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구 사민주의자들은 주대환 같지 않았다"
        2008년 09월 03일 09: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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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 (사진=레디앙)

    어제 밤에 서부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인 Rosendal 에서의 국제 선불교 학회를 마치고 드디어 인터넷이나 할 수 있는 오슬로에 돌아왔습니다. 사실, 이번에는 제가 노르웨이의 서부 바닷가까지 버스로 가느라고 노르웨이 내륙 지방들을 이렇게 여행한 것은 아주 처음입니다.

    여태까지 글 쓰느라고 그것도 못했습니다. 자연도 아름답지만 당장 놀라운 것은 아무리 바닷가의 자그마한 마을이라 해도 생활 수준은 오슬로보다 높으면 높지 전혀 낮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구가 천 명도 안되는 곳인데도 제 이빨을 훌륭하게 고쳐준 치과 의사 3명이 있는데다 은행 두 군데와 꽤 괜찮은 서점, 그리고 복지 사무서 등이 다 있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제가 익히 아는 한국 바닷가 마을들의 모습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그 쪽을 배회하노라 눈물이 날 만큼 억울했습니다.

    국가적 재분배 정책만 잘 하면 이 정도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우리가 자꾸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기에 억울할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볼 수 없었던 <레디앙>을 오래간만에 보니 참 아쉬운 소식이 보이네요. (관련기사 바로가기).

    주대환님의 아쉽고 위험한 소식

    제 처향이기도 한 마산에서도 활동한 것으로 기억되어지는 주대환 님이라는 분은 <시대정신>이라는 보수 잡지에서 글을 실어 “이제 좌파는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독립운동 시절부터의 광범한 합의를 할 수 있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등한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 건국된 위대한 나라다. 결코 세계에서 뒤떨어졌다고 볼 수 없는 보통선거권을 실시한 현대 민주주의 국가였다."라고 하며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를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며 민주주의를 우리의 이상 실현의 유일한 길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김일성이나 박헌영의 전통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여운향과 조봉암의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일단 제가 그 논문의 원문을 못 읽었으니 제 평론을 순전히 <레디앙>의 기사에서 인용된 몇 개의 주장에 의해서 썼다는 것부터 밝혀두고자 하는데, 제 짧은 생각으로는 주대환 님은 참 위험한 길로 돌아서신 듯합니다.

    그 분께서 자신의 목표로 "유럽식 사민주의"를 말씀하시지만, "대한민국을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다가는 그 결과물도 못 거두고 부르주아 정치의 주변에서 들러리노릇만 하다가 쓸쓸하게 퇴장되시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저도 주대환 님처럼 사회주의자들이 현실 정치에서 참여하면서 현실적 대안들을 부단히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단 혁명적 상황이 조성되지 않는 현재와 같은 형세에서 제도정치의 영역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고 인식합니다.

    그리고 극도로 억압적이며 배타적인 북한형 개발독재를, 당연히 우리가 박정희주의를 비판하는 만큼이나 – 비판해야 한다고 보지요. 그런데 현실 정치를 하자면 일단 현실을 현실대로 직시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쉽게도 대한민국에서는 "가슴을 열고 받아들일" 만한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오세철을 잡아가두는 대한민국

    주대환 님께서 오세철 교수를 모르실 리도 없는데, 오세철 교수가 국보법에 "걸린" 걸 보시면서 과연 감회가 어떠셨는지요? 물론 이번에는 사법부부터 나서서 공안꾼들의 망동을 어느 정도 막아냈지만, 분명한 반북한 입장을 표명하면서 유럽의 급진 좌파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노동자주의적 활동을 하는 준법적 시민이 공안들의 부단한 감시를 받아야 되고 언제든지 신변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것은 일단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게 "민주주의"라면 아마도 유럽식과 좌파를 구속, 구타, 탄압하는 터키식 사이의 그 어느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 변종일 듯합니다. 참, 터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불인정하고 감옥에 보내고 전과자로 만들고 평생 이등 시민으로 만드는 "민주주의 국가"들은 터키와 싱가포르,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정도입니다.

    그런 것까지 다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시게요? 특정 매체를 겨냥하는 불매 운동을 전개하는 누리꾼들이 사법 처리되는 것까지 "받아들이"실 생각인지 알고 싶기도 합니다. 물론, 제가 대한민국을 "제2 싱가포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제2 싱가포르"였다면 저 같은 인간은 벌써 국적 박탈을 당하고 지도자 명예 훼손 소송으로 큰 고생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싸움터"인 셈이지요. 오세철 교수와 같은 좌파 뿐만 아니고 마광수 교수와 같은 에로틱 작가, 그리고 무수한 촛불집회 누리꾼 활동가 등등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의 "진정성"을 띠게끔 큰 희생을 치르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꽤나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체제를 압박하는 이와 같은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가 "제2싱가포르"로 전락되는 게 시간 문제이었을 것이고요. 주대환 님께서 그걸 모르실 리가 없는데, "대한민국 찬양"하시는 걸 보니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주대환 님께서 말씀하시는 "유럽식 사민주의"는, 기륭전자의 여성 노동자들이 50일 넘게 굶어도 정당한 요구의 관철을 쟁취하지 못하는 이 "세계 유례 없는 평등한 사회 경제적 토양" (주 님의 말씀임) 위에 세워졌다는 위대한 대한민국보다는 "차악" (?)임에야 틀림없지요.

    그런데 노르웨이의 노동당이나 스웨덴의 사민당은, 과연 저들의 지배자들을 찬양하면서 무상 교육과 의료 등의 엄청난 양보를 따낸 건가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북구 사민주의자들은 주대환 같지 않았다

    북구의 부르주아들이 대중의 급진화라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보다 온건한 사민주의자들과의 "동상이몽적 동맹"을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주의자들과 경쟁해야 했던 1930~40년대의 북구 사민주의자들은 주대환 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운형이나 조봉암보다 훨씬 급진적이었지요.

    노르웨이 노동당의 당원들 같으면, 1945년 이전까지는 아예 국기를 게양하지 않았으며 국헌절 (5월 17일)을 쇠지도 않았습니다. 대신에 5월1일 노동절을 쇠고 부르주아 주류와 "정체성이 다르다"는 걸 늘 강조했지요. 노르웨이가 독일 점령기를 거친 뒤에는 바꾸긴 했지만 노르웨이 노동당의 왼쪽 흐름은 소련의 독재가 싫었을 뿐이지 원칙을 따지자면 차라리 공산당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 이념적 후손들은 1970년대에 노동당을 탈퇴하고 "반미반소, 사회주의 건설"를 외치면서 사회주의 좌파당을 건당하기도 했지요. 이 정도의 왼쪽으로부터의 압력이 있었기에 북구의 지배층이 불가피하게 양보를 해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복지 시스템의 건설에 동의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주류에 위험한, 불온한 흐름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복지 국가라는 "중간 지점"에 올 리가 없는 것이지요.

    실제로 타결될 가격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을 먼저 부르는 게 흥정의 원칙이 아닌가요? 그런데 "지배자들에 대한 압박"을 포기하고 저들의 국가를 찬양하기부터 시작한다면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조선일보>와의 개인적 관계만들기 정도일 걸요?

    하여간 민주주의는 "국민적 화합과 단결"로 발전되는 게 아니고 갈등과 저항으로 발전되는 게 원칙입니다. 그 갈등이라는 과정을 처음부터 비껴가고 "나는 순량한 국민이오, 대한민국 만세!"라고 선언한다면 이건 민주주의 발전에 무용지물일 것입니다.

    참, 인간이란 신기한 동물입니다. 왜 꼭 다수의 무리들과 스스로 같아지기를 이렇게 갈망하고, 자신의 다름을 이렇게 두려워하는가요? 저 같으면, 非국민, 反국민의 길을 탐구하는 게 개인적으로라도 훨씬 흥미로운 일로 보이기만 합니다….

    * 이 글은 ‘박노자 글방’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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