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말하는 결단이라는 것은
        2008년 07월 10일 01: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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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간 진보신당> 제2호에 시론으로 실린 글이 <레디앙>에 함께 올라간 뒤 몇몇 댓글들이 달렸다. 그리고 주변의 지인들과도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답변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글을 쓰게 되었다. 글에 대한 지적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이제 촛불을 끄자는 것 아니냐”, “니가 말하는 결단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내가 말하려 한 것은 촛불을 끄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촛불의 정신을 어떻게 하면 지속시키고 확산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그와 관련해 진보신당은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할까 하는 것이었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다.

    새로운 반전을 위한 매듭짓기

    고민의 지점은 국면 전환의 사태 속에서 새로운 반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매듭짓기가 필요하며, 그런 상황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정당 정치의 영역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권력기회주의 집단일 뿐인 기성의 제도 정당들에게 책임 있는 실천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특히 정치에 대한 불신이 정당에 대한 거부로 연결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와 소통하는 새로운 대안정당을 지향하는 진보신당의 정치적 위치잡기(positioning)와 역할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기성 제도정치와 정당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거부의 완화나 해소 없이 민주주의의 진전은 어렵다.

    따라서 진보신당이 지금까지의 활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촛불의 진행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진보신당도 정당인 이상 무차별적으로 쏟아지게 될 비난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욕 먹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였다.

    그랬을 때 진보신당 활동의 초점은 한편으로는 촛불이 던진 많은 화두들을 새로운 실천활동과 문화적 생활양식의 창출을 통해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촛불의 빛에서조차 소외된 사람들, 여전히 비결정(non-decision)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는 의제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 그것을 위한 당 안팎의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맞춰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나씩 좀 더 살펴보자.
    우선, 촛불의 물결로 출현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그것은 이명박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한 채 되풀이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책임을 촛불에 전가했다는 것에 있었다. 재협상 불가, 이른바 ‘배후조종설’, ‘경제위기의 주범=촛불이라는 일종의 책임회피-책임전가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 정확한 비판과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대안을 말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그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렇지 않다면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저항과 공격의 근거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는 개인적인 우려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안과 관련해 목표 설정과 그 방법에 대한 것을 구분해서 말을 이어갈까 한다. 정말 촛불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고 또 그 강도가 세지면, 국면이 반전되고 또 목표로 설정한 재협상을 관철시킬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나는 기본적으로 회의한다.

    재협상 주장과 위험 회피 전략

    더 솔직한 심정은 이명박 정부의 태도로 볼 때, 재협상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혹시 정치적 선동의 구호로 유의미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것이 지금 국면에서는 욕 안 먹는 주장일 수 있겠지만―일종의 위험 회피 전략인 것으로, 결국은 책임질 수 없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따라서 현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재협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재협상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현 이명박 정부를 퇴진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길로 힘을 결집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주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음의 물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명박 정부를 어떻게 퇴진시킬 것인가? 그것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일단 대통령 탄핵이라는 제도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탄핵소추권은 국회에, 탄핵심판·결정권을 헌법재판소에 부여하여 탄핵제도를 2원화하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국회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65조 1항). 그리고 소추된 탄핵안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9인의 재판관중 6인 이상의 찬성으로 탄핵을 결정한다(113조 1항). 잘 알겠지만 현재의 국회 의석 구성상 이는 현실성이 전혀 없다.

    국민투표라는 제도도 있다.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 헌법 제 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역시 불가능하다고 본다. 현 대통령이 국민투표라는 제도에 의존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민성공시대’를 열어가자던 현 대통령은 오히려 노태우 전 대통령보다도 더 못하다.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내건 노태우는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국면돌파의 한 방법으로 중간평가라는 이름의 신임투표를 말이라도 한 번 꺼내봤기 때문이다.

    솔직함이 최선의 정책

    대통령 자신이 잘못에 대해 개과천선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자리를 물러나지 않는 이상, 남는 하나의 방법으로는 1960년 4.19혁명과 같이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반란의 힘을 전국적 단위에서 조직해서 대통령을 몰아내는, ‘혁명적’ 방식의 추구이다. 그 혁명적 전복이 가져올 후과에 대한 이러저런 예측이나 판단과는 상관없이, 현실적으로 그런 힘을 결집시킬 수 없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진단일 것이다.

    결국 재협상 관철이나 이명박 퇴진투쟁은 혹시 정치적 압박 효과의 가능성은 있을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성취 가능한 당면 목표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일단 그것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말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 고민의 지점은 광장과 거리의 목소리가 일상의 생활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말없이 지지와 성원을 보내준 일상의 기대와 분리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이다. 앞선 글 끝부분에 91년 5월투쟁의 패배와 아픔을 언급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사실 60여일 이상 촛불을 지속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촛불을 밝히는 것이 점차 다수의 참여자들의 피로도를 증가시킨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러한 사태에 대한 나름의 해석에 기초하여, 그리고 적극적인 참여자들의 강한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면이 전환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목표와 방식의 일정한 변경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무언가 확실한 성취감을 맛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목표와 방식의 변경

    그렇다고 국민과의 소통에 눈감고 귀막은 ‘사오정 정부’임을 스스로 증명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촛불에 대한 공격지점을 다변화하고 있는, 전방위 고립화 전략 속에서 특히 이데올로기 공세를 집중하고 있는 지금, 현재의 촛불과 깃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올바른 해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더 무책임한 주장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핵심은 저항적 축제라는 2008년 촛불의 특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광우병 쇠고기라는 좁은 의제에서 벗어나 이제는 상황에 맞게 촛불의 의제를 다변화하고 저항의 방식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것, 그리고 일상의 생활과 새롭게 소통하고 연대하는 방안을 함께 모색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일단 쇠고기 재협상 의제는 학교 및 군 급식 문제와 불매운동 등으로 확장되면서 계속 환기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7월의 촛불은 7월 30일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집중될 필요가 있고, 또 시대착오적인 정권의 노골적인 언론 장악 기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힘을 결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촛불의 빛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끝장천막’을 지속적으로 비추면서 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야말로 한국 사회 소외와 고통의 상징이자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 풀어야 할 핵심 과제이기 때문이다.

    촛불의 지속과 관련해 『바보제: 제축과 환상의 신학』을 쓴 하비 콕스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축제는 “민중들에게 현재가 어디까지나 지금 그대로 지속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진정한 의미의 축제는 새로운 상상력과 사회적 비판의 공유의 마당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때, 촛불의 광장이 만들어낸 효과가 찰나적 열정의 일시적 분출로 마감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내면의 자기 성찰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즉 저항적 축제를 통해 변화된 ‘나’를 발견하면서 일상의 생활에서 촛불의 기억을 간직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 축제의 광장과 일상생활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축제의 광장과 일상의 경계 허물어뜨리기

    사실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온 2008년 촛불의 물결은 저항적 축제의 즐거움이라는 점에서 많은 것들을 시사해주고 있다. 너무 과도한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10대 ‘촛불소녀’의 눈으로 볼 때 즐거움이 상실된 축제는 이미 긍정적 의미의 축제가 아니며, 그 속에서 해방감과 연대의 정신을 높이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저항의 동력도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소탐대실’. 이명박 정부는 ‘소’를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그것은 바로 국민적 신뢰였다. 이에 대한 도전과 저항과 해방의 물결도 소탐대실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되리라고 본다.

    한편 앞선 글에서 87년 6월을 언급한 것은, 그해 6월의 결과에 대한 기억의 환기를 위한 것이었다. 80년 5월 광주가 배태시킨, 거대한 변화를 예고한 87년 6월은 신군부의 합헌적 재집권을 통한 구체제의 지속으로 이어졌고 또 그 성과의 일부는 자유주의 보수야당에게 넘어갔다.

    새로운 가능성의 집합적 열정과 희망이 삽시간에 당혹감과 좌절감의 쓰라린 경험으로 변한 것이다. 결국 한국의 80년대는 많은 열망과 치열한 실천에도 불구하고 성취한 것은 극히 적었던 시기로 귀결되면서, “왜 그 때 우리는 보다 현명하지 못했을까”라는 자책의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글을 통해 진보신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이런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추 때문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촛불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나름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온 진보신당과 특히 당의 지도부에게 요청하고 싶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당 지도부에게 요청하고 싶은 것들

    사태의 전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책임 있는 실천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촛불이 던진 거대한 문화적 충격과 운동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신당이 진지한 사색을 통해 풀어야 할 숙제라는 것이다.

    우선, 누구도 섣불리 말할 수 없을 때, 변화되고 있는 사태에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 일단은 한 매듭을 짓고 숨을 고르자, 방법을 좀 바꿔서 진행해 보자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용기있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이명박 퇴진을 외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명박 정부 5년 통치 기간 동안 다양한 의제를 통해 저항적 축제의 장을 힘있게 열어갈 새로운 출발을 다각도로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촛불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할 때, 진보신당이 주목해야 할 실천적 대안은,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넘어서서 특히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과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민생의제, 생태환경과 평화의 문제,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그리고 주식회사 CEO에 의한 국정 운영이 가져올 파장 등 촛불의 빛에 가려진 주요 의제들을 촛불과 지속적으로 만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정당이라고 하면 모름지기 사태를 총체적으로 인식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촛불의 빛과 그늘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종합적 사고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현재 진보신당의 힘은 약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생 정당이라는 점에서, 그것도 한 석의 의석도 없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힘이 약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촛불의 화두들을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유리한 점이 있기도 하다.

    예컨대 아고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실천 양식으로서 평범한 보통사람들의 온라인-오프라인의 실시간 소통과 직접 행동으로의 표출, 시청과 거리의 광장에서의 다양한 상상력의 자유로운 분출, 즐거운 저항과 연대로서의 촛불 축제, 자기 절제와 성찰의 나눔, 칼라TV에 쏟아진 관심과 성원 등은 ‘진보의 재구성’과 ‘운동의 혁신’이라는 목표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진보신당이 깊이 사색해야 할 대목들일 것이다.

    진보신당이 해야 할 일들

    진보신당에 새로 가입한 당원들, 문화적 충격을 흡수한 기성의 당원들은 촛불의 화두를 실험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아니 일정하게는 그 실험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당게시판과 몇몇 지역에서 뿜어내는 열정과 기발한 상상력은 작은 아고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가히 놀랍다.

    준비가 지체되고 있는 것은 오히려 ‘확신의 딜레마’를 풀지 못하고 있는 당의 지도부와,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문화적 엄숙주의’와 ‘자기폐쇄적 회로망’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는 기성의 활동가들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역시도 여기서 예외가 아님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의 광장이 ‘변화된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처럼, 진보신당이 앞으로 추진할 다양한 새로운 실험들이 당 안팎의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을 던지면서 ‘나의 재발견’과 새롭게 거듭남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랬을 때 비로소 진보신당의 길이 ‘시지푸스의 돌’이 아니라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되고, 새로운 주체들의 탄생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작은 디딤돌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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