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을 넘어 사회경제학으로
    2008년 10월 13일 06: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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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의 지면을 빌어 개인적으로 내가 한국에서 가장 ‘믿는’ 이재영 선배의 질문에 답하는 몇 가지 얘기를 해볼까 한다.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직문직답의 형태는 아닐 것 같고, 이래저래 책 뒤에 에필로그 형식으로 달고 싶었던 얘기들의 일부를 이번 기회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1. 에피소드,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

졸저 『괴물의 탄생』은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88만원 세대』에서부터 시작한 4권짜리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마지막 문장이니까, 굉장히 많은 문장들과 표현 중에서 고르고 고른 문장이라는 점을 먼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 더 고백을 하자면, 이 표현이 바로 이재영의 표현이었다는 점이다.

시기를 회상하면, 『88만원 세대』를 결국 <레디앙>에서 출간하기로 하고, 이광호 대표가 출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승용차를 팔았던 그 시점 어느 때의 일이다. 그 무렵, 우리는 모두 너무너무 돈이 없었고, 당장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한 차비도 주머니에 없던 일이 종종 있던 그런 시절이다.

나도 예금이 다 떨어져서 누군가가 밤에 잠깐 보자고 할 때에 택시비가 없어서 "오늘은 못 나간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생활을 꾸리기가 어려웠었는데, 그 때 이재영도 당장 하루 살기가 빡빡했다. 그 어느 즈음에 이재영의 통장에 원고비 20만원이 들어왔다.

그때 그 시절

그 때 "난 지는 법이 없다"라고 이재영이 말했었는데, 그 얘기가 참 재밌었다. <레디앙>은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라서 상근하던 기자들을 떠나보내고 있었고, 이광호와 이재영 둘이 겨우 사무실을 지키고, 몇몇 필자들은 원고비를 ‘후불’ 즉 외상으로 하더라도 <레디앙>을 지켜야 한다고 기고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의 1권 이후의 책들이 <레디앙>에서 나오지 못하게 된 것은, 순전히 출판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1, 2권이 동시 출간되었었는데, 1권의 출간비를 대기에도 <레디앙>은 벅찼고, 첫 출간이라서 이래저래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느라고 그 뒤에 2권이 나올 때에야 겨우 1권이 나오게 되었다. 1주일 차이지만, 사실은 개마고원의 2권이 1권을 추월해서 먼저 나오게 되는 소소한 사고도 벌어지게 되었다.

그 시절에 "난 지는 법이 없지"라고 하는 이재영의 낙천적인 표현들은 휘발성이 강했던 것 같다. 대선이 끝나고,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몇 개의 독자 모임 같은 곳에서 나는 "우리는 지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꽤 오래된 나의 독자들 중에 일부는 다른 곳에서도 그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 시리즈의 마지막 결어는 <레디앙> 그리고 이재영과 함께 어려운 시기를 같이 넘어갈 때, 그 때 우리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말이었다.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 번 이 표현의 원저작권이 이재영에게 있음을 밝히고 싶고, 다시 한 번 그의 낙천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2. 시대의 전위는 어디에 있는가?

   
 
 

졸저 『괴물의 탄생』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학부 대학생용 교재 정도로 수준을 맞추고자 했던 이 책에서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시대의 전위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회를 빌어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노동자 정당’이 시대의 전위인가, 아니면 다분히 아카니즘적이며 생태주의적인 공동체 혹은 직접 민주주의의 작동 요소인 풀뿌리 민주주의의 다층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 전위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10년 전에 유행했던 표현대로라면 cummunalism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코뮌에 해당하는 것들을 만드는 것이 보다 더 전위적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내가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로 이어지는 논의 축보다는, communism-communalism-코뮌적인 것, 그렇게 이어지는 논의의 축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사회주의와 사민주의 논쟁보다는, 지역-풀뿌리-공동체-생태로 연결되는 논의와 활동들이, 만약 ‘신좌파’라는 개념을 설정한다면 훨씬 더 전위적이지 않을까라는 것에 내 생각이 더 끌렸다. 아직은 이 문제에 대해 답하기에 내 스스로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지만, 이 책을 준비하면서 줄곧 후자의 논의 축을 생각했다.

전체 시스템보다 ‘요소’가 중요 

본문에서는 ‘제3부문’이라고 표현을 하였는데, 사회경제이든, 시민경제이든, 혹은 최근의 UN 용어대로 NGO(비정부기구)-NPO(비영리단체)가 되었든,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시도들이 어쩌면 경제적인 의미에서든 혹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든 더 전위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좀 하고 있다.

스웨덴이든, 스위스든, 아니면 독일형, 프랑스형, 혹은 일본형 생협모델이든, 아니면 이재영이 얘기한 북부 이탈리아든, 중요한 것은 전체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요소’들에 있다고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요소들은 <자본론>에는 나와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충분히 계급적인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에 공통으로 발을 걸치고 있으며, 반자본 혹은 비자본적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적 축적이 고도화됨에도 불구하고 보존되거나, 재생산되거나, 확대되거나 혹은 ‘재발견’되는 요소들이 과연 전위적인 것인가, 아니면 계급 사이의 충돌에서 우연히 등장했지만 결국은 사라질 것들이 전위적인가라는 것에 대한 판단이 문제의 핵심일 것 같다.

나는 ‘재발명(reinvented)’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들은 나라나 문화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적인 요소’ 그리고 ‘공공선’의 요소로서 자본 관계에 개입하며, 정치적 결정은 물론 국민경제의 작동에도 개입하며, 점점 더 중요한 요소로서 기능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한국자본주의의 외부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전위적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내부에 "다른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아직 충분히 전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작은 목소리로, 최소한 한국 자본주의의 외부를 볼 필요가 있다고 소곤거리고 있는 셈이다.

자, 상상해보자. 노조가 만약 스웨덴이나 프랑스의 경우에서 종종 발견하듯이, 그 스스로 일종의 생협을 가지고 노동자협동조합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배반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경제에 대한 요소를 노조 내에서 스스로 잉태시키는 일인가? 나는 오히려 지금의 민주노총이 스스로 소비자협동조합 같은 것을 잉태시키는 것이 더 전위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녹색당과 정치운동

90년대 이후로 한국에서 시민사회와 진보정당 운동 사이에 묘한 협조와 갈등 그리고 질투와 도전 같은 것들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시절에 유행했던 단어를 다시 환기해보면, ‘정치운동’이라는 단어와 ‘운동정치’라는 단어가 있었다.

정치 자체가 운동이라는 흐름은 시민사회 내부에서 ‘정치세력화’와 ‘녹색당 창당’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두 개 전부 현실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였고, 지난 대선 때 열린우리당에 대거 입당하는 정도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어쨌든 그런 흐름 속에서 ‘운동정치’라는 단어는, 점잖은 표현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상당한 비판력을 가지고 있던 단어였다. 참여연대나 환경운동연합과 같은 메이저 시민단체는 사실 운동을 표방하면서도 결국은 준정당의 위상을 가지고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이 단어는, 아무리 학술적이거나 개념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노빠’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이다.

운동을 표방하면서도 결국 권력을 만끽하고, 여차하면 ‘감시와 참여’라는 미사여구를 뒤집어쓰고, 정부 내의 높은 자리나 탐하는 것 아니냐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운동정치’와 ‘노빠’

이러한 현실 속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는 열린우리당 근처로 수렴하려는 하나의 힘과 훨씬 더 좌파 쪽에서 활동의 영역을 찾으려는 녹색당 흐름, 두 개의 힘으로 분화되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두 개 다 상처만 남은 실패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현실적으로 3~5% 정도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아마 한국에서 녹색당이 창당이 되고, 그 클라이막스에 달한다면, 10% 정도를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력과 진보신당 혹은 민주노동당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전개될까? 졸저 『괴물의 탄생』에서 전개되는 세계관은 다분히 녹색당적인 정책 대안이고, 그런 점에서는 현재의 진보정당과는 구분되는 논의의 세계이기도 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힘들이 기계적으로 진보신당에 합류하게 되는 일은 현재로서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한국의 녹색당 운동은 많은 활동가 혹은 시민들을 대변하는 스타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그래서 어떤 특정한 인사들이 진보신당의 녹색정치를 지지한다고 표명하여도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기가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녹색의 대안적 정책 틀과 한국경제 대안

원래 녹색의 작동방식이 좀 그렇기는 한데, 한국에서는 특별히 더 대중스타 혹은 많은 활동가들이 인정할 수 있는 인사가 없던 형태였기 때문에 더 그렇다. 즉 ‘협의’ 혹은 ‘협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 누구와 얘기하면 될까? 그런 사람은,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령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 협상을 한다고 해도, 그 대상이 없다.

두 번째는, 여전히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 녹색을 표명한 사람들과 꿈 그리고 이상을 공유하기에는 그 철학적 틀이 너무 협소하다는 점이다. 이것 역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녹색당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녹색당이 구현해보고 싶었던 정책적 틀에 관한 논의가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에서 소박하게나마 전개해보고 싶었던 얘기들이다.

이 정도면 이재영의 대부분의 질문에 몇 가지 간접적인 답변은 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기회에 ‘파시즘’과 ‘중산층’에 관한 내 견해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 답변을 마무리하고 싶다.

4. 우정과 환대

‘우정과 환대’라는 표현은, 내년부터 집필할 본 시리즈 중 세 번째 시리즈인 ‘국가의 기본’과 몇 개의 번외편에서 키워드로 사용하기 위해서 최근 준비 중인 표현이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몇 개의 논의그룹에서 ‘환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몇 개의 논의를 해보았는데, 생각보다는 중요한 개념인 것 같다. 참고로 작년과 올해, 내가 썼던 일련의 책들은 ‘생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MB 파시즘이라고 원래는 이름붙이고자 했던 그 정치체계는 한국에서는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졸저 『괴물의 탄생』의 또 다른 결론 중의 하나이다. 올 가능성은 다분했었는데, 이명박 자신이 파시즘적 인간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치사회구조는 물론 문화적 정치까지도 한국은 파시즘을 향해서 달려가는 중인데, 불행히도 이명박은 ‘불안한 중산층’을 유혹할 수 있는 아무런 인간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파시즘 시도는 하지만, 정치체계로서의 파시즘은 등장하지 않고, 다만 경찰국가로서의 전환, 즉 폭주하는 경찰 현상 정도를 보게 될 것 같다.

‘증오’와 ‘편가르기’

그렇지만 한국 경제의 위기는 생각보다 깊고, 향후 2~3년 동안 한국의 사회문화에서 특징적으로 등장하게 될 것은, ‘증오’와 ‘편가르기’가 될 것 같다. 이것은 파시즘의 또 다른 전형적인 요소들인데, 경제는 계속해서 어려워지면서도 중산층은 물론 민중들까지도 ‘증오’라는 감성적 요소를 특징적으로 가지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대단히 매혹적이면서 인간적 매력에 가득 찬 소위 ‘아름다운 인간’이 등장하면, 대단히 빠르게 한국형 파시즘이 완성될 것이라는 게 내가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파시즘 시나리오이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시기가 ‘불안한 중산층’의 동요에서 시작되어 민중들까지 그 ‘증오’를 공유하면서 완성되었다고 할 때, 거의 유사한 형국이 2010년에서 시작되어 2012년에 마무리되는 그 정치의 계절이 이런 파시즘의 전개가 극성에 달하게 될 것 같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게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맞서는 ‘환대의 경제’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졸저 『괴물의 탄생』에서 ‘제3 부문’으로 표현된, 자본과 국가에 환원되지 않는 요소를, ‘환대의 경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세밀하게 그려보고 싶다.

‘한국 경제 대안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마무리한 첫 번째 시리즈 이후 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리즈에서 이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물론 아직은 뿌옇게 요소들만 볼 정도다. 나는 그렇게 눈이 밝은 사람인 편은 아니다.

‘우정과 환대’라는 거울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보면 과연 어떤 모습이 보일까?

그렇게 정치경제학을 넘어 사회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가보고 싶기는 한데, 과연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에서 사회경제학이라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직은 답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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