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부 장관인가, 자본의 마름인가
        2008년 10월 09일 08: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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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조를 만들었다고 회사에서 쫓겨난 지 1,000일을 훌쩍 넘기고 94일에 이르는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진행했던 기륭전자 공장에는 3개의 신분이 존재했다. 정규직 15명, 기간제 40명, 파견노동자 240명.

    정규직의 상여금은 700%, 기간제는 400%, 파견제는 0%였다. 실낱같은 정규직의 꿈은 제쳐둔 채, 파견노동자의 꿈은 기간제 노동자로 신분이 상승되어 상여금이라도 받아보는 것이며, 기간제 노동자는 파견노동자로 전락되는 것이 두려워 회사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했다.

    아직도 비정규직이 부족하다고?

    이런 불안정 고용형태의 비정규직 규모가 전체 노동자의 과반을 넘은 지 이미 오래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고용의 질 하락, 사회양극화를 비롯한 사회적 갈등은 치유해야 할 주요한 시대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데도,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기업들이 더 많이, 더 자유롭게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비정규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화하라는 요구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얘기라고 강변해, 양적 질적으로 노동자들의 고용 향상을 주 임무로 하는 장관이 노동자들의 절실한 요구에 이데올로기적인 보자기를 씌우기에 급급한 모습까지 보여준 바 있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2차 행동의 날 (사진=기륭전자분회)
     

    기간제 노동자 고용 기간의 4년 연장 등 비정규법을 ‘나쁜’ 방향으로 개정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예고됐다. 개정 시기가 기습적이고 다름 아닌 노동부장관이 최선두에서 치고 나가고 있다는 특징만이 있을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지난 3월말 경제 5단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267개에 이르는 자신들의 요구를 쏟아냈다.

    이에 대해 이명박은 ‘노동부문 규제개혁안’이라고 화답하며, 자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 중 비정규직에 관련된 내용이 ‘기간제노동자의 사용기간을 기존 2년에서 3~4년으로 늘리고 단계적으로 더욱 유연화한다’는 것과 ‘파견대상 업무를 제조업 생산공정까지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5월부터 불붙은 촛불정국에 이은 지지율 하락은 속도만 줄이게 만들었을 뿐, 노동 관련 법과 제도를 자본의 요구에 부응해 과감하게 ‘개악’하려는 시도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촛불이 잠잠해지자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현 정권은 이제 노동부장관을 앞세워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법 개정 내용은 자본의 요구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있는 반면 차별금지 조항의 강화나 노조 건설에 대한 보복성 계약해지 금지, 비정규직 단결권 보장 등 국제노동기구(ILO)의 권고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재벌 요구 OK, 국제 요구 NO

    이영희 장관은 내년 7월이면 고용기간 2년이 되는 1백만명에 이르는 비정규직에게 정규직 전환에 대한 기회를 넓혀주기 위해 사용기간을 3~4년으로 늘려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사용기간을 늘린다고 정규직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사용자들이 더 자유롭게 안정적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자본가가 바보가 아닌 이상 3~4년씩 비정규직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노동법상의 해고제한 규정을 적용받는 정규직을 사용할 리 만무하다. 정규직을 최소화하고 비정규직으로 더 많은 업무를 대체하는 것을 촉진할 뿐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노동패널’이 1998~2005년 자료를 통해 8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자리 이동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정규직 전환은 12.8%에 머물렀고, 62.7%는 계속 비정규직이었으며, 20.3%는 실업 상태로 나타났다. 이제 노동자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는 포기하고 1일, 1개월, 3개월, 1년 계약직 또는 파견노동자로 이리 저리 유목민처럼 떠돌며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수렁에서 건져내는 것은 사용기간 연장이 아니라 정규직 중심의 고용구조로 되돌리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객관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상시적인 업무는 정규직이 담당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상시적인 업무에 계약직만 3~4년씩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면 된다는 법은 자본의 이익을 위한 ‘비정규 양산법’, ‘정기적인 비정규 해고법’에 다름 아니다.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

    비정규법(기간제,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난 7월 1일, 노동부에서는 기간제, 계약직 줄어들고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그 숫자가 줄어든 게 아니라 기간제를 계속 사용하면 2년 이상 고용의제나 차별금지 조항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아예 이랜드, 뉴코아나 제조업의 사내하청처럼 ‘외주화, 용역화, 하도급화’로 전환한 결과로 드러났다.

    오히려 비정규법조차 적용되지 못하고 있는 ‘외주화, 용역화, 하도급화’된 간접고용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대책이 시급한 과제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해법은 정반대로 파견 대상 확대다. 특히 이번에는 그 전에 망설였던 제조업 직접 생산공정까지 파견대상을 확대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최근 법원에서 잇따르게 판정나고 있는 불법파견 시비와 원청회사의 사용자성 문제를 한방에 다 해결할 수 있다. 중간착취를 용인하는 근로자 파견법은 개정이 아니라 철폐되어야 한다.

    2004년부터 직접생산 공정까지 파견 대상이 전면 허용된 일본의 경우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1일 계약직, 파견직 노동자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됨으로 인해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가장 이득을 많이 보고 직접 일을 시키는 자가 직접고용을 하지 않고 중간에 제3자를 내세워 간접 고용하는 것은 당연히 고용의 질과 근로조건 하락, 노동3권의 박탈로 귀결되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다. 중간착취를 금지한 근로기준법의 정신에 따라 직접고용의 원칙을 구현해 나가야 한다.

    또다시 차가운 겨울에 예고된 한판 전쟁

       
      ▲사진=기륭전자분회

    지금 일정대로라면 비정규직 관련법 개정안이 11월말~12월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회부되고 국회 안팎에서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국회의 과반의석을 확보한 한나라당,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다 합해도 10% 밖에 안 되는 노동조합 조직률을 볼 때 판세가 노조에게 불리한 것은 분명하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조직된 노동자에 한정된 투쟁이 아니라 촛불항쟁에 보여준 민중들의 역동성과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를 하나로 모아낼 수 있다면 또 다시 이명박의 머리를 숙이게 할 수 있다.

    소수 노동조합 간부들과 민주적인 사회단체가 국회 앞에 모여 물대포를 맞으며 상징적으로 투쟁하는 것을 넘어서 촛불학습의 효과가 발휘되어 가두에서 역동적인 대중투쟁을 만들어 갈 수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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