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직한 '자주성'은 무엇일까?
        2008년 08월 24일 06: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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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환절기로 인한 독감과 싸워가면서 한 가지 부분을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소위 ‘운동판’에서 ‘자주파’, 즉 좌파 민족주의자들이 계속 우월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가 자주성 담론을 잘 전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자주파가 우월적 힘을 얻는 비결

    북-미 대결에서 미국을 악마로, 북한을 천사로 각각 보는 일부 골수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세계관이나, ‘북핵은 민족 방위용’과 같은, 군사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겨지는 담론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민족의 자주성/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면 수긍할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박노자(사진=레디앙)
     

    저만 해도 어느 선까지는 (민족 등의 수식어를 빼고 ‘시민’이라고 대체되면)수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주적인 지배계급’이 된다고 하여 지배계급으로서의 착취적 본질 그 자체가 달라질 일은 없지만, 한국 지배자들의 매판적 기질이란 정말이지 역겨울 정도입니다.

    예컨대 국내인 교수들에게까지도 국내인 학생에게 "영어로 강의하라"고 강요하는 한국의 명문 – 국제적으로는 아니지만 – 대학과, "학술 언어로서의 노르웨이어를 살리는 것은 대학의 일차적 책임"이라고 하여 영어가 아닌 노르웨이어로 교과서 등을 제작하면 출판 보조비를 후하게 주겠다는 노르웨이 정부의 최근의 ‘언어와 의미’라는 훈령을 비교해보시지요.

    노르웨이의 인구는 한국의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것, 즉 학술 언어로서의 노르웨이어의 위치가 부득이하게 한국어보다 미약하다는 것까지 고려해서 말씀입니다.

    우리가 경쟁 사회라서 그런가요? 한국의 지배자들이 미국의 모든 것에 대한 과잉 충성을 거의 앞을 다투어서 과시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지배계급의 기괴성

    그리고 미국과의 후견인/피후견인으로서의 관계가 끊어져 동아시아라는 지역에서 중, 일, 북과의 관계를 자력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 언젠가 어차피 닥쳐올 – 상황을 대단히 공포스럽게 여겨, 이미 한국에서 빠져나가도 큰 일이 나지 않을 주한 미군을 무조건 붙잡는 것이 아닙니까?

    근대 국가 운영의 경험이 짧아 아직도 자신이 안 생기는 형편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배계급이 ‘자주화’되어 외국 군대가 한반도 남반부를 빠져나간다 해도 과연 당장에 만사형통이 될까요? 세계 각지에서 ‘자주’를 잘 하는 국가들, 즉 미국이나 유럽의 과거 식민 모국들의 후견을 받지 않는 나라들을 한 번 대략적으로 범주별로 분류하여 한국으로서 바람직한 모델이 어디일는지 생각해봅시다.

    1. ‘주니어’ 제국들로 유럽의 과거 열강들(대표적으로 프랑스)이나 유라시아, 남미의 대규모의 영토적 강국들(중국, 러시아, 이란, 브라질 등)

    2. ‘주니어’ 제국들의 지원, 혹은 간접적 지배를 받는 각종 주변부적 독재 국가들(북한, 버마,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3. 좌파적 지식인들이 이끄는 혁명 운동이 일국화되는 관계로 부득이하게 ‘주니어’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되는 경우(쿠바)나, 좌파 혁명적 정권임에도 지정학적, 전략적 이유로 ‘주니어’ 제국들과 공생관계를 맺는 경우(베네수엘라).

    4. 매우 강력한 군수 사업과 징병제 군대를 보유하면서 자력으로 영세중립을 지키는 강소국(스위스, 스웨덴).

    5. 군사력은 비교적으로 약하지만 인접 강대국과의 일정수준의 공생 관계를 맺어 명목상 영세중립을 지키는 소국들(아일랜드, 핀란드).

    한국과 영세중립국

    대체로 위와 같습니다. 그러면, 한국으로서 어느 모델이 맞을까요? 두번째가 되기에는 이미 대외지향적 경제와 제도적 민주주의가 너무 많이 발달된 것이고, 첫번째가 되자면 예컨대 북한과 만주를 침략, 정벌하여 스스로 "제국화"해야 할 것입니다.

    <고주몽>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많지만 그들에게 "총들고 만주 벌판을 점령하러 나가라" 하면 갈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이것도 틀린 것이지요.

    세번째가 되기에는 한국 좌파 세력들은 아직도 사회적 기반이 미약하죠. 친미적 성격의 군부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고요. 설령 진보신당이 집권한다 해도, 미군 철수의 구체적인 시간표를 정해 미국과의 ‘합의 이혼’을 할 수 있어도 제2 베네수엘라 되기에는 역부족할 듯합니다.

    다섯번째는 현실성이 없지 않지만 핀란드가 러시아와 맺어온 관계를 우리가 중국과 맺기에는 역사적 불신의 골은 너무 깊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네번째일 것입니다. 그런데, 스웨덴의 영세중립이란 대외 정치적 이념은 19세기 초반 이후부터, 즉 나폴레옹 전쟁 이후부터 점차 형성돼 온 것인데, 한국으로서도 마찬가지로 미국과의 ‘합의 이혼’하고 중-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중립적 세력이 되는 것은 상당히 긴 시일을 요할 것입니다. 또 상당한 비전과 용기도 필요할 것이고요.

    중립화를 통한 자주화와 통일문제

    그리고 스웨덴은 전투기까지 잘 만드는 군수산업의 대국이라는 점이 잘 알려져 있는데, 한국의 영세중립도 아마도 그러한 부분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즉, 영세중립화를 통한 자주화는 아마도 바람직하다고 봐야 하지만, 결코 가기 쉬운 길은 아니고, 또 평화주의적 길이라고 말하기에도 양심이 걸리죠.

    무기 장사를 세계적으로 해대는 수웨단은 무슨 ‘평화의 나라’입니까? 결국 스웨덴의 길이란 차악일는지 몰라도 이상화시킬 필요는 없지요.

    이와 같은 ‘중립화를 통한 자주화’와 통일 문제의 관계가 어떤가요? 좌파 민족주의자와 달리, 저는 합리적인 속도로 진행되는 미국과의 ‘합의 이혼’과 북한과의 적당한 수위까지의 ‘가까워지기’는 어느 정도 동시적으로 병행되는 게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한미 동맹이 남아 있는 한 남북한의 ‘가까워지기’는 중국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는데, 남한이 어느 정도 자주화되면 중국의 양해를 얻으면서 북한과의 ‘조건부 동거’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반도 미래 시나리오 치고는 이게 제일 낙관적인 것 같아요.

    문제는, 한국 지배층의 정신 상태로 봐서는, 미국에서 부부 관계 유지 비용이 떨어져 먼저 "이혼하자" 해도 계속 울면서 그 바지 가랑이를 붙잡을 것 같다는 점입니다. 

    * 이 글은 ‘박노자 글방’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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