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 시대, 진보와 지식인을 생각하다
        2008년 10월 09일 06: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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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겨울, 나

    1997년은 한국사회의 현재를 만든 ‘전환점’이었다. 30년간 한국 사회를 지탱해오던 발전주의 경제성장이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평생직장 소멸, 고용불안, 청년실업, 주식 투자 등의 말이 사회화되기 시작한 시점이 그 때였다.

    그러나 역설적인 점은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정치-사회세력이 집권을 하고 있고, 이 패러다임이 대중들의 의식을 강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화-경제성장이라는 괴물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는 셈이다.

    10년 전 나를 되돌아보면, 미처 한국 사회의 거대한 변환을 피부와 몸으로 느끼지 못했던 ‘골방안의 예비연구자’였다. 연일 방송되는 경제위기, 국가부도 사태, 고용불안 등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삶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강 건너 불구경’했다고 이야기한다면 솔직할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나는 1997년 외환위기가 나의 삶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지진아도 보통 지진아가 아니었던 것이다.

    골방의 예비연구자 또는 지진아

    하지만 ‘과연 이것이 나만의 문제였을까’라고 자문해보면, 그렇지 않았다. 당시 사회과학자들 사이에는 유독 ‘신앙고백’이 많았다. ‘왜 경제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나’라든지 ‘한국 사회과학의 예측 능력의 결핍’ 등에 관한 내용이 유독 눈에 띄었다.

       
      ▲97년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사진은 당시 MBC뉴스보도의 한 장면. (자료=MBC)

    더불어 도대체 왜 경제위기가 도래했는지에 관한 수다한 원인 분석이 국내외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인지 이제 97년은 부정할 수 없는 ‘경제위기’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문제가 예측 능력과 이를 위한 개념적 도구의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97년 이후 거리와 지하철 등 도시 곳곳에 수많은 노숙자와 실업자들이 넘쳤다. 한때 지하철에 “IMF 한파로…”로 말을 시작해서 생계를 이어가려는 걸인이나 도산한 회사의 상품을 낮은 가격에 팔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식인들은 예측과 원인 분석에 앞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성장주의-발전주의 패러다임의 종언 속에서 어떤 삶의 가치와 기준을 새로이 정립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지만 소수를 제외하고 닥쳐온 시장만능주의, 경쟁지상주의 논리를 인정한 상태 속에서 ‘반대’만이 외쳐졌다.

    성장주의라는 난파선에서 뛰어내리기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미 한국에 상륙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외환 수급에 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원·달러 환율이 며칠 동안 몇 백원 상승하는 상황은 흡사 11년 전 가을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단지 현 정권의 정책적 오류나 장관 교체 등의 차원은 아니다.

    이는 전 세계적인 문제이자,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금융위기는 경제적 문제일 뿐만이 아니라, 도덕적·윤리적·정치철학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이제 신자유주의 하에서 다른 삶과 사유 방식을 토론하고 제시할 수 있는 장을 제시해야 한다.

    다시 97년과 같이 전문가임을 앞세워서 위기의 원인, 진단 그리고 해법을 고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금융위기와 성장주의 발전 전략에 대한 제대로 대응이 결코 아니다.

    6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에는 근대화, 경제성장주의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세력이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생산력과 성장이 진보이자 변혁의 잠재적 가능성으로 여겨졌으며, 그런 인식 틀에서 벗어난 발언은 퇴영적 혹은 공상적이란 딱지를 붙였다.

    그 사이에 대중들은 경제위기 10년을 경제성장의 실패라고 주장하는 시장주의 정치세력에게 ‘미덥지 않은 지지’를 보내주었다. 이제 나를 포함한 지식인들은 과거 스스로를 규정했던 단선적인 사회진보의 논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단선적 사회진보 논리에 대한 재검토

    벌써 금융위기는 실물경제에까지 파급을 미치고 있다. 현재 가계부채는 97년 수준보다 3배 이상 많으며, 향후 금리 상승, 시장에서 자금 부족, 중소기업의 도산, 고용불안, 급속한 가계부채 심화와 고금리 신용대출에 따른 신용불량자 양산이 예측된다.

    이것은 97년 이후 이야기되던 ‘양극화’ 차원이 아니라, 삶과 미래에 대한 ‘총체적 불안 심리’로 가속화되고 있다. 잇따른 자살, 불안정 노동자의 확대, 교육전쟁이라 불리는 악무한의 시스템, 심리적 불안감을 타인에 대한 가해로 일시적으로 해결하려는 흐름들, 이처럼 벼랑 끝으로 몰린 공황기의 대중들은 다시 ‘잠재적 안정’이란 품에 안기기 위해 ‘경제성장을 통한 사회통합’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시나리오도 있다. 촛불시위와 각종 저항에서 보여준 대중들과 불안정 노동자들의 움직임은 한국 사회가 역동성이 존재하는 ‘강점’이 있는 사회라는 것을 드러내어 준다. 나는 올해 어느 자리에서 ‘5년간 촛불이 밝혀질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특히 앞으로 그 계기는 촛불과 같이 우발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폭발인 동시에, 기존 운동 조직이 아닌, 새로운 집단에 의해 폭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후 몰아닥칠 금융위기와 그 파급은 대중들에게 97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장과 경쟁, 성장논리에 맞서, 시장과 경쟁의 시녀가 되라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과 불복종 형태의 분출과 현재 성장주의 시스템이란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려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흐름이 과거보다 급속히 확장될 것이다.

    뒷북을 칠 것이 아니라 당장 준비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난파선이 가라앉을 때까지 팔짱을 끼고 기다리면 되는가? 자본주의 자동붕괴론에 근거한 대기주의란 세기 초 망령을 반복하자는 말은 아니다. 나는 이후 급속히 확산될 불안과 균열 속에서 현재 시스템 하에서 더 이상 인내하기 어려운 새로운 주체들-예를 들어 불안정노동자, 실업자, 청년, 여성 등-이 자신의 언어로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수 있는 준비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들이 당장 노조 조합원이나 사회운동의 회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의미 있는 조직률 수치에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불안이 불만과 저항으로 솟구칠 때, 우리는 다시 촛불 뒤만 쫓으며 헤메서는 안 되지 않을까?

    ‘국지적이고 지역적인 행동’

    나는 그런 의미에서 지식인들이 대중운동과 그들 속에서 미래를 만들어낼 준비를 자신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같이 토론하고 행동하는 것으로부터 찾아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비록 문법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가진 개인과 집단의 ‘국지적이고 지역적 행동’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한꺼번에 비틀린 사회 전체를 뒤엎을 수 있다고 사고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교만함의 소산일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오늘날 민중이 평화를 되찾으려면 무엇보다도 자립적이며 자치적 삶의 기반을 뿌리로부터 파괴하는 경제발전의 논리를 배격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금융위기를 이미 겪고 있는 한국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제 지식인의 현장으로 가서 준비하는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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