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없는 혈전 네트워크 대전쟁
        2008년 07월 09일 08: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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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배후는 있다. 그리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악마(신)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격언(?)은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협상을 망치는 결정적인 요인은 세부적인 것에 있다는 의미에서 협상의 격언으로 쓰이기도 하고, 상황을 분석하지 못하고 오판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세부적인 것들을 놓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에서 사회학에서도 종종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자연과학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촛불시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촛불시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정된 분석 방식에만 길들여져 있다. 원인을 누가 제공했는가 그 의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어떻게 하나의 목적을 갖게 할 것인가? 등등

    우리의 분석과 계획수립에서 대중의 상태는 단편적으로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조합원의 의식수준이 어떠한가? 현장간부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이 조직은 당장 싸울 수 있는가? 등등 이러한 방법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유용했고, 앞으로도 우리의 조직활동에서 이 방법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 촛불정국은 깔끔하게 분석되지 않는다. 특히 대중의 상태는 더더욱 오리무중이다. 이 투쟁의 앞길은 아예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가 바로 디테일에 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보자. 5월 2일이나 지금이나 촛불집회에는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만 모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쇠고기보다는 다른 의제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있다. 쇠고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목적이 그것뿐인 사람들부터 이명박 정권의 모든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촛불집회 참석자의 다양성이 큰 힘으로 전화됐다.(사진=레디앙)
     

    이 다양성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대책회의가 지금까지 촛불집회를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다양성을 무리하게 하나로 모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이는 반대의 측면에서는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

    시위대 구성하는 ‘엄청난’ 다양성

    조금만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보자. 억눌린 교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학생들, 광우병의 공포에 분노하여 살고 싶다고 외치는 어린 학생들.

    자식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먹이고 싶어하는 부모들, 물가폭등에 분노한 서민들, 대운하를 용인할 수 없는 시민들.

    또 민영화에 반대하는 시민들,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통령에게 화가 난 사람들, 사회에 불만이 누적된 소외계층들(실업자, 도시빈민, 노숙자들까지)이 촛불집회를 이끌어 왔다.

    심지어 동방신기에게 광우병 쇠고기를 먹일 수 없다는 철없는 학생들도 나왔고, 박근혜를 떨어뜨린 이명박이 싫다는 보수성향의 사람들까지 거리로 나왔다.

    다양성은 참가자들의 정치적 목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만으로 60차 촛불문화제는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촛불집회의 의제보다 다른 데 관심이 더 많은 이들도 많다. 사진을 찍으러 나온 수백 명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들은 결국 촛불의 외침에 동화되었고, 개인적 관심의 사진에서 보도사진의 형태, 더 나아가 경찰의 불법성을 폭로하는 증거사진으로 발전하고 있다), 개인 인터넷 생중계를 하러 다니는 수십 명의 카메라맨과 그 무리들도 있다.

    향수에 의해 나온 사람도 있다. 80년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 위해 연행을 각오해야 했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향수를 느끼러 나온 386세대들은 촛불집회의 분위기에 감동받고 있다. 저녁이면 시청과 세종로 사거리 주변 곳곳에서는 동문회가 열린다.

    다양성, 자발성, 창조성

    특정 몇몇의 민주동문회를 제외하고 이들의 목적은 참으로 단순하다. 그냥 나오라 그러면 안 나오는 동문들이 촛불집회도 참여하고 술도 한잔 먹자고 하면 나온다는 것이다. 공연을 하러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는 데이트를 하러 나오는 연인들도 있다. 하긴 2008년 6월 서울에서 시청과 세종로 사거리만큼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가 있겠는가?

    이러한 다양성들은 자발성을 확산시키고 있고, 그 자발성이 50차 촛불집회를 이끌고 왔다. 동원되지 않은 촛불, 조직되지 않은 촛불, 다양성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모인 촛불. 이것이 정답이고 이것이 배후이다.

    이러한 다양성과 자발성은 창조성을 끌어냈다. 5월 24일 이전까지 촛불집회를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손피켓의 문구들, 그 재치발랄함과 창의성들. 내로라하는 명연설가들을 뛰어넘는 재치로 대중을 압도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발언들.

    번호표를 나누어 주어야만 집회가 진행될 만큼 몰려드는 자유발언자들. 끊임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구호, 새로운 선전물들. 사진기를 들고 피켓만 찍으러 다녀도 지칠 정도로 집회 자체가 생기 넘쳤다.

    그런데 우리 노동조합은?

    잠시 우리(노동조합)의 집회와 비교해 보자. 집회의 목적에 대한 (때로는 치열하기까지 한) 토론, 조직지침 하달, 조직 동원, 틀에 박힌 집회(민중의례, 십수 년째 비슷한 사람들의 항상 똑 같은 발언,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 민중가요 부르기, 공연 한 토막, 결의문 낭독).

    이제는 선전전조차 동반하지 않고 시민들에 대한 홍보방송조차 하지 않는 따분하고 무의미한 행진, 그 과정에서 조합원 대부분이 빠져나간 후 진행하는 마무리 집회…… 너무 심하게 표현했지만, 그래도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노동자도 국민이고, 시민이다. 아니 노동자가 국민과 시민의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국민과 시민에게 있는 다양성이 왜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없는 것일까?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민주와 자유, 노동해방과 진보를 부르짖는 우리들이 한편으로는 또 다른 획일주의를 양산해 오고 그것에 익숙해져 있던 것은 아닐까?

    국민과 시민에게는 있는 자발성이 왜 우리 조합원들에게는 보이지 않을까? 그 자발성을 끌어내지 못한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덧 조합원들조차 길들여져서 자발성을 잊은 지 오래된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창조성도 없고,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서로 악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창조적이고 생기 넘치는 촛불집회, 그로 인해 더 다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끌어들이는 연쇄작용. 이것이 2008년 5, 6, 7월 촛불의 배후이다.

    네트워크, 촛불의 확대재생산 거점

    이러한 촛불의 다양성, 자발성, 창조성을 모아내고 확대재생산하는 공간이 있다. 바로 네트워크이다. 대표적으로는 인터넷이다. 여기서 네트워크라고 하는 이유는 인터넷을 포함해, 휴대전화, 디지털 사진, 소형 비디오카메라와 무선네트워킹 기술, 노트북의 경량화와 PDA의 진보 등 정보화 기술 전반을 포함해서 가리키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에 가서 관심 있게 관찰해보면 휴대전화는 인터넷과는 또 다른 형태의 여론을 형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냥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인터넷에 올라온 촛불 관련 글이나 언론 기사를 보는 느낌과 나의 친구가 전화(또는 문자)로 알려주는 촛불집회 상황의 느낌이 같을까? 아니다.

    경찰이 물대포를 쏘면 여기저기서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누구는 통화를 한다. 누구는 문자를 보낸다. 친구나 가족이나 연인에게…… “촛불집회 나왔는데, 경찰들이 물대포 쏘고 있어……” 이 한 마디 상황을 전달받은 사람들은 촛불시위대는 선이고 경찰은 악이라는 단순한 판단을 하게 된다.

    이것이 휴대전화와 문자의 힘이다. 이것이 세상의 변화를 아직도 모르는 이명박의 판단착오 중 하나이다. 전파 범위는 넓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신뢰성을 담은 여론이다.

    인터넷의 경우는 두 가지로 접근해야 한다. 하나는 전통적인 방식의 인터넷 문화이다. 정보공유, 토론, 카페활동 등.(물론 전통적이라고 불리는 이 방식조차 이명박 정권에게는 이해 안되는 새로운 방식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전통적이라 불리는 것은 4~5년 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인터넷에서 4~5년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진화를 의미한다. 더 이상 무슨 긴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온-오프의 경계가 허물어지다

    최근에 와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온라인 동호회들이 온오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소통하고 오프라인에서는 행동하고. 바로 이것이 진보진영조차 놓치고 있었던 흐름이다. 온오프의 경계가 허물어진 신호탄이 바로 5월 2일 촛불집회였다. 기억해보자. 여중생의 글 하나로 시작된 온라인 행동이 수일 만에 만 여명을 광장으로 끌어내었다.

    또 하나는 새로운 방식의 인터넷 문화이다. 포탈뉴스, 블로그, 생중계가 대표적이다. 포탈뉴스는 다음, 네이버, 파란 등과 같은 포탈사이트의 메인에 올라오는 뉴스들을 말한다. 이 뉴스들을 유심히 보면 조중동을 비롯한 주요 일간지 기사가 별로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그 이유가 기사제공에 많은 대가를 요구하고, 인터넷이 언론화되는 것을 경계했던 조중동에게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결과 포탈에 뉴스를 제공하는 제공자들은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이 강한 곳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참세상이나 오마이뉴스로부터 뉴시스, 노컷뉴스, CBS 등. 이번 촛불 정국에서 이들이 제공하는 뉴스의 대부분은 촛불집회를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내용들이었다.

    결국 평범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접속해서 볼 수 있는 기사 및 여론의 대부분은 “미국산쇠고기는 수입되면 안되고, 정부는 검역주권을 포기했고, 국민들은 숭고한 저항을 하고 있다”는 논조의 기사와 촛불시위를 정당화하는 시각의 사진들이었다.

    이제 정신을 차린 정권과 보수세력, 조중동은 인터넷을 통제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촛불정국이 어떻게 마무리 되느냐와 별도로 전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전쟁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진영 대부분이 그렇다.(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젊은 활동가들과 다함께 정도 만이 심각함을 느끼는 듯하다.)

    촛불 정국에 전개되는 치열한 전쟁

    이 전쟁에서 정권과 자본이 완승하게 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장벽, 상상할 수 없이 강력하고 높은 장벽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될 것이다. 네트워크 자체는 (누군가가 장악하지 않는다면) 방향성이 없다.

    하지만 진보진영 전체의 역량을 뛰어넘는 파워를 가진 네트워크를 빼앗길 것인가? 권력에 의한 네트워크 통제……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

    4~5년 전부터 본격화된 블로그는 이제 최대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촛불정국에서 다음 블로그는 뉴스재생산, 여론주도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여러 포탈의 다양한 블로그에서 촛불집회에 대한 기사가 확대 재생산되고, 촛불집회에 대한 긍정적인 소감이 주류를 이루고, 촛불집회를 촬영한 사진들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어떠한 정치성향도 없는 회원 70만 명의 DSLR클럽(디지털카메라 사용자클럽)에는 시민기자단 게시판이 신설되었고, 서울에만 200명의 시민기자단이 완장을 차고 활동 중이다. 기자단을 확대해 달라는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기자들과 같거나 더 좋은 성능의 장비를 들고 프로에 가까운 실력으로 현장의 사진을 가감 없이 인터넷에 제공하고 있다.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고 발표한 경찰의 거짓말은 동이 트기 전에 블로거들의 생생한 사진과 동영상으로 폭로되고, 오전에 시민단체들과 야당의 항의를 받고 경찰책임자가 사과하는 놀라운 속도전이 사이버상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민기자들은 직업 사진기자들을 집회 현장 한가운데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사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경찰에게 얻어맞는 시민’ 사진과 동영상은 언론사 기자들과 카메라맨으로 하여금 같은 사진과 영상을 찍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배후는 있다

    인터넷 생중계의 위력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오마이뉴스는 5월31일~6월2일까지 생중계 접속자수를 총 100만 명 이상으로 집계했다.(5월 한달 누적접속자수가 500만 명이란다……) 물론 100만 명이 보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동일한 사람이 PC를 재부팅하여 다시 접속한 경우와 네트워크 에러로 끊어졌다가 재접속한 경우 등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2박 3일 동안 최소 50만 명 이상이 보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촛불현장에서 활약중인 칼라TV. 사진은 시민사진기자들의 모임인 진보신당 ‘칼라뉴스’ 팀이 찍었다.
     

    진보신당 칼라TV를 포함해 아프리카 생방송 채널은 1,000여 개가 열렸고, 한 채널당 평균 200명 이상이 접속한 것으로 계산하면 20만 명 이상의 접속자를 추정할 수 있다. 공중파 방송의 시청률에 빗대어 보면 최저 3~4%에서 최대 10%의 시청률이 나오는 실로 엄청난 결과치이다.

    5월 2일 촛불집회의 시작이 인터넷에 올라온 중학생의 글이라는 것, 취임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대통령에 대한 반발이 안단테라는 고등학생의 탄핵서명운동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60차에 이르는 촛불집회가 인터넷에서 논의되고 준비되고 조직되고 확대 재생산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촛불의 배후는 인터넷이고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유령이 서울을 방황하고 있다. 네트워크에서 나온 촛불이라는 유령이.

    우리는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가능성의 토대가 자본주의의 산물인 네트워크에 있다는 것이고, 한국의 자본이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는 한국의 정보통신 기반시설에 있다는 것이지만… 물론 이 모든 것은 노동자가 이룩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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