법적 대중정당’이라는 신개념을 도출했던 것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경제 강령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였다.

6. 벼룩시장 총재님을 모시기 전에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면 우리는 물물교환으로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지간하면 내가 필요한 것은 내가 만들어서 써야한다. 교환가치가 독자적 영역에서 존재하는 시대에서 사용가치끼리 직접 맞바꾸는 시절로 돌아간다.

금융시스템이 붕괴되고 사회가 물물교환으로 전환되면 한국은행의 위상과 역할을 <주간 벼룩시장>이 대체하게 된다. 벼룩시장 사장님은 사장이 아니라 벼룩시장 총재가 된다.

아무리 자본주의를 싫어해도 그런 정도로 자본시스템이 붕괴되는 걸 바라는 사람은 아마 없을 듯하다. 결국 박정희식의 금융국유화를 도모하되, 루즈벨트가 지향했던 ‘경제정보의 공동소유’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월가는 박정희에게 배우고 좌파는 루즈벨트에게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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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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