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조합은 보수적이었다"
        2008년 07월 12일 09: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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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차 평가 지점은 6월 10일(화)로 볼 수 있다.

    촬영된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최소 25만 명 이상이 모인 대규모 시위에서 대책위는 매우 위험스러운 선택을 했다. 대책회의는 치밀한 계획 없이 ’20일이라는 시한통보와 퇴진운동에 대한 언급’을 했다.

    대책회의의 위험스런 선택

    나름의 고민은 있었겠지만 시한을 통보하기 위해서는 그 시한에 맞춰 최대규모의 역량이 결집되는 것이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최대규모의 역량이 결집된 날 시한을 통보하고 퇴진운동을 암시하는 우를 범했다.

    만약 5월 31일에 6월 10일까지 재협상을 하지 않으면 정권퇴진운동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고, 6월 10일100만의 동력이 모인 자리에서 퇴진운동의 시작을 선언했다면 보다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고조되지 않았겠는가?

    대책회의의 이 실수는 다행히도 네티즌들과 시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만의 대오가 유지되면서 많이 상쇄되었다.

    노동조합은 단 하루의 집회만을 준비했다. 6월 10일 파업을 거론하는 우리 내부를 보면서 답답했다. 도대체 가능하지도 않은 파업을 거론하면서 6월 11일 이후는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 일부 언론조차 100만이라고 했던 6월 10일 집회대오에 민주노총의 대오를 수만명 붙인다 한들 표시나 날 것이라 생각했을까?

    노동조합의 힘은 쪽수에서 나온다. 쪽수가 안되면 조직력으로 상쇄해야 한다. 그도 안되면 20년 운동의 역사를 통해 축적된 정세판단 능력과 치밀한 준비성이라도 보태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대책회의 1,700여 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병렬 열사는 끝내 운명했다. 우리는 차분히 현장을 조직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조직의 결과를 ‘파업’에만 가두지 말았어야 했다. ‘깃발’ 아래로만 끌어들이려 하지 말아야 했다. 조합원들이 자발적으로 촛불집회에 참석하도록 해야 했다.

    이런 수많은 일들을 했어야 했다

    네티즌인 조합원들은 더욱 더 열심히 인터넷에서 활동하게 해야 했고, 그들의 활동이 조직적이 되도록 지원해야 했다. 안티이명박카페 회원인 조합원들은 안티이명박카페 깃발 아래 모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했다.

    가족과 함께 나오도록 해야 했다. 이웃집 주민들과 함께 나오도록 해야 했다. 비조합원들과 삼삼오오 나와 촛불을 들고 담소를 나누게 했어야 했다. 선전전을 더욱 확대시켜 시청 주변 곳곳에서 선전전에 참여하고 집회가 시작되면 대오 안으로 들어가게 했어야 했다.

    촛불다방을 노동조합이 시작했어야 했다. OO노조 다방, OO노조 라면가게에서 조합원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게 하여, 시민들로부터 따뜻한 말을 듣게 하고 그들의 미소를 보게 했어야 했다. 젊은 조합원들에게 출신학교의 동문들을 조직하여 나오게 했어야 했다.

    사진에 관심이 있는 조합원들을 모아 노동조합기자단을 만들었어야 했다. 각 조직의 문화역량을 총동원하여 거리 곳곳에서 문화제를 열어야 했다.

    이 시기에 우리가 할 일 또한 명확했다. 잘 정리된 선전물을 20만장이든 100만장이든 시민들에게 전달했어야 한다. 물론 인쇄된 종이선전물뿐 아니라 인터넷 관련사업에 조직역량을 투자했어야 한다. 여론을 주도하였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날 하루 선전으로 성과를 달성할 수는 없다. 이것이 가능한 전제는 5월 중순까지 이어진 선전전의 성과를 지속적으로 확대했어야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조합원들을 자발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다양한 시도들을 했어야 했다. 시청 주변에 부스를 차리고 국민연금에 대해 상담해주고, 건강보험에 대해 상담해주고, 무료진료소를 차리고, 전기와 승강기안전에 대해 캠페인하고 상담해줬어야 했다.

    (좀 웃길 수도 있지만) 바람직한 육아법, 바람직한 교육에 대해 설명하고 토론했어야 했다. (촛불집회에 나오는 많은 수의 시민들은 부모이고 학부모였다. 그리고 우리 조합원들은 어린이집에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노동자이다.) 민변이 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상담을 했듯이, 민주노총 내부의 법률 역량을 가지고 소외 받는 영세노동자들의 법률상담을 했어야 했다.

    5차 평가 지점은 6월 28일(토)로 볼 수 있다.

    6월 10일 이후 2주가 넘는 기간 촛불은 매우 위험스러운 국면을 거쳤다. 이병렬 열사의 장례식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며 정국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마무리되었다. 촛불의 동력은 갈수록 약화되는 듯했고, 6월 20일이라는 통첩기한은 별다른 의미 없이 흐지부지되었다.

    정부의 추가협상 발표와 공세적인 언론 대처는 촛불에 불을 붙이지도 못했지만 끄지도 못하는 기이한 결과를 초래했다. 말 그대로 촛불도 권력도 지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판단착오는 양쪽 모두에게서 일어났다.

    대책회의는 지쳐있는 시민들의 상태를 외면하고 48시간 국민행동을 선포했고, 5월 2일 이후 처음으로 촛불이 떠난 자리에 깃발만 나부끼는 상황을 연출했다. 정부는 촛불이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관보게재라는 악수를 선택했다.

    판단착오는 양쪽에서 모두 발생했다

    촛불은 다시 타올랐다. 지친 촛불들이 5월 31일의 영광을 다시 재현했다. 6월 28일 시청 앞 광장과 대한문 앞 대로는 다시 촛불로 가득 찼다.

    이 기간 동안 노동조합은 본격적으로 깃발을 올렸다. 성급한 판단이었다. 촛불시위는 깃발시위로 바뀌었다. (깃발과 무관하지만) 거리시위는 과격해졌다. 정확히 얘기하면 촛불이 과격해진 것이 아니라 일부 참가자가 과격해진 것이다. 물론 어느 세력도 과격한 시위를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깃발을 든 모든 세력이 그 분위기를 형성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우리는 파업을 준비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예고되고 투표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조합원에 대한 교육과 충분한 선전 없이 진행된 이 투표는 곳곳에서 부딪혔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생산을 멈춰 정권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자’라는 주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누구보다 그것을 간절히 원하지만……)

    우리가 생산을 멈춰 일격을 가했던 적이 최근에 있었는가? 화물연대나 일부 조직을 제외하고 말이다. 최근에 그 파괴력이 현저히 떨어진 우리 내부에 대한 성찰과 반성, 변화와 새로운 시도 없이, 더군다나 현 상황에 대한 전통적인 방식의 조직화 작업(토론회, 현장간담회, 선전, 교육 등)조차 없이 무슨 실력으로 생산을 멈추자는 말을 함부로 하는가?

    이 시기에 우리가 할 일은 지난 몇 주간 놓쳐왔던 것들을 다소 늦었더라도 하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이 나서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환상(지금 우리 실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을 바꾸고 진화했어야 했다.

    깃발을 내렸어야 했다. 쇠고기 정국을 통해 이명박 정권을 끌어내릴 수 있다고 보는가? 정부에겐 최후의 카드, 재협상 선언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 정국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선전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우리의 깃발은 시민들의 참여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고리타분한 민주노총에 대한 불신 논쟁을 말하는 게 아니다. 깃발은 그 소속 조직원을 제외하고는 함께 하기 어려운 하나의 벽이다. 이것이 깃발의 이면에 있는 단점이다.

    이 단점이 상쇄되기 위해서는 그 깃발이 그에 걸맞은 대오와 조직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상황을 주도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수만 명, 수십만 명을 깃발 아래 모아 놓고 주변을 향해 ‘시민들이여 함께 합시다!’라고 외쳐야 한다는 말이다. 큰 집회를 제외하고 노동조합들의 깃발 아래에는 십여 명의 사무처와 얼마 되지 않는 조합원들이 앉아 있을 뿐이다.

    최대 위기 맞은 촛불

    이제 촛불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7월 5일 다시 결집한 촛불에 대해 이명박 정권은 답을 해 왔다. 정면 돌파! 시청은 봉쇄되었고, 촛불문화제와 가두행진은 금지되었다. 내각총사퇴 논쟁은 3.5 개각으로 축소되었고, 대운하와 공공기관의 민영화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어차피 하루 이틀의 분위기로 앞을 예측할 수는 없다. 7월 12일을 지켜봐야 한다. 매번 중요한 고비마다 우리는 앞서가지 못했다. 이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합법적 조직력과 수년간에 걸쳐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촛불정국 내내 우리 내부에서 꿈틀거린 자발적 창의성들은 대부분 사장되었다. 아이디어를 사장시키는 데에는 나도 기여했다. 나 역시 보수적이다. 거리토론회 아이디어는 거부되었다. 그러나 진보신당을 포함한 몇몇 단체에 의해 시도되었고 상당한 성과를 남겼다.

    생중계 아이디어는 게으름과 무관심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와 칼라TV를 포함한 수많은 단체들이 생중계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지속적인 기념품 배포는 노동조합이 가두시위에 올인하면서 조직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다양하고 창의적인 기념품들이 시청광장에서 배포되고 팔리고 있다.

    인터넷 대책은 말만 무성하고 진척되지못하고 있다. 대부분 노동조합에서 조직적인 무관심 속에 한두 사람의 활동가에 의한 자족적인 활동에 머무르고 있다.(물론 그 활동가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온오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양자가 서로를 키워주는 네트워크시대에 우리는 오로지 오프에만 올인하고 있고, 조합원들을 끌어 들이기 위한 다양한 고민은 사라져버렸다.

    또한 5, 6월 내내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이명박 정권과 우리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소통의 부재이고, 또 다른 하나가 바로 타이밍을 놓친다는 것이다. 치고 나갈 타이밍, 필요하다면 뻥이라도 칠 타이밍, 조직을 동원할 타이밍, 숨을 고를 타이밍 등등…… (이명박도 추가협상의 타이밍, 강경대응의 타이밍, 관보게재의 타이밍 등을 계속 놓치고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 우리는 앞서 갈 수 없다. (최소한) 이 정국에서 우리는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당장 무엇부터 할 것인가?

    깃발을 내리자. (우리의 집회에서도 깃발을 들지 말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해 없으시길……) 깃발로서 우리의 존재를 알리려 하지 말자. 깃발로 인해 조합원들의 자발성을 가로막지 말자.

    깃발을 가지고 시민들의 참여를 막는 우를 범하지 말자.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당원은 당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하자. 인터넷카페 회원은 인터넷 깃발 아래 모이게 하자. 동문회 깃발 아래 모이게 하자. 그도 저도 싫은 조합원은 가족과 함께, 직장동료와 함께, 이웃과 함께 삼삼오오 참여하게 하자.

    이 정국은 우리가 만들어 내지도 않았고 우리의 뜻대로 굴러가지도 않고, (슬프게도) 우리가 가진 실력으로 영향을 줄 수도 없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의 체질을 바꾸자. 다양성에 대해 고민하자.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획일주의에 대해 성찰하자. 토론문화에서부터 사업문화, 조직과 조합원에 대한 진단까지 우리 머리 속의 획일주의에서 탈피해야 한다.

    자발성에 대해 고민하자. 현장간부와 조합원은 다르다. 활동가와 현장간부도 다르다. 조합원의 상태로부터 현장간부의 상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고의 폭을 넓혀 자발성을 이끌어 내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자발성을 끌어낼 수 있다면 창조성은 덤으로 따라 올 것이다. 단, 덤으로 따라오기 전까지는 의식적으로 젊은 활동가들, 노동조합의 경험이 부족한 활동가들의 아이디어와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후배를 키우는 것이 ‘내 머릿속의 고정관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님’을 수도 없이 자문하고 되새겨야 한다.

    또한 일회적이고 진부한 방식의 선전에서 벗어나자. 네트워크를 활용하자. 이미 네트워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이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전략적 무기가 되었다. 네트워크를 장악하기 위한 자본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네트워크를 빼앗기면 미래는 매우 어두워질 것이다. 수구보수세력에게 빼앗기지 않는다고 해도 자유주의자들에게 넘겨준다면 그 결과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건이 터지면 성명서 하나 내고 선전물을 만드는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일년 내내 선전물의 내용은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조합원들조차 읽지 않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현재 시도되고 있는 공공연맹의 무가지는 매우 좋은 시도이다. 조금 더 바란다면 더 과감하게 색깔을 버리고 시민들과 조합원들 속으로 파고 들었으면 한다. 한겨레나 오마이뉴스는 색깔을 버렸지만 이미 진보운동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레디앙이나 참세상은 진보운동의 영향력 아래 있지만 색깔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중립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 어느 수단보다 편향된’ 것이 언론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공부하자. 토론하자. 시도하자. 소통하자.
    변화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 공부하자.
    변화하는 세상에 대해 토론하자.
    변화하는 세상에 맞는, 변화하는 조합원들의 삶에 맞는 다양한 시도를 하자.
    그리고 소통하자.

    이명박 정권에게만 소통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문제이다. 투쟁과 의제들만 가지고 소통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조합원의 삶을 가지고 소통하자. 조합원과 소통하고, 현장과 소통하고, 활동가 내부에서 소통하고, 선후배간에 소통하자. 모든 대안은 현장의 조합원에게 있고, 우리 내부의 나보다 젊은 후배들에게 있다.

    또한 이 소통의 방식을 내부적으로는 간담회, 현장 순회와 같은 고전적인 방식에서 확대하여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일방적 선전물의 살포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이디어 회의를 통해 다양한 시도들을 과감하게 해야 한다.

    글을 맺으며

    너무 긴 글이고 그다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접근도 아니라고 생각됩닏. 이 글의 목적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누군가를 설득하는 목적보다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는데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 글이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을 주도하는 노동운동’으로 재도약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끝>

                                                       * * *

    이 글에 관심 있는 분들은 <반자본주의>나 <참여군중>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유토피아에서 출판된 사이먼 토미의 <반자본주의>는 이 글의 문제의식을 포함하여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분석과, 조심스러운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시장독재와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성을 이해하고 의회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논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황금가지에서 나온 하워드 라인골드의 <참여군중> 또한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유용한 책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휴대폰과 인터넷으로 무장한 새로운 군중’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워드 라인골드는 이미 2003년에 네트워크로 연결된 군중에 대해 분석을 시작한 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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