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조 병들어 있는 것 아닌가”
        2008년 08월 12일 01: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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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경동 시인

    단식 60일을 넘기면서 기륭투쟁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 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계속되는 폭염과 최장기 단식으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송경동 시인은 기륭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려내고, 시민사회종교단체까지 지지, 지원을 이끌어냈으며, 지지를 넘어 온 몸으로 연대를 실현해왔던 ‘기륭공대위’의 집행위원장이다. 그는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에 늘 함께 해왔다.

    박노해와 송경동

    2006년 4월 시청에서 열린 허세욱 열사 장례식 때 낭독된 ‘별나라로 가신 택시운전사께’라는 시에서 “우리도 당신을 죽였다. 진정한 민중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면서도 무능한 우리의 운동이 당신을 죽였다”고 울부짖으며 많은 노동운동가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금속노조의 한 간부는 “1990년대 박노해가 있었다면 지금은 송경동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터뷰를 계속 고사했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투쟁하고 계신 활동가들에게 감히 얘기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 기륭에 언제 처음으로 결합했나?

    = 2004년 기륭 투쟁 초기부터 계속 다녔지만 이렇게 중요한 역할까지 맡아서 활동한 건 올해 3월 중하순 경이다. 지난 겨울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였을 때 ‘고공농성 100일 문화제’ 때 방문했는데 공식적인 문화제는 그 때가 처음이라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었다.

    그 뒤 뉴코아 300일 문화제 때 시낭송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앞으로 구체적으로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침 지역에서 기륭 투쟁이 1000일이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1000일에 맞춰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연대가 필요한 것 아닌가 싶었고, 1000일 투쟁 기획단을 구성하는 과정부터 함께 하게 됐다.

    관성을 깨는 운동

    – 공대위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 비정규직 투쟁은 사회연대투쟁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적의식 속에서 공대위 소속 단위를 사회 전체적으로 넓히려고 노력했다. 민족미술인협회, 작가회의, 문화연대, 문화일꾼이 한 축이었고, 종교단체와 지식인단체가 또 다른 축이었다. 과거와 달리 노동관련 관계가 끊겨버린 종교단체와 인권단체연석회의, 민변, 민교협 등 지식인단체에 제안해서 공대위를 만들게 됐다.

    – 기륭공대위가 단순한 지지와 연대를 넘어 실천투쟁을 함께 하고 있다.

    = 과거 시민사회단체의 대책위 성격은 주체들의 투쟁을 보완하고 엄호하는 정도였고, 관성으로 굳어졌는지 언제부터인가 싸움은 주체가 하고, 나머지는 지원만 하게 됐다. 저는 결의도 실천도 함께 하는 투쟁공대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안했다.

    기존의 운동 관성이 쉽게 깨지지는 않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주체가 아니라, 나 자신이, 우리 사회단체 자신이, 이게 나의 일이고, 나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었다.

       
     ▲ 기륭과 연대투쟁 중인 한 대학생 뒤로 ‘연대란…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이란 영상물의 글귀가 눈에 띈다. (사진=기륭전자분회)

    – 그동안 어떤 투쟁들을 만들어왔나?

    = 우선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겠다고 해서 촛불문화제를 시작했다. 지금 광화문이 90회 넘었을 텐데 기륭에서 비정규 촛불 문화제를 70여회 다양한 방식으로 했다. 투쟁뿐만 아니라 일상 사업으로 참여의 장을 열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어왔다.

    다양한 주체, 창조적인 투쟁

    파업 1000일에 맞춰 사회공동행동 주간을 만들어 8일간의 사회공동운동을 했다. 노동운동 선배들이 주최가 되는 날, 범종교인들이 연대하는 1000일 기도회, 문화예술인, 여성운동가들, 구로지역 노동열사모임이 주최가 되는 날 등 의미있는 8일간의 사회공동행동을 했다.

    문화예술인들이 ‘비정규 철폐 천막미술관’을 만들었고, 미술인들 100여명이 참여하는 걸개그림을 제작했다. 명동에서 비정규 장기투쟁사업장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 미술전을 준비해 4천만원의 판매기금을 모았다.

    단식 45일차에 맞춰 1045인이 시청에서 하루 동조단식을 벌였고, 8보1배로 청와대 동십자각 앞까지 진출했다가 다섯 명이 연행됐다. 1~2분만 빨랐어도 청와대 앞까지 갔을 텐데 아쉬웠다. 우리는 연좌하고 전행 연행되려고 했다. 기륭도 기륭이지만 비정규직이 선도적이고 결연한 투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기 위해 기륭 공대위 이름으로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우리가 책임지고 집행할 테니 비정규직의 날을 설정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전체가 집중하는 날로 잡히면서 성사되지 못해서 아쉬웠다.

    – 최근에 한나라당 대표까지 만나면서 교섭 재개를 끌어내기도 했다.

    = 교섭국면이 정체되면서 한나라당 타격이 필요하다 싶어 7월 10일 국회에 들어갔다. 한편에서 청원하러 간거냐, 부탁하러 간거냐는 얘기가 있었지만 기륭 비정규직 문제의 사회화가 필요했고, 한나라당을 압박하고 정치권이 나서도록 계기를 만드는 투쟁이었다. 종교인들까지 같이 갔다.

    금속노조가 중심 세워줘야되는데…

    금세 끌려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종교인들의 힘이 있었다. 우리는 정치권이 비정규직 문제, 기륭 문제 답을 주지 않으면 못 나간다고 했다. 많은 논란 끝에 열린 국회 개원날이었고, 여당 대표실에 들어간 것 등 이런저런 부담 때문에 서울노동청장과 기륭이 합의서를 만들던 계기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사측이 교섭해태를 하고 한나라당이 뒤통수를 치면서 교섭이 막히고, 금속노조도 휴가 가고, 어떤 계기 마련이 안되면서 침울했었다. 주변에서 정리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연대단위들도 확 떨어지면서 다시 계기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구속을 각오하고 다시 한나라당 들어갔고, 연행되어 나온 것이었다.

    – 기륭투쟁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많은데.

    = 금속노조가 중심을 세워줘야 한다고 계속 요구해왔는데 그게 잘 안돼서 안타깝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공조직은 비판도 가능하지 않은 무슨 성역이 된 것 같다.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어 이번 기륭 투쟁 과정에서 우리는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를 비롯해 투쟁을 통해서 대부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다 만났다. 그런데 참 만나기 힘든 게 금속노조 위원장과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다.

    사실은 노동운동이 이런 사회단체들은 조직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 변혁운동이란 게 노동조합만 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사회 각계가 지원 연대로 서도록 조직하고 후원하고, 노동운동만 책임지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변혁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에 나서도록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사회단위가 스스로 조직해서 지원하겠다고 쫓아다니는데도 그걸 전체의 힘으로 만들어나가지 못하고. 그런 전술적 논의, 전략적 판단이 부재한 것 같다.

    관료화된 조직일수록 절차와 형식을 따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노동운동이 그런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병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냐. 그러면 연대하겠다. 나에게 계기를 주지 않으면 함께 하기 힘들다.” 이런 사고들이 있다. 굉장히 계산적이다. 특히나 정파운동 내에 이런 경향들이 있다. 이게 우리 정파 소속이냐에 따라 참여의 정도가 달라지는 게 아닌가 싶다.

       
     ▲ 오늘(12일)로 단식 63일째를 맞이한 김소연 분회장과 유흥희 조합원(사진=기륭전자분회)

    촛불, 미친 쇠고기 때문만은 아니야

    –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문제도 촛불도 제대로 결합하지 못하고 있다.

    = 촛불은 미친 쇠고기 때문만이 아니다. 사회가 신자유주의로 재편되면서 알게 모르게 위기감과 삶 자체와 생존이 힘들어진다는 절망감 속에서 뚫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 좋은 계기에 노동운동과 변혁운동은 그런 사람들의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을 어떻게 앞장서서 선도하지 못했다. 책임감이나 헌신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대중들이 누군가라도 나서서 대중의 불만과 위기감을 터뜨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힘있게 변혁적 힘으로 나아가기를 바랬던 것이다.

    노동운동, 변혁운동이 자기 역할들을 잘 선도적으로 해나가면 큰 박수를 받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다고 봤다. 평범한 시민들과 만날 수 있다고 봤다. 투쟁을 조직해주고, 공안탄압으로 나서는 정권에 희생이 따르더라도 싸워나갈 때 촛불시민들은 노동운동과 만날 수 있다.

    –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 다른 것보다 투쟁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 일상적인 사업들도 필요하겠지만 기륭과 관련된 싸움을 만들어갈 수 있는 투쟁들이 필요하다. 투쟁을 통해 산별노조의 내용과 체계를 창조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단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 뜻과는 다르게 많은 부분이 사회적 연대나 운동이 되기보다는 흔히 얘기하는 노동조합주의 운동에 갇히는 부분이 있다.

    국민과 함께 한다고 해서 언론이나 대중들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사회변혁의 과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노동운동이 그런 것들을 선도해갈 수 있는 지점에 대한 새로운 전술적 고민들이 필요하지 않는가 싶다.
    말이나 주장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 * *

    * 이 글은 주간 <변혁산별> 18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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