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책보다 더 나라 사랑한 적 없어
        2008년 10월 10일 09: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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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귀화 과정을 마친 게 2001년 봄쯤이었어요. 시험 치고, 허가를 받고, 원래 국적을 포기하고 해서 도합 2년 가까이 걸린 과정인 셈이었죠.

    귀화하고 나서 그 해 여름에 서울에 왔는데, 한겨레신문의 기자 분들과 점심을 먹은 일이 있었어요. 귀화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한 기자는 "그걸 왜 하셨나요? 그걸 하셨다고 해서 뭐 혜택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요? 뚜렷하게 하셔야 할 이유가 없었을 터인데.."라고 놀라움을 섞은 질문을 했어요.

    "뭔 혜택이 있다고 귀화를?"

       
      ▲ 필자

    글쎄,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나요? 나중에 국내에서 취직을 하고 여생을 보내고 싶으니 국적을 취득했다는 이야기도 했고, 또 국내 정치 문제를 다루는 기사들을 자꾸 발표하니 아무리 외국인 입장에서 그렇게 하면 타국의 내정 간섭에 해당되는데 국내인이 되는 게 마땅하단 이야기도 드렸는데, 반신반의하신 듯한 눈치이었어요.

    귀화를 왜 했느냐고? 저는 지구라는 자그마한 별에서 어디에서 사는가, 어느 인간 집단에의 소속을 갖는가라는 데에 대해서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지구가 어차피 하나이고, 또 인간 생애의 고통이나 해탈과 같은 중생의 진정한 ‘실존의 문제’에 비해서는 이 모든 인간 집단들과 소속들이 별로 의미가 없어요. 뭐 애국하든 매국하든 고통스럽게 태어나고 고통스럽게 죽는 게 매한가지에요.

    그렇다고 매국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닌데, 상대적인 문제들을 우리가 공연히 절대화시키는 것도 나쁜 버릇이란 이야기죠.

    제가 한국 사람이 됐다고 해서 예컨대 약간씩의 러시아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이라든가 (아쿠타가와를 하도 좋아하는 의미에서)일본 문학 애호가로서의 정체성 등등의 여러 가지 복수 정체성들을 어차피 지닐 것이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귀화’, ‘국적’에 대해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를 국내에서 하면 "괜히 도사인 척한다"는 반응이 제일 일반적이더라고요.

    하여간 "귀화하면 이득될 게 없다"는 그 기자님의 말씀에 저는 그 당시에 별로 신경 안 썼는데, 지금 보니 진짜 그렇습니다. 예컨대 국내 학교에서의 취직 가능성을 가끔 알아보곤 하는데, 대체로는 ‘외국인 교수 초빙’ 공고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어릴 때부터 상전국가 언어쓰게 하는 건 폭력

    한국학 등 저로서 가르치고 싶은 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그러한 자리들인데, 조건은 ‘1. 외국 국적자 2. 영어 원어민 내지 준원어민’이랍니다. 사실 제가 귀화를 하지 않아도 어차피 원어민이 아닌 이상 여기 학교사회에서 관심 대상이 될 일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유럽 국가(러시아 등) 국적이었다면 뭐 잘 봐주어서 ‘준원어민’으로 취급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된장 냄새 나는 국내인이 됐으니 써줄 데가 많지 않은 데다가 훨씬 더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 입장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제가 원서를 낼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이죠.

    사실, 외국인과 국내인을 차별적으로 채용하는데다 국내인에게까지 영어 강의 의무를 무조건 시켜 국내인 교수가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약 30~40%밖에 알아듣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일제 말기를 방불케 하는 꼴들을 연출시키는 학교라면 정말이지 원서를 낼 마음도 없습니다. 역겨워서 말씀입니다.

    저는 애국이든 우국이든 해본 적이 없는, 여성이나 책 이상으로 ‘나라’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극히 비(非)사회적인 중생이지만, 인간은 하늘이 내신 대로 사는 게 이치라고는 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써온 언어를 못쓰게 하고 상전 국가의 언어를 쓰게 한다면 이건 인간의 본성과 하늘의 이치에 대한 폭력이자 반역이지 뭡니까?

    이러한 꼴을 보느라면 정말이지 ‘좌파 민족주의자’를 좀 동정하게 됩니다. 공연히 힘 센 나라의 말로 지껄이는 걸 자랑으로 삼는 자 밑에서 살다보면 ‘미제 타도’를 절로 외치게 된다는 논리를 실감케 됩니다. 물론 그걸 외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게 없지만 말씀에요…

    ‘좌파 민족주의’ 동정하게 만들어

    하여간 저야 이쪽 지배자들과 같이 골프를 치고 같이 놀 생각이 별로 없으니까 굳이 생각할 것도 안되지만, 이쪽 지배자들과 어울려서 놀 사람이라면 한국에 귀화하지 말고 미국에 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접이 되죠.

    한국의 지배자들이 경쟁의 대상인 동시에 흠모의 대상인 열강들을 하도 우러러보는 나머지 자신들의 나라를 사실 속으로 좀 우습게 보는 버릇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자신들의 나라인 대한민국에 귀화한 자라면 ‘본국에서 뭔가가 안돼서 이렇게 우리한테 붙었겠지’라는 셈을 치고 미국인보다 한 등급 낮추어서 대우합니다.

    귀화했으면 한국인이 되는 것이지만, 한국 지배자들에게 내면화돼 있는 제국주의적인 글로벌 스탠더드로 잰다면 세계적 먹이사슬에서 한국인의 위치는 중간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경제가 만성적 침체가 되고 세계가 일극 체제에서 열강 경쟁 체제로 본격적으로 이동하면 저들이 누구를 가장 우등시할까요?

    제 짐작 같으면 미국인에 대한 독보적인 특별대우 대신에 주변 열강의 모든 사회 귀족들을 두루 섬기는, 보다 포괄적인 – 그리고 보다 철저하게 경제력에 기반되는 – 우열 질서로 옮겨져 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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