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야, 유치찬란한 짓만은 하지 말아라”
        2008년 09월 03일 01:18 오후

    Print Friendly

    1.

    잘 지내시는가? 지난 20년간 하던 반말을, 아무래도 어색한 ‘하게’체로 바꿔 쓰는 건 물론 독자들 때문이네. 우린 참 오랫동안 친구였지. 특히 우리가 88년 학술운동의 흐름을 타고 한국사회과학연구소를 만들어 돌아가면서 연구국장을 했던 20대말에서 30대 초까지는 거의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것도 모자랄 정도였지.

    박현채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술에 파묻혀 지내던 나는 외국으로 떠돌았고 그 새 자넨 부산 한 대학교의 교수가 됐지. 그야말로 요동쳤던 우리 역사는 40대 초반의 나를 청와대 비서관으로, 그리고 자넬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네.

    몇 년을 못 만났을까, ‘창비’의 백낙청 선생 주선으로 동아시아 관련 좌담회에서 우린 다시 조우했지. 그 때만 해도 난 자네가 오직 부산의 지역색 때문에 한나라당에 몸을 담았을 뿐, 자네 말대로 "이 땅에 한 번도 존재해 본 적이 없는 합리적인 보수"를 만드는 데 일조할 거라고 믿었네.

    그리고 또 다시 몇 년이 흘렀고 이번엔 자네가 청와대에 들어갔지. ‘억수로’ 비가 와도 좀처럼 촛불이 꺼지지 않던 어느 일요일, 우린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났네. 매일 밤 마이크를 들고 촛불을 쫓아다니던 나에게서 자넨 촛불의 정체를 캐내려 했고 난 도대체 청와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를 따져 물었네.

    어느새 뼛속까지 조선맨이 되어버린 과거의 운동권 이론가를 만났을 때, 그 허탈했던 기억이 되살아난 나는 단 한 가지 주문만 했네. "제발 유치한 짓만은 하지 말라"고. 기억나는가?

    2.

    MBC PD수첩이 뭘 그리 사태를 왜곡했나? 인류가 소를 키우기 시작한 이래 늘상 존재했던 "주저앉는 소"가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관찰과 규제의 대상에 오른 건 오로지 광우병 때문이라네.

    “몰랐다는 핑계는 이제 그만”

    생방송에서 MC가 저지른 단 한 번의 말실수가 저 거대한 촛불의 바다를 조작해 냈다고, 우리 국민이 그 프로그램 하나에 속아 넘어가 아직도 촛불을 끄지 못한다고,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가? 자넨 그 때 뭐라고 했나? 검찰이 하는 일이라 어찌 할 수 없다고 대답했네. 정말 그런가? 일요일까지 근무하면서 청와대는 도대체 뭘 하는 건가?

    감사원까지 동원해 KBS 적자를 부풀린 것도, 임기가 남은 정연주 사장을 검찰이 강제 구인한 것도 몰랐다고 말할 텐가? 검찰이 미국의 판례까지 왜곡해 가면서 조중동 광고주에게 전화를 건 네티즌들을 구속한 것도 물론 몰랐겠지.

    YTN에서 MBC, KBS에 이르기까지 기자와 피디들이 뿌리는 눈물이, 한 때 기자였고 부산에선 방송 진행도 했던 자네에겐 한낱 철부지들의 떼로 보이고 있는 건 아닌가? 아…, 최근에 오세철 교수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려 했던 일까지 입에 담고 싶지는 않네. 정말 유치찬란하지 않은가?

    3.

    이틀 전 기획재정부의 세제개편안은 강부자 내각이 진면목을 보인 일대 쾌거였네. 그래서 개편이 아니라 개혁이라며 의기양양한 거겠지. 2012년이 되면 무려 21조 3천억 원이라네, 자네들 정부 5년 동안 무려 75조 원의 세금을 줄여주는 용단을 내렸더구만.

    한나라당의 요청으로 1년 후부터는 매년 8조 7천억 원 가량 법인세를 깎아 주는데 이 혜택의 3/4은 0.8%의 대기업에 집중되고, 앞으로 4년간 16조 6천억 원의 소득세를 깎아 준다는데 4인 가구를 기준으로 할 때 연 소득 1억원 이 넘는 부자는 99만 원, 2천만 원의 서민은 고작 4만 원의 혜택을 보는 식이더군.

    현금을 무더기로 쌓아 놓고 있으면서도(567개 상장기업의 상반기 말 현금성 자산 64조 3500여 억 원) 투자를 하지 않는 0.8%의 대기업이 그 위에 돈을 더 얹어 준다고 해서 갑자기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리라고 정말 믿는가?

    “부자는 99만 원, 서민은 4만 원”

    매년 100만 원 이상 소득이 늘어난 부자들은 어떤 소비를 할까? 자네 주위에 이른바 ‘강부자’가 많으니 가만히 귀기울여 보게. 혹시 연휴에 외국 가서 골프칠 계획에 들떠 있지는 않은지, 원화 가치가 폭락해서 외국에 간 애들에게 보낼 돈이 많이 든다고 투덜대지는 않는지, 그 분들 양복이나 넥타이가 외제라서 명품을 사는 족족 국민소득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건 아닌지.

    그런데도 이번 감세 조치로 과연 국내의 소비가 활활 타오르리라 생각하나?

    그제 강만수 장관이 하는 말을 들으니 정말 기가 차더군. 28년 전 수염자국 새파란 젊은 경제학자가 식당 냅킨에 그렸다는 래퍼곡선(세율을 낮춰 감세를 하더라도 소득이 왕창 늘어서 다음 기에는 오히려 세수가 늘어난다)을 그대로 읊조리더군. 이미 말했듯이 투자도 늘지 않고 소비도 외국으로 빠져 나가는데 어떻게 국민소득이 늘어서 세수가 증대되는 행복한 상황이 올까?

    다른 나라에 견줘 이제 겨우 구색을 맞춘 사회복지비, 또는 다른 재정 지출을 앞으로 5년 동안 70조 원 이상 줄이지 않는다면 자넨 한국경제 사상 최초로 ‘재정적자에 의한 위기’를 목도하는 비서관이 될 걸세.

    물론 이에 대한 답도 준비돼 있을 걸세. 바로 자네들의 공기업 선진화가 그 답이지. 철도나 전기, 수도, 우편 같은 어마어마한 망산업을 팔거나 위탁하면 자네들이 저질러 놓은 재정적자는 갚을 수 있겠지. 물론 보편적 공공 서비스는 사라지네만.

    당장 물가가 급등해서 아우성치는 서민들은 또 어찌 할 텐가. 외국에서 비롯된 일이라 할 수 없다고? 천만에. 다른 나라 돈이 다 달러에 대해서 절상되는데, 원화만 절하되어야 한다고 떠들어서 환율이 상승하도록 만들고, 세계 경제침체가 깊어 오히려 달러가 절상되는 시점에는 시장개입을 해서 40조원이나 날린 자네의 동료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네.

    다 지나고 나서 한 마디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난 자네가 인수위에서 밤을 샐 때 환율 때문에라도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글을 썼다네.

    4.

    자네 책임이랄 수 없는 경제문제를 구구절절 얘기한 이유는, 청와대 비서관은 결국 대통령이 한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네.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언론 통제나 인권유린 같은 민주주의의 훼손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해 보여서 굳이 하는 말이라네. 아니 오히려 언론과 인권을 잡아서 성장정책을 시행하는 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고 있는 건 아닌가?

    천만의 말씀이네. 앞에 얘기했듯 박정희식 수출지상주의, 부동산 경기진작은 이제 통하지 않네. 다만 버블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꺼질 뿐이지. 더구나 세계의 금융이 다 연결돼 있는 상태에서 박정희식 정책은 여차하면 외환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네.

    “한국의 괴벨스가 될 텐가, 친구야”

    안 됐지만 ‘경제성장 없는 박정희’, ‘위기를 자초한 히틀러’가 자네 대통령의 미래 모습이라네. 그리고 이 정부가 지금까지 한국 언론을 피투성이로 만든 것만으로도 자넨 한국의 괴벨스란 소릴 들을 수밖에 없다네. 정녕 그렇게 되길 원하는가?

    내 말이 미덥지 않다면 언제나 온화한 정건화 교수나 동서고금을 꿰뚫고 있는 조석곤 교수에게 자문을 구해 보게나. 자네 주위에 있는 경제전문가란 사람들은 거의 30년이 되어 이미 파탄난 시장만능의 주문만 열심히 외고 있거나, 아니면 통계를 조각내고 이어 붙여서 국민들을 속이는(박재완수석) 일에 열중하고 있으니 그들의 말은 무시하기 바라네.

    자네 홀로 청와대를 바꿀 수는 없을 걸세. 내 경험으로 봐서 그건 불가능하네. 대통령의 신뢰를 끝까지 잃지 않았던 이정우 선생도 할 수 없었던 일일세. 어찌 할 텐가. 내 20년 된 친구여.

    * 이 글은 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의 전문입니다.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에 함께 실립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