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오늘 정당도 민주노총도 안 보이냐"
        2008년 07월 22일 11: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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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의 난동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려 떨린다. ‘드디어’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집회를 하게됐는데, 우리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 다시 확인하니 분하고 서럽다"

    횟수로 76차, 촛불을 켠 지 90일 째가 되던 22일. 처음으로 청계광장이 촛불문화제를 시작도 하기 전 전경들에게 침탈당하자 촛불 집회에 참석한 이랜드 조합원 윤송단(41)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울분을 토했다. 기존의 촛불문화제와 달라진 게 있다면,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철폐’를 내걸고 행사 주최로 처음 등장한 것 뿐이었다.

    청계광장 최초로 봉쇄

    문화제 준비가 한창이던 6시 50분께. 청계광장을 에워싼 3개 중대의 경찰들이 갑자기 청계광장으로 들어와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촛불 집회가 변질된다", "불법 집회를 해산하라", "정치 구호를 외치는 것은 문화제가 아니다" 는 등의 말을 던지며 일순간 광장을 점거했다.

    경찰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대를 대신 해 깔아놓은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 라는 집회 현수막을 가장 먼저 걷어낸 후 아고라 깃발 및 방송 스피커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맞서 이랜드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은 촛불 문화제도 못하냐?", "현수막을 왜 흠쳐가냐?", "뭐가 두려운 거냐?"면서 경찰의 팔, 다리 등에 매달려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졌다.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그동안 미신고 불법집회가 누적돼 오늘부터는 집회를 허용할 수 없다"며 "앞으로도 신고된 집회 외에는 모두 원천봉쇄할 것"이라고 밝혔다. 

       
      ▲집회장소를 ‘점거’한 경찰들.(사진=김은성 기자)
     

    비정규 노동자들이 비정규 현수막과 청계광장을 되찾기 위해 경찰과 격렬하게 몸싸움을 벌이는 동안 그간 촛불 문화제에 숱하게 참석했던 민주노총 지도부 및 정당 관계자는 없었으며, 이들은 촛불문화제가 끝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민주노총도 진보정당도 없었다

    한 비정규노동자는 "정치인이나 민주노총 사람들이나 다 똑같다. 개뿔 무슨 비정규직이냐?"며, "여기에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경찰이 이렇게까지 우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치고 들어왔겠느냐?"면서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그는 "모두가 말로만 심각하다, 앞장서겠다고 말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만 홀로 4년을 싸우면 뭐 하냐? 요즘에는 모두가 다 독도에만 관심이 가 있다"며,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 아니냐?"고 재차 대답없는 항변을 했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격렬한 항의와 청계광장이 처음으로 봉쇄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이 하나 둘 몰려들자 결국 경찰들도 7시 20분께 뒤로 ‘일단’ 물러났다. 이렇게 시작된 듯 76차 촛불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경찰은 행사 내내 해산 경고 방송을 하고, 길 건너 동화면세점 앞에서는 시국기도회를 하는 보수성향의 기독교 단체가 연신 찬송가를 내보냈다. 

    경찰의 난동에 분통을 터트리며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윤씨는 "오늘 만행은 비정규직 의제가 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며, "여성 노동자를 밀어내고 깃발을 빼앗는 것은 이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가 촛불 의제로 등장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윤 뉴코아 조합원은 "촛불 집회에 모인 많은 시민들이 비정규직 사업장에 모여 투쟁한다면 벌써 우리 투쟁은 모두 승리해 현장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며, "우리도 짓밟으면 아파할 줄 알고 무시하면 저항하고 분노할 줄 아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비정규직 투쟁은 승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문제도 함께 해달라

    기륭 조합원 최은미씨는 "요즘 촛불 집회로 비정규직 문제가 가려져 억울하지 않냐고 질문하시는데, 쇠고기를 계기로 이명박 정권의 실체를 밝힐 수 있게 돼 오히려 시민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는 "미국 쇠고기도 단순히 먹지 않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듯 일터의 광우병인 비정규직 문제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니 함께 해달라"고 관심을 호소했다.

    KTX 승무원 김영선(28)씨는 "열심히 살면 세상이 우리를 속이지 않을 줄 알았다. 파견이 뭔지 비정규직이 뭔지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며, "여성노동자의 70%가 비정규직이다. 하지만 이를 인식하기까지에는 너무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서울역에서 천막농성을 진행 중인데 지나가면서라도 힘내라는 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사진=김은성 기자
     

    시민들도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아고라 네티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시민은 "오늘 깃발을 빼앗겼지만  MB가 퇴진하고, 한나라당이 퇴출되고, 조중동이 폐간되는 그날까지 끝까지 현장에 나와 함께 할 것"이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표현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발언을 진지하게 듣던 조장은(32, 주부)씨는 "비정규직 문제는 삶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쇠고기 문제와 달리 처해 있는 환경에 따라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을 하면서도 모두에게 쉽게 와닿지 않았다"고 말했다.

    쇠고기는 오히려 작은 문제

    그는 "기륭 여성분과 다른 사람들의 생생한 발언을 들으니 오늘은 더욱 피부로 와닿는다.  쇠고기 문제는 작은 문제일 뿐이며 이제 시민들의 관심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된만큼 비정규직 문제가 관심사에서 벗어나지 않게 꾸준히 서로 노력하자"고 말했다.

    다행히 문화제는 경찰의 해산 방송에도 불구하고 시민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을 담은 극영화 <안녕? 허 대짜 수짜님!>을 상영하며 무사히 끝났다. 한편, 23일에는 1일 경고파업에 돌입하는 언론노조 주최의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77차 촛불 문화제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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