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연주 “동지들 뒤로 하고 떠납니다”
    By mywank
        2008년 08월 12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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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해임된 정연주 KBS 사장이 12일 오전 회사를 떠나면서 ‘고별인사’를 전했다. 정 사장은 KBS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강제로 ‘해임’된 뒤 사장실에서 농성을 하면서, 계속 싸워볼까 하는 생각을 절실하게 한 적이 있었다”며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그런 생각을 접게 되었고, KBS를 지키는 일에 저의 존재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소회를 밝혔다.

    정 사장은 재임기간을 회고하며 “KBS 사장의 제왕적 권력을 해체하고, 회사 지도부에 집중되어 있는 독점적 의사결정 구조의 폐쇄성을 없애는 한편, 직원들의 독창력과 창의력을 억압하는 과거의 틀을 깨고, 자율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 지난 5년 간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며 “KBS 조직구조를 수직적 위계질서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꿔, 그 속에서 보도에 성역이 없어지고 프로그램이 풍성하게 된 것만으로도 제 소임의 상당부분은 성취되었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KBS 내부갈등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제 문제를 둘러싸고 그 동안 회사 내에서 있었던 일부 갈등과 분열을 이제는 모두 극복하고, 오로지 방송독립을 위한 ‘선한 싸움’에 모두가 단결된 모습으로 나설 것으로 믿는다”며 “공영방송인의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기 위해, 하나로 뭉쳐 이 광풍을 헤쳐나가리라 확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정 사장은 “밖에 있으면서 그동안 방송독립을 위해 지키고자 했던 원칙이 법정에서 확인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라며 퇴임 뒤에도 자신의 문제와 관련된 법적소송을 계속 벌여나갈 것임을 밝혔다. 한편, KBS는 신임사장이 임명될 때까지, 이원군 부사장이 사장 직무를 대행하기로 했다.

    다음은 정 사장이 발표한 ‘고별성명’의 전문이다.

                                                         *     *     *

    KBS 동지 여러분. 5년 여 전인 2003년 봄, 초록의 생명력이 차고 넘치던 여의도의 KBS에 발을 들여 놓던 때가 떠오릅니다. 엊그제 같기도 하구요. 그 날 저는 ‘독점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으로’ ‘집중에서 분산으로’ ‘폐쇄에서 개방으로’라는 세 가지 시대정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시대정신을 KBS에서 실현하기 위해 △KBS 사장의 제왕적 권력을 해체하고 △회사 지도부에 집중되어 있는 독점적 의사 결정 구조와 경직화된 관료주의 조직의 폐쇄성을 없애는 한편 △일선 직원들의 독창력과 창의력을 억압하는 과거의 틀을 깨고, 자율과 자유의 공간을 최대한 넓히기 위해 지난 5년여 동안 노력해 왔습니다.

    저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KBS 조직구조를 수직적 위계질서에서 수평적 관계로, 자율과 자유가 제약받지 않는 조직문화로 바꿔, 그 속에서 보도에 성역이 없어지고 프로그램이 풍성하게 된 것만으로도 제 소임의 상당부분은 성취되었다고 보고, 지난 5년여를 행복하고 보람된 제 삶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간직한 채 이제 떠나려 합니다.

    그리고 지금 거센 광풍으로 휩싸여 있는 공영방송 KBS를 둘러싼 이 엄혹한 현실에 대해서도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90년 방송민주화 투쟁 이후 그동안 여러분들이 보여준 공영방송에 대한 치열한 의식과 열정과 헌신을 믿기에, 지난 5년 여 동안 여러분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키워온 자율과 자유의 정신을 믿기에, 그리고 광풍이 휘몰아 쳐도 그 속에서 굳건하게 공영방송의 독립을 지키려는 여러분들의 굳건한 의지를 믿기에 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 떠나려 합니다.

    제 문제를 둘러싸고 그 동안 회사 내에서 있었던 일부 갈등과 분열을 이제는 모두 극복하고, 오로지 방송독립을 위한 선한 싸움에 모두가 단결된 모습으로 나설 것으로 믿습니다.

    언론의 자유, 이를 구체적으로 지키기 위한 필요조건인 방송의 독립,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되는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아니 그 보다도 공영방송인의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기 위해 하나로 뭉쳐 이 광풍을 헤쳐나가리라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강제로 ‘해임’된 뒤 사장실에서 농성을 하면서 계속 싸워볼까 하는 생각을 절실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공영방송 독립을 간절하게 원하는 국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 정권의 퇴행적이고 파괴적인 방송 장악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그런 생각을 접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영방송 KBS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공영방송 KBS를 지키는 일에 저의 존재와 이를 둘러싼 문제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동안의 견해 차이와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로 뭉치게 하는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5년여를 되돌아보면, 가슴 아픈 일도 많았고, 터무니없는 비난과 음해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비난과 음해를 통해 오히려 더 강해지고 여유로워지는 역설도 경험했으며, 조악한 권력집단이 되어버린 노동조합 집행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도 있었습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가슴 아픈 일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난 민경삼 기자를 비롯하여 유명을 달리한 여러 사우들과의 이별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 한없는 평안이 깃들기를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남아 있는 가족들을 보살피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8일 공영방송 KBS가 공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침탈되고 유린되는 현장을 보면서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저미게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날 여러분들이 3층 복도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을 사장실에서 인터넷을 통해 보았습니다. 혼자 많이도 울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분노와 절규는 제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마다 가녀린 촛불 하나씩 들고 회사 앞을 지켜온 그들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떠나려 하니 이제는 많은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2월 말 한겨울 칼바람 추위 속에 해발 1,200m 고지에 있는 화악산 송신소에 올라 그곳 직원들과 함께 소주잔을 주고받으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냉혹한 생존경쟁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개그 콘서트 연습장 모습, 마음에 드는 30초짜리 장면을 찍기 위해 30분 이상을 쏟아 붓는, 드라마에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 드라마 촬영 현장.

    KBS 드라마가 모든 장르에서 싹쓸이 1등을 한, 불가능을 성취했던 2004년 가을 이야기, 이달의 기자상을 휩쓸어온 보도본부의 경이로운 변화와 성취, KBS WORLD 채널의 중국 진출을 위해 4년 동안 마셨던 술이며, 그 많은 토론과 중국 관리들과의 만남, 수원 센터에서 열렸던 간부 대토론회, 팀제 도입과 지역국 기능조정을 위해 1년여 동안 그렇게 치열하게 진행했던 토론과 힘들었던 사내 의사 취합 과정.

    방송법 개정과 공공기관특별법 관련한 온갖 싸움들, 수신료 인상을 위한 노력과 이를 둘러싼 회사 안팎의 갈등과 비판….이제는 그 모든 일들이 그냥 아련한 시절의 사진첩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삶의 후반부에서 폭포수 같은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지난 5년여 동안 KBS에서 참으로 좋은 벗들, 참으로 훌륭한 동지들을 많이 만났다는 점입니다.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이 축복만으로도 참 행복하답니다. 앞으로 저의 삶은 그만큼 풍족해질 것이며, 그만큼 덜 외로워질 것입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비록 몸은 KBS를 떠나지만 마음은 오래도록 이곳에 머물 것입니다. 밖에 있으면서 그동안 방송 독립을 위해 지키고자 했던 원칙이 법정에서 확인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며, 글과 활동을 통해 언론의 자유, 방송의 독립,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KBS 동지 여러분, 지난 5년 여러분과 함께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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