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민주의가 대안일 수 없는 이유
        2008년 09월 08일 05: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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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대환, 살점을 도려내고 마침내 자신의 뼈와 마주하다

    주대환씨가 ‘전향 주사파’들이 발행하는 <시대정신>에 기고한 글을 안타깝게 읽었다. 글에 대해 굳이 한줄 촌평을 붙이자면…. “진부하다.” 하지만 이 진부함이 안타까움이 되는 것은 이 글에서 무리하게 ‘변절의 악취’를 맡고 비아냥거리는 이들과는 다른 이유에서이다.

    이 안타까움은 소련과 동구의 몰락 이후 20여년 가까이 기획과 전망의 부재 속에서 ‘좌파의 한계’들을 자신의 정치적 육체로부터 깎아내며 살아온, 자신의 살점과 내장을 모조리 도려내는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고서도 끝내 새롭게 도약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구좌파의 뼈대’를 새로운 좌파라고 믿고 있는, 한 큰 선배의 한계와 좌절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다.

    주대환씨는 글의 대부분의 분량을 할애한 민노당과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을 통해 80년대 운동권인 NL/PD라는 ‘구좌파’의 한계를 마침내 스스로에게서 완전히 도려낸 듯 보인다. 하지만 질문은 남는다. “우리에게 구좌파의 한계는 단지 NL과 PD일 뿐인가?”

    실패한 기획과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기획의 창조가 필요하다

    주대환씨의 모습을 처음보았던 것은 91년 경 인민노련이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대중정당운동을 표방했던, 이른바 ‘신노선’을 통해 한국노동당 창당 준비에 들어서며 한 잡지와 인터뷰하며 실렸던 사진을 통해서였다.

    그때 역시도 이에 대해 많은 비판과 비아냥이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은 쉽게 촌평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선의 선회는 주어진 선택지들 중에서 선택한 무엇이 아니라 “더는 이대로 돌파할 수 없는 한계선”과 맞닥드리며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며 좌파에게 남은 기획을 “새로운 기획”이라 믿고 또 다시 헌신해온, 좌파의 총체적 위기와 기획의 빈곤 위에서 싸워온 우리 운동과 우리 자신의 현실적 자화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반성과 전환의 근본적 지반 위로, 살아 숨쉬며 싸우는 계급의 오늘과 그 좌절과 희망의 실질적 모습 위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실패한 기획을 버리고 남은 기획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현재 좌파적 기획 전반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재구성을 노려야만 한다. 따라서 문제는 훨씬 원초적이고 전면적이다.

    소위 ‘좌파적 한계’에 좌파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주대환씨는 글에서 진보신당을 비판하며 사민주의를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격류 속에서 유일한 대안으로 자리잡고 있는 노선”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사민주의는 주대환씨에게 지금껏 살아남은 ‘유일한 좌파적 노선’이고, 그래서 스탈린주의적 잔재인 NL과 PD의 구좌파의 한계를 넘어서고 우리가 도약해야 할 ‘뉴-레프트’의 노선이다.

    하지만 사민주의를 “새로운 노선”이라 부르는 것은 낯설다 못해 엉뚱하다. 이 엉뚱함은 92년 한국노동당을 창당하며 ‘신노선’이라 표방했던, 지금 우리가 구좌파라 부를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인민노련의 엉뚱함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신자유주의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근본적으로 변동하고 있는 자본의 변화 이전의, 구좌파가 싸우며 극복하고자 했던 ‘구자본주의’에 맞추어 기획된 구좌파의 기획들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스스로에게 묻자. “왜 구좌파의 기획들은 실패한 기획들인가?” 첫번째 대답은 간단하다. “구사회주의 국가들이 망해서”다.

    하지만 그 실패는 기획 자체에 근본적으로 내정된 어떤 결함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그 실패는 정치적 과정과 사회적 구성의 매우 역사적이고 실질적 과정에서의 실패일 뿐 운명처럼 주어진, 혹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시스템이 결정론적인 미래를 내정하고 있다가 붕괴로 현실화된 것이 아니다.

    결정론의 함정

    마치 자본주의의 종결이 체제에 내장되어진 운명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첫 번째 대답은 구사회주의권의 실패에 대해 여전히 구좌파적 한계인 ‘결정론의 함정’을 통해 반응하는 가장 구좌파적인 반응일 뿐이다.

    두 번째 대답은 아직 좌파가 공유하지 못한 것으로, 지금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구좌파적 기획의 한계는 지금 우리가 대항하며 싸우는 자본주의가 더이상 구좌파적 기획이 나타났던 그때의 자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좌파의 운명은 이 대답의 선택지 속에서 갈려진다. 좌파의 한계에 대해 첫 번째 대답으로 응해온 이들은 ‘단절’을 통해 혁신을 도모한다. 그리고 그 운명은 이들의 밑천에 좌우된다.

    주대환씨의 글이 실린 <시대정신>의 전향 주사파들은 북조선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실패를 목도하고도 아직도 북조선을 낙원으로 믿는 고집스러운 주사파들보다는 솔직했지만, 그것과의 단절 이후 그들에게는 좌파적 밑천이 남지 않았다. 변절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주대환씨의 경우는 이들보다는 훨씬 풍부한 밑천을 지니고 있다. 아마 ‘구좌파적 기획의 전부’가 그의 밑천이지 싶다. 현실적 한계들과 충돌하며 하나하나 단절하며 남은 밑천들로 싸워왔다. 따라서 그 단절의 과정은 스스로에게 ‘좌파적 기획의 빈곤화 과정’일 수 밖에 없었고, 고통의 과정이었으며,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남은 ‘사민주의의 기획’을 통해 종착점 앞에 섰다.

    상징적 종착점

    주대환씨의 글이 실린 <시대정신>은 진작에 좌절한 구좌파인 전향 주사파들이 만들어가는 잡지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상징적인 종착점이다. 어떻게 안타깝지 않을 수 있으랴….

    두 번째 대답은 아직 어떠한 방향도 보여주지는 못한다. 다만 다음의 질문에 진지하게 응하는 것이다. “자본은 지금 어떻게 운동하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계급은 지금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것은 매우 아카데믹한 이론적 질문인 동시에 구체적인 현실의 운동을 통해 발견해나갈 수 밖에 없는 질문들이다.

    그렇다면 이에 앞서 우리가 마주선 자본의 변화를 우선 이해하고 소위 ‘구좌파의 기획들’이 어떻게 이전의 자본의 운동 속에서 노동계급의 대항 헤게모니로써 구성되어 조응하였으며, 그것이 어떻게 한계에 도달했는지를 우선 확인할 필요가 있다. 주대환씨의 사민주의가 구좌파적 기획의 일부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좌파 – 혁명적 사회주의와 개량적 사민주의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개량적 사민주의 – 근대적 좌파의 형성은 1889년 창립된, 카우츠키의 이론적-정치적 기획 하에 놓여있던 제2인터내셔널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특히 이론적으로 이미 당시 부르주아 이론에 만연해 있던 실증주의적 방법론, 그리고 이와 더불어 진화론을 사회적 발전과정의 기초로 이해한 엥겔스의 <반-듀링론>에 기초함으로써 ‘생산력주의적 역사발전관’, ‘진화주의적 경제적 파국론’에 강력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적 문제는 실재하는 노동자 계급투쟁에 대한 적극적인 결합과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한 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 자체가 무정부적 생산과 과소소비, 노동계급의 절대적 빈곤화와 단일한 계급으로의 확장을 통해 자본 스스로 파국으로 치닫기를 기다리는 ‘대기주의’적 입장으로써 계급투쟁 자체를 봉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문제제기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엥겔스를 거치며 경직되어버린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베른슈타인을 필두로한 ‘수정주의’ 측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개량적 사민주의의 등장을 고찰하면서 그것이 ‘개량주의냐 혁명주의냐’라는 불편한 구좌파적 이분법을 치워두자. 주목해야하는 것은 사민주의의 등장을 마르크스가 작업하던 당시와는 달리 새롭게 변화한 ‘노동과정’과 이를 ‘가치증식과정’ 즉, 잉여노동의 착취과정으로 현상하는 자본 운동의 변화에 대한 좌파의 반응과 기획의 하나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독점과 시장 통제의 가능성

    베른슈타인이 우선 주목한 것은 당시의 독점과 카르텔의 발달이 생산의 무계획적 확장으로 현상되기보다는 생산과정과 시장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독점과 카르텔을 단순히 독점시장가격을 통한 독점이윤의 형성에서가 아니라 이를 노동과정의 측면의 새로운 변화로 이해함으로써 생산의 사회적 통제의 실질적 단위로써 사고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개입을 통해 이들 독점과 카르텔을 조절한다면 자본주의적 시장의 무정부적 성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고, 새롭게 발달하는 은행 및 신용시스템을 국가적 통제를 통해 조절한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한편, 당시 발전해온 노동운동의 성과로써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 합법적인 제도로써 자리잡은 노동조합은 제도적 조건 내부의 투쟁을 통해서 제2인터내셔널이 예견했던 노동계급의 절대적 빈곤화를 막을 수 있고 계급간 적대가 제도적 형태를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조절되는 한, 이에 대한 국가적 개입을 통해 자본의 착취를 통제한다면 자본주의는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로 진화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능케했다.

    결론적으로 사민주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노동과정의 새로운 변화를 본격적으로 좌파적 기획의 전제로 수용하면서 ‘생산의 사회적 통제와 소유의 사회화’라는 좌파 고유의 이상을, 토대-상부구조론에 입각한 경제 결정론적 인식을 넘어 국가와 정치의 통제로부터 역으로 시장과 경제를 재구축하는 과정을 통해 관철시키려했던 20세기 초기 형성된 사회주의 운동의 하나의 기획이라는 점이다.

    반면, 제2인터내셔널과 수정주의 모두와의 동시적 투쟁을 통해 형성된 혁명적 사회주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거쳐 레닌을 통해 구체적인 좌파적 기획의 하나로 등장하게 된다.

    개량적 사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의 동일한 전제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생산력주의적 역사관을 폐기하고 생산력 발전에 대한 계급투쟁의 상대적 자율성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수정주의에 맞서 역사에 대한 노동계급의 혁명적 개입의 의의를 강조하며, 대중의 자생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에 전위의 목적의식적이고 집중적인 지도를 통해 즉각적인 혁명의 가능성을 옹호했다.

    최종적으로 러시아 혁명을 통해 ‘국가소유’를 통한 경제체제를 형성한 혁명적 사회주의의 기획은 제2인터내셔널 뿐 아니라 수정주의와의 동시적 투쟁을 통해 형성되어 갔지만, 이러한 사민주의와 분명한 공통적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노동자에게 노동과정의 기획과 조율을 배제시킨 채 노동자를 생산라인의 일부로 종속시키는 생산의 위계적 구성이 단일 산업을 독점하는 독점의 수평적 확장뿐 아니라, 중화학을 필두로 부품과 원료의 생산에서 최종 생산물까지 단일한 기업에 의해 기획되고 생산되는 독점의 수직적 확장과 국가독점자본의 형성과정을 목도하며 생산 및 소유의 사회적 통제에 대한 새로운 기획을 도출하였다는 점이다.

    즉, 사민주의는 자본의 잉여노동 착취과정의 현상 이면에 놓여 있는 노동과정의 위계적 구성을 목도하며 이러한 위계적 구성에 입각한 기업과 시장에 대한 국가적 개입을 통해 착취과정 자체를 완화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혁명적 사회주의는 이러한 위계 자체를 국가화하고 위계로써 경제를 구축함으로써 시장과 사적소유라는 자본주의적 전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시말해, 개량적 사민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는 그 전략적 특성과 방향에서 명확히 길을 달리했지만, 당시 노동과정의 특성을 자본의 잉여노동의 착취과정이 아닌 사회적 생산과 분배의 과정으로 재구성하려는 동일한 전제 위에 함께 놓여 있었으며, 각자가 발전해 나온 독일과 러시아에서의, 레닌의 표현을 빌면 ‘구체적-정세적 진리’ 속에서 각자의 전략과 기획을 도출했던 것이다.

    사민주의가 우리의 대안일 수 없는 이유

    주대환씨의 글에서는 여전히 소련과 동구의 몰락으로부터 입은 상흔이 역력하다. 좌파적 기획 하나의 역사적 종결과 사멸은 그 기획이 구축한 시스템의 근본적이고 원초적 결함, ‘프로레타리아 독재론’에 기초하며 이 흔적을 지우지못한 NL과 PD는 맹목적이고 낙후한 좌파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자신의 상처를 얼른 잊고자 하는 성급함에 지나지 않는다. 구좌파의 가장 강력한 이념적 혹은 정서적 결점 중 하나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사회가 역사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선 어떤 시스템을 통해 완결적으로 주어진 무엇일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과 관념이다.

    혁명적 사회주의가 기초한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문제는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원초적 결함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계급해방의 지표를 권력의 장악과 동시에 상실했다는 점이었다.

    즉, 구좌파가 당시의 노동과정을 국가를 중심으로 한 위계적 경제과정을 구성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생산의 무계획성과 과소소비의 문제에는 대응한 반면, 당시의 노동과정이 지니고 있던 노동소외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경제와 사회 내에서 무엇을 변화시켜나가고 어떠한 사회시스템으로 새롭게 도약할지에 대한 대안과 투쟁이 부재했다.

    생산수단의 소유를 자본가에게서 국가로 바꾸었다고 해서 기계의 일부로서 생산의 기획과 구상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들 내에서 계속되는 노동-자본 간의 계급투쟁과 자본 간의 경쟁이 새로운 노동과정을 현실화하는 동안 구사회주의국가들은 당과 국가로부터 통제되는 기존의 노동과정에서 한걸음도 더는 발전하지 못했다.

    구좌파적 기획의 두 축

    한편, 구좌파적 기획의 한 축인 사민주의 역시 실패했다. 사민주의가 추구하던 국가의 시장개입과 통제, 계급갈등을 조율하는 국가의 역할,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정부지출을 통한 경기조절, 복지의 확장을 통한 실업과 빈곤에 대한 대처는 단지 사민주의만의 것이 아니었다.

    노동으로부터 노동과정의 기획과 구상을 분리하여 노동과정 자체를 통제하던 자본은 20년대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거친 후 더 이상 순수한 착취체제로써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체제 안정화’의 측면에서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정책과 복지국가의 지향을 통해 자본의 성장과 함께 저실업과 고임금을 현실화하는 ‘계급 간 타협’을 통해 60년대 서구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현실화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기 진정한 승리자는 ‘사민주의’였다.

    하지만 이 역시 구사회주의권 국가가 자신의 체제를 통해 당시의 노동과정이 지니고 있던 노동소외의 문제와 계급해방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노동하는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퇴근 후 노동자를 벗어나 ‘소비자’로써, 생산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해야만 했다. 따라서 더욱 그 긴장이 강화될 수 밖에 없는 노동시간과 임금에 기반한 노-자 갈등의 체제적 특징은 지속적으로 자본의 이윤율을 압박하면서 기술적 환경의 변화 위에서 새로운 노동과정의 형성을 촉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과정을 새로운 착취체제로 정비하면서 자본은 마침내 ‘계급 간 타협’이라는 이전 시기의 체제 안정화의 기획을 던져버리고 이 타협을 일방적으로 파기한체 새로운 착취체제로 이행,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현실화했다.

    즉, 사민주의적 이상의 종결과 실패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현실적으로 증명되고있다. 주대환씨가 그토록 부러워마지않는 집권 영국 노동당은 지금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가치를 통해 어떠한 계급해방의 이상을 품고 있는가?

    그 집권은 오히려 자신의 가치와 그것의 실현을 위한 수단 모두의 포기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노동착취의 실질적 복무자로써 전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영국 노동당의 모습은 몰락한 소련 공산당의 모습보다 과연 덜 비참하고 덜 초라한 것인가?

    새로운 좌파적 기획을 향하여

    좌파는 이제 자신의 선조들의 실패로부터 자유로와야만 한다. 구사회주의 국가의 실패는 단순히 자본주의와의 체제 간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그 국가들이 기초했던 혁명적 사회주의의 이상의 좌절과 함께 사민주의도, 이 모든 좌파적 기획이 기초했던 노동과정 위에서 착취와 번영을 동시에 추구했던 자본도 모두 함께 패배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과 노동, 그 모든 계급은 이제 새로운 역사의 무대로 전장을 옮겼다. 그리고 이 무대 위에서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자본이었다.

    자본은 노동의 구상과 실행의 분리, 대량생산 시스템에 기초한 기존의 노동과정이 느린 상품주기를 통해 새로운 소비를 자극하고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을 간파했다. 특히 국가적 개입과 조율을 통해 주어진 노동시간-임금에 기초한 노동과의 대립이 위기에 처한 자신의 이윤율을 회복시키는데 가장 껄끄러운 방해물이었다.

    자본은 새로운 기술적 조건에 기초한 새로운 노동과정으로의 혁신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자 했는데, 다른 생산품으로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생산라인의 끊임없는 유동적 변화와 자본의 빠른 이동에 기초해 상품생산주기를 빠르게 갱신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의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철폐하고 노동계급이 이러한 빠른 변화를 실현하고 따라갈 수 있도록 노동의 구상과 실행을 결합한 채 끊임없이 새로운 노동과 새로운 노동 환경 속으로 노동계급을 내몰았다.

    그러나 이 과정이 노동계급에게 노동과정의 통제권을 양도해주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노동과정의 결합은 매우 임시적이고 단기적이어야 하며, 생산과정 간의 연계는 이제 시장도, 기업 내의 위계도 아닌 네트워크를 통해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

    좌파의 새로운 기획

    그리고 이러한 네트워크적 특성 위에서 잉여노동의 착취는 이제 임금노동자를 넘어 사회일반의 모든 인간으로부터 현실화시키고 있다. 지금 노동계급이 처한 고용불안 및 비정규직 문제, 빈부격차의 문제 등 당면 노동계급의 모든 문제는 자본이 새로운 노동과정을 새로운 잉여가치의 형성과정으로 현상하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의 계급적대의 새로운 측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노동조건, 새로운 착취조건에 맞서는 좌파적 기획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것을 사민주의라 믿는 것은 여전히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현재의 자본과 대항하는 올바른 기획이라 믿는 것 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고 어리석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개량적 사민주의 모두는 이전 자본이 위치해 있던 이전의 노동과정 위에서 수립된 ‘구좌파적 기획’의 두 축이기 때문이다.

    좌파는 이제 새로운 기획을 도출할 것을 역사로부터 강력히 요청받고 있다. 그리고 이 요구에 응하기 위해 우리는 자본에 대한 저항과 적대 이외의 우리 자신의 모든 가치를 의심해보아야만 한다. 현재의 계급적대와 투쟁을 통해 기획과 전망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가치로 숭배되는 모든 좌파적 가치들을 의심하고 경계하며 이것들과 투쟁해야 한다.

    그것은 비단 프로레타리아 독재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과 저항의 전략적 기획들로부터 유리된 민주주의, 복지국가의 박제화된 사민주의적 가치들 역시도 이에 포함된다. 따라서 새로운 계급적대와 투쟁 위에 발딛지 못한 NL과 PD의 낡은 관념에 대한 주대환씨의 비판은 충분히 경청해야 하지만, 그 모든 비판은 바로 주대환씨 그 자신에게 역시 반사되어 투영되어야만 함을 주대환씨 스스로 발견할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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