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무지개 사회주의자”
        2008년 08월 05일 04: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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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 홈페이지 ‘쟁점과 토론’ 방에서 전진을 주제로 한 논쟁이 붙었다. 때론 감정적 표현이 서로를 향해 거침없이 날아가고, 또 때론 배꼽 잡게 만드는 글이 올라왔다. 전진이 발표한 문건의 글투부터 사회주의의 적합성, 패권주의, 진보정당과 정파의 관계, 노동계급 중심성, 그리고 전진에 대한 궁금증까지 다양한 소재가 게시판을 메웠다.

    논쟁 소감

       
     ▲ 한석호 ‘전진’ 전 집행위원장 (사진=참세상)

    논쟁이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벌어져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이번 논쟁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다. 전진을 매개로 벌어진 논쟁의 각종 쟁점은 제2창당 과정에서 어차피 겪어야 할 논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미리 짚어보는 계기가 되었고, 진보신당 구성원들의 다양한 생각과 고민, 그리고 걱정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전진‘만’을 주제로 한 논쟁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한 논쟁은 추상적이거나 현학적이거나, 또는 우기거나 하는 식의 끝없는 말싸움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실제 이번 논쟁과정과 내용을 훑어보면 그런 증거를 많이 발견한다.

    논쟁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하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려면, 구체적 실천과 사실을 매개로 해야 한다. 그 실천과 사실 속에서 드러나는 생각과 노선, 정책을 가지고 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논쟁은 제2창당을 둘러싼 과정과 내용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해야 한다.

    역할을 방기하고 있는 진보신당

    그러나 애석하게도 진보신당은 아직까지 제2창당 과정을 밟지 않고 있다. 총선 공동대응기구로 형식만 창당한 진보신당은 내용 창당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6월 4일의 확대운영위를 통해 진보신당의 성격을 ‘제2창당 준비기구’로 전환했음에도, 전당적으로 그와 관련한 행보를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제2창당을 천천히 하자는 의견에 동의한다. 지난 10년간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던 제1기 진보정당 시대를 올바로 평가하고,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제2기 진보정당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그 과정이 조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진보신당에서는 이 뜻의 의미가 왜곡되어 있다. 제2창당의 논의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제2창당과 관련한 고민은 ‘대표단’과 ‘확대운영위’와 ‘제2창당 TF’에서만 맴돌고 있다. 그것을 당원들에게 열지 않고 있다. 그것을 당 밖의 진보진영에게 열지 않고 있다. 그것을 국민들을 향해 열지 않고 있다.

    천천히 가자는 것의 의미가 ‘준비된 누군가에 의해 내용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진보신당 당원이 이미 14,000명을 넘어섰는데, 겨우 30여 명의 확대운영위원과 5명의 대표단이 그들 모두를 대의하고 있는 비민주적 상황도 부담스럽다.

    내 자신, 진보신당의 확대운영위원이며 제2창당 TF 위원으로서 어떻게 이 상황을 돌파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내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함을 한탄한다.

    진보신당의 대다수 당원은 집권정당을 꿈꾸고 있다. 우리의 집권은 노무현 집권과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노무현처럼 어떤 특수한 바람과 상황에 의해 집권까지는 했으나 그 뒤에는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그런 집권이 아니다. 우리의 집권은 우리의 정책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런 집권이어야 한다.

       
     ▲ 사진=진보신당

    그러한 집권이 되려면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 ‘지못미’와 촛불이라는 상황이 없더라도 튼튼하게 뒷받침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인터넷을 할 줄 모르고, 뉴스를 자주 접하지 못하더라도 진보신당을 항상 지지하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모든 계급계층을 향해 나서야 하고, 모든 지역을 향해 나서야 한다. 지금부터 그것을 위한 기획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진보신당은 촛불과 아고라와 당 게시판과 수도권만 바라보고 있다. 대표단과 확대운영위와 중앙당은 자기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다시 전진논쟁으로 돌아와서

    진보신당 게시판의 전진논쟁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이 하나 있다. 우주 만물이 한 순간도 고정된 것 없이 변화하듯 운동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자꾸만 과거의 어떤 것을 고정시켜 논쟁을 하려는 태도였다.

    전진의 사회주의를 논쟁하려면, ‘사회주의=레닌=폭력혁명’이라는 식의 논쟁이어서는 아무런 성과가 없다. 한 사람의 인간조차도 하나의 정형화된 논리체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듯이, 사상과 이념은 결코 하나의 논리체계만 가진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 아나키스트가 진보정당에 입당하는 일이 있듯이, 사회주의자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사회주의는 다양한 갈래로 나뉘어 제각각의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전진의 사회주의를 논쟁하려면, 전진의 사회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펼쳤는가를 놓고 논쟁해야 한다. 전진의 사회주의는 민주노동당 시절 ‘사회연대전략’을 주장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시절 전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세력이 사회연대전략에 반대했다.

    심지어 자유주의 성향의 국민파마저도 반대했다. 사회연대전략이 개량주의라는 이유였다. 결국 사회연대전략은 민주노동당 정책으로 채택되지 못했고, 분당과 함께 진보신당의 정책으로 채택될 수 있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논쟁은 피곤할 뿐이다. 나는 지금의 전진 사회주의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나 폭력혁명론, 지도와 피지도, 또는 개량이냐 혁명이냐, 하는 접근이나 심증으로 비판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난감하다. ‘현재’의 전진 사회주의는 이미 그것을 내려놓았는데 말이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1983년 학생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나의 사회주의의 내용은 바뀌었다.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지 않고서는 그 어떤 민주주의나 노동자 민중의 생존도 보장받지 못하던 전두환 군사파쇼 정권 아래서 나의 사회주의는 폭력혁명을 꿈꾸었다.

    나의 사회주의에는 핏빛이 선연했다. 군사독재정권을 어떤 방식으로든 무너뜨리지 않으면, 민중이 죽는 세상이었다. 실제 수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고 나의 사회주의도 바뀌었다. 나는 최근 강연할 일이 생기면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한다. “나는 진달래 사회주의자고 무지개 사회주의자입니다.” 4월 어느 날 홍천강을 향해 달리던 차안에서 창밖의 산과 진달래를 바라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내가 그리는 사회주의는 저 산하의 진달래처럼 되어야 한다. 진달래는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언뜻 보면 진달래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진달래는 다른 나무와 꽃과 풀과 돌과 어우러져 온 산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군락을 이루면 이루는 대로, 홀로 떨어져 있으면 떨어져 있는 대로 아름답다. 붉은 색이면서도 편안하고 핏빛의 섬뜩함도 아니다. 자세히 보면 진달래마다 색과 모양이 다르다. 또 한 그루의 진달래에서도 그 색과 모양이 다양하다.”

    무지개 사회주의자라는 의미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생각이다. 다원주의 정신이고, 똘레랑스 정신이다. 빨주노초파남보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는 비 갠 뒤의 무지개 같은 사회주의를 꿈꾼다. 태양에도 붉은 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검은색의 흑점이 있다.

    전진 논쟁의 계기가 된 총노선에 지도력이란 표현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 표현에 발끈했다. 내가 지금 지도력이란 표현의 사전적 의미, 사회학적 의미, 철학적 의미까지 끄집어내어 논쟁을 하면, 그들을 충분히 설득할 자신이 있지만, 그렇게 하면 결국 언어유희밖에 안 될 것 같아서 그만두고, 내 느낌 하나만 덧붙일까 한다. 만약 총노선에서 지도력이란 표현 대신 리더십이란 표현을 썼어도 그렇게 격한 반응이 나왔을까, 하는 점이다.

    ‘지도력’과 ‘리더십’

    인간사회의 어떤 조직이든 패권은 있다. 심지어는 진보신당 당게파에게도 있다. 문제는 패권주의다. 민주노동당 시절 전진에 패권주의 요소가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진이란 집단이 조직적으로 패권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패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민주노동당 시절 전진으로 대표되었던 평등파와 연합세력으로 대표되었던 자주파의 투쟁은 노선투쟁이었다. 모든 것을 통일로 귀착시키려고 하는 종북적 노선에 맞서 민주노동당을 민생 중심의 정당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주로 선거와 논쟁을 통해 나타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권력투쟁이라 하고, 심각한 정파갈등이라고 바라본 것에 이의가 없다.

       
     ▲ 2005 전진 정치대회(사진=전진)

    우리가 지금 한나라당이나 민주당과 경쟁하고 투쟁하는 것도 권력투쟁이고, 누구는 사색당파에 비유할 만큼 격렬한 당파갈등이 맞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본질을 안다. 그것은 바로 그들과의 노선투쟁이다. 진보신당이 그들과의 권력투쟁에 나선 이유는 진보신당의 노선을 이 땅에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다.

    패권주의 요소가 있었기에 전진을 해체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진보신당의 누군가 공직선거에 나가서 선거부정을 했다고 진보신당을 해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진보신당이 전당적으로 선거부정을 행하면서 국민을 대상으로 패권주의를 펼쳤다면 해체해야 한다. 어떤 집단이 지속적으로 패권주의를 행한다면, 그들을 몰아내든지 당을 분리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의 분당 투쟁이 끝난 이후, 내가 <레디앙>에 투고했던 글의 일부다.

    전진 해체에 동의하지 않아

    “적과 싸우다가 적을 닮아간다고 합니다. 패악질에 가까울 정도로 몰상식한 자주파의 당권장악에 맞서 싸우다가 평등파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평등파도 대리 투표를 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자주파와의 당내투쟁이 진흙탕 개싸움처럼 되고, 그 속에서 평등파도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민주노동당에서 운동성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권력놀음과 정치술수만 판치겠구나’ 하는 위기감이 있었습니다. 그 고리를 깨부수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무엇보다 제 자신에 대한 환멸이었습니다.

    저는 같은 편이라는 이유로 평등파가 저지른 다양한 부정행위를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운동의 법정 앞에 범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진보신당 창당투쟁에 앞장선 것은 진보정치운동의 법정에 스스로를 고발하는 반성의식이었던 겁니다.” – 「나는 왜 미친듯이 신당 창당에 나섰나」, 2008. 2. 5

    지금 전진은 과도기다. 임시총회를 거치며 형식적으로는 정비가 되었지만, 실제는 아직 그렇지 않다. 일부의 회원들이 탈퇴했고, 또 일부의 회원들이 재정비 과정에서 탈퇴하겠다고 한다.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잘못된 것인데, 전진이 분당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므로 책임지고 해체해야 한다”라는 의견으로부터, “전진이 제2창당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탈퇴의 이유는 다양하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러나 나는 전진을 탈퇴하지 않는다. 전진과 전진 회원들이 내가 바라는 사회주의 상에 동의하도록 만들기 위해 남아서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내가 탈퇴하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전진이 허점투성이이지만, 전진이 민주노동당 시절의 대선예비경선을 거치며 깨달은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것은 바로 정치운동에서 무엇보다 심각한 계보정치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마치며

    전진 논쟁에서 다루어진 소주제가 많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몇 개의 소주제만 특화해서 썼다. 정파의 문제, 노동계급 중심성의 문제, 비정규직 대책의 문제 등은 거론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일정하게 논쟁이 진척되었고, 또 제2창당의 과정에서 반드시 다루어질 것이기에 일단 접을까 한다.

    역시 문제는 진보신당이다. 지금 진보신당은 당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 그리고 촛불에만 모든 것을 의지하고 편승한 채 자기 임무를 방기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주장하고자 한다. 진보신당 대표단과 확대운영위와 중앙당은 제2창당을 위한 고민과 논의를 모든 당원에게 풀어놓아야 한다. 당 밖의 진보세력에게 풀어놓아야 한다. 국민들에게 풀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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