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소녀와 홍길동
    2008년 08월 04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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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 선거가 끝났다. 촛불집회의 장을 열었던 청소녀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불렀지만, 누구도 선거권을 갖지 못했다. 결국 청소녀들은 교육의 주체로서 간주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이라는 존재가 한정치산자나 금치산자와 같은 처우에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질서가 부여해 준 놀라운 마법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녀들이 비록 주권자로서 간주되지 않지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주체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촛불과 같은 거리의 벡터장(vector field)을 가장 선도적으로 가식없이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교육감 선거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대리만족하려는 강남 어른들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 시청광장의 촛불소녀들 (사진=손기영 기자)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 끼워 맞추고 원격조종하면서 아이들에게 성공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어른들 속에서는 아이들의 살아 움직이는 욕망의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촛불집회로부터 사람들은 아이들의 솔직한 목소리에 부끄러워했으며, 아이가 되었으며, 아이처럼 저항하는 무의식의 솔직한 행동으로 나섰다. 사실 촛불집회의 이면에는 아이해방운동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자본주의적 진보주의와 계몽주의, 승리주의를 주장하는 어른들은 늘 아이들은 훈육되거나 더 배워야 하고, 이성적 주체가 아니므로 스스로 판단하거나 결정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족, 교육기관, 학교에 오랫동안 맡겨지는 이유는 아이가 갖고 있는 욕망의 솔직함을 버리도록 훈련받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의 삶의 호흡과 리듬이 살아있는 욕망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거리에 이식하였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만든 장에서 스스로 여러 명, 수만 명의 아이가 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된 시민들에게 제도적 수준에서 어른의 목소리로 선동하고, 훈계하는 건 모두 다 위선이며, 거짓으로 느껴졌다.

매우 솔직하고 진솔한 아이 되기는 탈근대적 상황의 미래세대의 전망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말해도 된다. 아이는 시작점이 아니라, 도달점이라고 말이다. 우리에게 덧칠되어진 제도적인 수준의 질서와 가식들, 이성적인 정상성의 자연스런 차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아이라는 것을 말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우리 모두는 아이였으며,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아이였다.

결국 아이들에게 권리를 주지 않고, 아이들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는 선거라는 형식은 불행히도 아이 해방의 장이 될 수 없었다. 보다 나은 어른을 뽑는 형식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면 아쉬운 부분이 한두 가지는 아니지만, 아이에게 부모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면서도 정작 아이의 욕망은 인정하지 않는 그로테스크한 교육열풍이라는 도착적 욕망이 사라지기 전에는 아이들은 대상이며, 수술대에서 모든 내장과 머리의 신경세포를 내놓아야 할 상황에 있는 것이다.

이제 대안세력의 진보는 무지몽매한 아이(혹은 대중)를 계몽시키고, 깨우쳐야 한다는 설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이를 시작점으로 본 근대적 의미의 진보는 바야흐로 종말을 고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미래세대를 도달점으로 보고, 아이가 바로 대안세력이 나아가야 할 최종적인 목표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대안세력에게 있어서 아이란 욕망의 주체성이며, 미래를 향한 우리의 무의식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촛불집회에서 청소녀들의 반란은 이미 탈근대 상황에서의 아이해방운동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네트워크에 의해 잘 조직되어 있었고, 망상조직과 같이 신경망이 연결된 문자메세지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욕망을 전염시켰다.

그리고 거리에서 청소녀들이 나타났을 때 누구도 그것이 새로운 벡터장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지만, 새로운 창조적인 관계와 분자적인 수준에서의 혁명을 만들어낼 아이들이 만든 공간으로 사람들을 달려오게 만들었다.

이미 청소녀들의 목소리는 하나의 개량주의인 조치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아이해방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삶의 욕망의 해방이며, 미래를 향한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홍길동은 누구인가?

   
 ▲ 드라마 ‘쾌도 홍길동’ 중에서

중국철학자 이탁오는 공자의 성선설의 원천이 아이라는 해석을 함으로써 동심설을 창안해 낸다. 이탁오의 동심설은 욕망해방, 아이해방의 새로운 지형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당시 중국을 유학중이던 허균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어떠했던가? 허균이 쉽게 우리에게 풀어 써서 알려준 아이 해방의 주역은 홍길동이라는 독특한 아이였다. 그것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아이였다. 보통 근대가 만들어 놓은 이중포박, 좌파의 부친살해나 우파의 아버지를 능가하는 아버지가 되려는 것이나 아버지의 권위에 이중구속되어 속박되는 아이로서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허균이 보여준 홍길동이라는 존재는 탈근대적 상황에서의 아이, 아버지의 권위의 틀에 호명되지 않는 외부의 아이를 보여주었다. 허균의 홍길동전은 근대를 넘어선 아이 해방을 응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 해방의 사상의 뿌리를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저항하는 아이, 욕망하는 아이, 생동하는 아이가 내재해 있고, 숨쉬고 있다. 그것을 촛불집회라는 역사적 현장에서 우리 안의 아이를 다시 발견한 것이다.

문제는 다시 교육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수준의 것이다. 아이 해방의 장은 열렸으며, 그것은 끊임없는 전투와 대결의 장이 될 것이다. 비록 선거에서는 졌다 할지라도 선거는 어차피 어른들만의 잔치이며, 아이들은 외부에서 구경꾼이었다.

아이들이 진정으로 역사적 주역이었는데도 말이다. 대안세력은 아이로부터 미래의 대안, 해방의 대안, 생동의 대안을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아이를 진정한 해방의 주체로서 바라보는 매우 다정하고, 섬세한 대안세력의 감수성을 창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교육의 시대는 끝났다. 아이 해방의 시대이다. 그래서 대안은 매우 가까이서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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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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