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 눈물이 흘러내렸다
    2008년 08월 28일 02:22 오후

Print Friendly

TV 드라마를 보다 울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네 멋대로 해라> 이후에 생각이 잘 안 난다. 그 사이에도 뭔가 있긴 있었을 텐데…. 아무튼 요사이 재밌는 드라마는 간간이 있었어도 그 이상 가슴을 치는 드라마는 없었다.

   
  ▲ MBC 드라마 <에덴의 동쪽> 중에서
 

MBC 월화 미니시리즈 <에덴의 동쪽>이 시작됐다. 대작이라고 소문도 많았고, 시작할 때의 편성도 변칙적인 특별 대우였다. 스페셜 방송을 먼저 내보냈다. 기분이 나빴다. 얼마나 대단한 분이 납시길래 이렇게 유난을 떠나.

약간은 냉소적인 마음으로 <에덴의 동쪽> 1, 2회를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빠져버리고 말았다. 탄광 노조위원장인 이종원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 부인인 이미숙이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선 정말 오랜만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난 영화를 볼 때는 영화만 보지만, TV 프로그램을 볼 때는 다른 일을 병행하며 곁눈질로 보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부터는 ‘멀티태스킹 모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정서가 격동돼 두뇌 프로세서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장면 이후론 온전히 드라마만 봤다. 그렇게 <에덴의 동쪽> 1, 2회가 끝났다.

아픈 노동의 역사, 그 시절의 기억

이야기가 완결적이어서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1차 아역도 1, 2회에서 끝나고 3회부터는 2차 아역으로 바뀐다. 아역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대작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모래시계>는 아역 때부터 심상치 않더니 성인 이야기로 진입한 후 폭풍이 되었다. <백야 3.98>이나 <이산>은 아역 때의 기대를 성인 이후에 살리지 못했었다. <왕과 나>는 아역 때만 재밌었다. 1, 2회 도입부의 완성도가 앞으로의 재미를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1, 2회만 놓고 보면 대단히 성공적이다. 정말 오랜만에 묵직한 드라마였다. 현대물 대작엔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조금씩 섞는다. 한국인은 굴곡 많은 역사, 한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픈 상처의 어느 한 지점을 건드리면 국민적 흥행이 터진다. <모래시계>, <실미도>, <웰컴 투 동막골>,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 <쉬리> 등 신화적 흥행물들은 대부분 역사의 상처를 건드린 작품들이었다.

   
 

그것을 기계적으로, 도식적으로 섞어대기만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작품 속에서 생생히 표현되며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 역사적 아픔이 담긴 서사적 상황이, 주인공의 사적인 아픔이라는 서정적 차원과 화학적으로 결합할 때 작품이 생동한다. <에덴의 동쪽> 1, 2회가 그랬다.

1, 2회의 배경은 탄광촌이다. 탄광은 과거 한국의 ‘공안’과 관계된 부문이었다. 우리나라엔 연료가 없다. 나무를 태웠는데 해방 후 나무를 더 태울 수 없을 만큼 국토가 헐벗었다. 석유를 마음 놓고 사올 돈도 없었다. 그때 한반도 지하에 있는 석탄으로 연탄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전 국민의 난방 안위가 석탄에 걸렸다. 그래서 광업은 국가전략산업이 됐다. 지금은 ‘광공업’이라는 말을 안 쓰지만 과거엔 ‘광업’이 ‘공업’ 앞에 붙었었다.

석탄을 효율적으로 캐내 저렴하게 공급하면 두 부문이 이익을 본다. 바로 업주와 소비자다. 대신에 노동자, 즉 광부는 살인적인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구조가 한국 개발 시기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한국인에겐 이런 상황이 너무나 익숙하다.

그땐 전 국민이 노동자들이 감내하는 살인적인 고통을 무시했다. 한국이 최초의 자본을 끌어 모을 때 각성제를 먹어가며 노동했던 것은 어린 여성들이었다. 그 자본으로 중화학공업을 시작할 때는 남성들이 노동했다. 모두들 처절하게 일했다. 이것이 60년대와 70년대의 역사인데 이 기간 동안 국민의 저렴한 난방을 받쳐준 것이 석탄이다. 광부는 쉴 수 없었다.

70년대에 터진 오일쇼크는 우리나라에게 있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그때 한국의 건설사와 노동자들이 중동에 가서 달러를 벌어와 위기를 넘겼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 회장이 담소를 나누며, 세계 유수의 건설사들에 비해 후진국인 한국 건설사의 경영진이 경쟁력이 떨어지므로, 중동 진출의 일등공신은 근면성실한 우리 노동자들이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이것이 우리 노동자들과 서민의 삶이었다.

그 현대건설의 소장 출신인 분이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다. <에덴의 동쪽>에서 주인공 아버지인 탄광 노조위원장이 상대하는 악역도 기업 오너가 아닌 소장이다. 묘하게 겹친다. 자본가보다 더 자본의 이해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소장. 드라마에서 소장이 하는 일은 노동을 억압해 효율적 산출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파업을 막기 위해 폭력도 불사한다.

이미숙의 폭발적 열연

우리 국민은 과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물론 하나하나 세세히는 몰랐지만 노동자나 노조가 살인적인 탄압을 받는다는 것은 모두들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묵인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것이 모두에게 상처가 되었다.

또, 노동의 처지가 그랬다는 것은 결국 서민의 처지도 그랬다는 얘기다. 한국인은 고통스럽고 한 맺힌 한 세월을 살았다. 묵인한 방조자로서, 동시에 고통을 겪은 서민 당사자로서, 모두가 가슴 속에 상처를 갖고 있다.

<에덴의 동쪽>은 그런 상처를 건드렸다. 딱지가 다 말라 이젠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지만 막상 떼어내면 그 속엔 여전히 벌건 생채기가 있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상처이기도 하고, 이명박 정부가 상기시켜주는 현실이기도 하다. 극 중에서 노동자를 위했던 주인공의 아버지는 비명에 갔고, 최근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며 모임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잡혀갔다. 상처가 나아지기는커녕 더 생생해지고 있다.

아무리 한민족이 공명할 수 있는 역사라도 기계적으로 나열하기만 하면 드라마의 감동은 없다.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 드라마는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을 생생히 배치했다. 그 중에서 이미숙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이미숙의 캐릭터는 매우 전형적이다. 잘못하면 도식적으로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숙의 ‘본좌급’ 연기가 그 인물을 생생히 살려내, 시청자에게 절절한 아픔을 느끼게 했다. 이미숙은 과거에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서도 기억에 남을 연기를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더욱 폭발적이었다.

노조위원장이 ‘학출’의 고뇌하는 캐릭터라면 이미숙이야말로 한국의 전형적인 민초다. 없어서 한 맺히고, 무식해서 한 맺힌. 자격지심 때문에 노조위원장에게 당당히 고백도 못했던 상처. 이미숙이 구현하는 인물엔 한국인의 보편적인 기억과 아픔이 녹아있다. 배우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면 도식적으로 빠지는 것이고, 그것을 소화해서 표현해내면 보는 이를 격동에 빠지게 한다. 이미숙이 그랬다.

오랜만에 TV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에덴의 동쪽>이 지금의 분위기를 발전시켜 제 2의 <모래시계>가 되길 바란다. 알콩달콩 재밌는 드라마들은 많이 봤으니 이제 묵직한 작품이 하나 나올 때도 됐다. <에덴의 동쪽> 탄광 목욕실에서 울려 퍼지던 ‘광부아리랑’의 울림. 그런 ‘힘’만 계속 이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