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를 향한 생뚱맞은 충고들
        2008년 09월 08일 01: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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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대환의 <시대정신> 기고와 그에 대한 <레디앙> 이광호의 기사로 불 붙은 논쟁에 최병천이 가세해서 주대환을 변호하면서 나서면서 논쟁이 점점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 논쟁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전진 총노선에 대한 논란과도 맞붙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주대환과 최병천의 주장에는 좌파의 정신 또는 자존심을 훼손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가 있습니다.

    전진 총노선 논쟁과도 맞닿아 있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 저는 이 얘기가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을 부르며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야"라고 자처하는 우파에게 좌파의 정신을 파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자본주의가 이룬 물질적 부에 대해서 자본주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더 위대한 산업을 일으켰다는 것에 감탄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자본주의가 이룬 꿈 뒤편에 피 흘리고 희생된 노동자와 흑인 노예들이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또 이어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무덤을 팔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물론 그 일이 하루 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한국의 경제발전 정말 경이롭습니다. 그리고 후진국 중에서 토지개혁을 통해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전환한 것도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 경이로움 뒤에선 일제 패망 후 ‘토지를 농민에게 공장을 노동자’에게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해방과 함께 농민, 노동자가 해방된 세상을 꿈꾸고 반제 반봉건 혁명을 이루려 했던 사회주의자들의 처절한 패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패배보다 더 처참한, 아무 죄 없는 인민들에 대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가족 중에 남로당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야밤에 산으로 끌려가 학살당한 수 많은 양민들을 보면서 어떻게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은 해방 후 미소간의 패권경쟁에서 출현한 남한의 친미국가 아닙니까? 친소국가 북한의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북의 지주의 아들들은 남한으로 내려와 서북청년단으로 규합해서 농민과 노동자 학살에 나섰습니다.

    생뚱맞은 충고들

    그 뒤에는 이승만 정권과 미국이 있었고요. 대구 인민항쟁과 제주 4.3항쟁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인민들의 학살의 책임은 누가 질 것입니까? 남한의 토지개혁은 북의 토지개혁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토지개혁을 추진한 조봉암은 전국을 돌며 농민들에게 남한의 토지개혁이 북한보다 농민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걸 알리고 다녔습니다. 북의 토지개혁이 없었다면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있었을까요?

    남한의 토지개혁은 북과의 체제 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해 후진적인 봉건제를 선진적인 자본제로 변경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그 정도의 평가면 족합니다.

    좌파에게 시장에 대해서 상품생산에 대해서 긍정하라는 충고 역시 생뚱맞습니다. 사회민주주의야말로 시장과 상품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구할 수 없었던 주택, 의료, 교육, 연금 등을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라고 주장한 것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습니다.

    안전하고 쾌적한 노동조건 경영주들의 이윤을 침해하면서 얻어낸 것들이었습니다. 해고의 엄격한 제한, 한달 간의 여름휴가, 8시간 노동제 등은 모두 자본과의 피터지는 투쟁을 통해서 얻은 것입니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이 모든 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전부를 잃지 않기 위한 자본가들의 양보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유럽의 자본가들이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얼마나 주먹으로 벽을 치며 애통해 했는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부자들에게 감세의 선물을 안겨주고, 사회복지 예산을 바닥내고 있는 이명박 정부 앞에서 우리는 상품과 시장을 긍정하는 뉴레프트라고 선언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극단적 생각의 위험성

    국유화와 중앙계획에 대한 포기를 요구하시나요? 20세기 초반 서구의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 시장이 실패했기 때문에 중요 기간산업에 대한 국유화가 있었던 것이고, 소련의 중앙계획경제가 높은 수준의 성장을 보였기 때문에 2차대전 이후 많은 신생독립국들이 계획경제에 매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물론 소련식 지령경제를 계획경제의 전형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 없는 지령경제는 박정희식 독재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니까요. 시장이 즉각 소멸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요는 생각을 극단으로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계획이 가능한 것은 계획으로, 시장에 맡길 수 밖에 없는 것은 시장에 맡겨야 합니다. 이미 민주노동당 창당과정에서 좌파들은 계획과 시장을 혼합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고, 그걸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국가사회주의의 폐단과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강령 문구로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그 문제 의식에 근거한 실천이 얼마나 치열했는가입니다. 저는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에 살다보니 가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20세기 초의 사회민주주의자의 실천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 벨기에 방송에서 영화 단(Deans)을 보았습니다.

    20세기 초 한 신부가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다가 국회의원이 되고, 나중에는 가톨릭의 조직적 압력을 견디다 못해 신부직을 버리면서까지 노동자들을 위해서 싸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아동노동 등이 잘 묘사되어 있고, 단은 참다운 기독교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 탐욕스런 자본가들에게 부를 노동자들과 나누라고 소리칩니다. 저는 사회민주주의를 개량으로 낙인 찍는 데 반대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일보에게 ‘사회민주주의자는 괜찮지?’하고 인정을 받으려는 것도 반대합니다. 사회민주주의자야 말로 사회의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하고, 자본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유연한 사고와 영혼을 파는 것은 다르다

    세계주의에 대한 강조 역시 생뚱맞습니다. 좌파가 WTO에 반대하고, 한미 FTA에 반대한 것은 이 체제가 국제 금융회사들과 거대 자본의 이익을 옹호하고, 사회적인 약자인 노동자와 영세 상인,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세계화가 지구 남반부의 빈곤, 에이즈, 말라리아 같은 질병, 홍수 피해, 물부족, 지구 온난화 등의 문제를 해결합니까? 오히려 그런 문제들을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몰리고 있는 것 아닌지요?

    좌파의 생각이 경직되어 있다면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논쟁을 통해서 사고도 깨게 됩니다. 그러나 유연한 사고가 우파들에게 정신을 팔아 넘기는 실수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한번도 노동자들의 나라였던 적이 없습니다. 항상 친일파의 후손, 부자들, 쿠데타 세력의 나라였습니다. 그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습니다.

    사회가 만든 부는 함께 향유할 수 있어야 하고, 일등만 조명 받는 게 아니라 꼴등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같은 악랄한 경쟁체제는 바꿔야 합니다. 한국은 돈 있으면 한 없이 살기 좋은 나라고, 돈 없으면 서러운 나라입니다. 저는 지금의 한국이 바뀌지 않는다면 남들이 아무리 경탄을 해도 자랑스럽지 못할 겁니다.

    * 이 글의 필자는 유럽에 있는 진보신당 당원이며, 이 글은 진보신당 홈페이지 ‘쟁점과 토론’ 방에도 올라와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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