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민주주의 감수성 vs 무가베 전쟁
        2008년 07월 03일 09: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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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뉴시스
     

    직장동료와 휴가일정 조정하고, 가족 모여 어디 놀러갈지 머리 맞대야 할 이 때, 우리는 뜨거운 여름 펄펄 끓는 아스팔트로 다시 뛰어들어야 할지를 고민한다.

    이명박이 그리고 그의 전임 통치자들이 국민에게 선사한 2008년 바캉스 선물이다.

    7월 2일 시작된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점점 그 강도를 높여갈 예정이다. 물론 과거의 전례를 볼 때 한국 노동조합들의 총파업이 갑작스레 일사불란하고 위력적으로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촛불에 호응하여 너무 늦지 않게 일손을 놓았다는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

    1987년에는 봄 거리와 가을 공장 사이에 여름이 가로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그 간극이 봄과 여름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노동운동에게 남은 문제는, 함께 내건 촛불의 대자적 주장과 사업장 요구안 중 어느 정도에 타결 지점을 둘 것인가, 개별 사업장들의 요구안이 수용되었을 때 파업을 얼마나 지속하여 촛불을 지원할 것인가 하는 타결 시점이다. 타결 지점이 넓고 타결 시점이 늦다면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복권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민주노조운동은 명맥 유지가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시대를 맞게 될 것이다. 

    7월 5일에는 대규모의 촛불문화제, 7월 9일에는 전국농민대회가 열린다. 가톨릭 사제들에 이어 개신교 목회자들과 조계종 승려들까지 촛불에 합류했다. 명박산성 농성을 깨고 공세에 나선 이명박 정권으로서는 다시 사면초가 형국이다.

    이명박, 증상 완화-중병 심화

    여론 동향은 조금 미묘하다. 조사기관마다, 보도하는 언론마다, 해석 주체마다 중구난방이라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두 가지 추이와 두 가지 특징이 눈에 띈다. 이명박에 대한 지지가 조금 늘고, 촛불집회에 대한 지지가 조금 준 것이 지난 며칠 간의 여론 추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도는 6월 11일 15.2%(KSOI)에서 특별기자회견과 추가협상을 거친 6월 28일 20.7%(조선일보 & 한국갤럽)로 올랐으며,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20% 안팎의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지지도 상승이 영남권의 중장년층에 의한 것임을 볼 때,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다기보다는 골수 지지층의 일부가 위기를 느껴 재응집한 것에 불과하다. 더구나 15% 수준의 이전 지지율이라는 것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즉 올라설 수밖에 없는 최저점이었다는 측면에서 최근의 지지율 상승은 증시의 ‘기술적 반등’에 가깝다.

    ‘촛불집회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과반(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 6.23일, 58.5% – KBS&미디어리서치, 6.24일, 50.8% – 조선일보&한국갤럽, 6.28일, 57.2%)을 넘어선 현상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위와 같은 여론이 과반을 점하면서도 촛불집회에 대한 동감과 과잉진압에 대한 반발 역시 50~60% 수준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의 여론 추이는 이명박과 촛불 사이에서 지지의 이동이 있었다기보다는 한국민의 여론에서 흔히 나타나는 온정적 태도와 촛불집회에 대한 피로도가 반영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최근의 여론은 이명박과 촛불의 작용 모두를 관망하는 휴지기(休止期)에 접어든 듯하다.

    이러한 여론 변화보다 더 의미 있는 특징이 두 가지 있는데, 그 하나는 추가협상 이후에도 미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이 여전히 요지부동(‘안전하지 않다’ 68.1%, KBS&미디어리서치, 6.24일 – ‘불안 해소되지 않았다’ 한겨레&동서리서치, 6.24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다소의 변동을 수반하는 관망적 여론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뇌관을 안고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여론 특징은 취임 100일 조사에서는 대통령 직무수행 부정평가 이유 중 ‘국민들 의견을 수렴 안 한다’는 것이 21.3%(한국갤럽, 5.31일)였는데, 지금은 같은 의견이 39.6%(한국갤럽, 6.28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점이다. 그 한 달 사이에 대통령 사과 등 나름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미 쇠고기 정책에 대한 반대가 정권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감기 증상은 좀 나았지만, 폐렴에 걸린 꼴이다.

    탄압과 경제난 협박은 이명박의 자충수

    소강기를 지나 다시 기지개를 켜는 촛불과 부정적 여론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대응은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다. 위에 든 여론 지표의 의미를 분석평가하지 않고, 상승률 자체에 눈이 먼 것인지 다시 안하무인으로 날뛰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경찰은 압수한 진보연대의 컴퓨터에서 엄청난 양의 이적표현물을 발견하고, ‘간첩단’ 몇 개는 만들 수 있다고 득의양양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보연대나 참여연대가 한 일이라곤 ‘집회신고 대행 및 방송설비 임대업’에 지나지 않는다. 위계적(位階的) 사고에 젖은 이명박 정부가 촛불의 웹네트워크를 이해하기 어렵기야 하겠지만, 이런 식의 대응은 촛불 시위자들을 겁주기는커녕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하다.

    ‘불순 배후’와 ‘순수 시민’을 가르려는 이명박 정권의 전략이 온전히 실현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연 인원 1,0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촛불집회 참여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어떤 논리보다도 강하다. 특히 여럿이 공유한 집합경험은 자기 확신을 강화한다. 사람들은 누가 시켜 거리에 나왔던 것이 아니고, 스스로 분노를 외치며 희열을 느꼈다. 누군가 “너는 옳지 않아”라고 질책해봤자, 괴리감과 적대감을 증폭할 뿐이다.

    요 며칠 신문과 방송 머리 기사는 ‘경제난’으로 도배됐고, 장관들은 각각의 부처 관점에서 촛불과 경제난을 연관시키는 창조력을 보여줬다. 그런데 “경제가 어려우니 참자”는 협박은 당장은 약간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최악의 자충수가 될 것이다.

    실재하는 경제난에 더해 위기의식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 이명박 정권의 존립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다 했다. 토끼 놓친 개의 운명은 더욱 자명하다.

    미국 쇠고기에서 비롯된 난국이긴 하지만, 꼭 그 문제를 해결해야 이명박의 활로가 열리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환심을 살 다른 성과를 내놓거나 정치적 안정을 꾀한다면 병 걸린 쇠고기를 국민에게 먹이면서도 정권은 유지될 수 있다.

    국민 여론이 아무리 안 좋더라도 정치적 동맹자들의 지지가 굳건하다면 정치적 안정을 꾀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당은 별 재미 못 보면서도 집회 현장을 떠날 수 없고, 이회창은 촛불을 편들고, 박근혜 지지자들은 아예 집회에 참석했다. 이명박은 모든 시험을 마치고 권력의 정점에 올랐지만, 다른 동맹자들은 미국 쇠고기에 대한 내심이 어떻든 촛불 주위를 얼쩡거려야 다음 시험에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된 한국 정치에서 과거와 같이 강고한 지배동맹은 재연되기 어렵다. 더욱 큰 문제는 나름의 정치적 해법을 내 국회를 정상화한다 할지라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참여할 그 국회가 촛불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백방이 무효

    쇠고기 난국을 모면할 최고의 묘책은 단연 경제성장이다. 부정 대출, 인사 문란, 섹스 스캔들로 휘청대던 클린턴은 경제적 성공으로 국민 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노태우의 인플레이션과 김영삼의 환란을 동시에 만들어내고 있다.

    다음 위기 모면책은 전쟁을 일삼은 부시처럼 그리고 대개의 통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단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국제적 화해를 향한 최종 국면에서 홀로 이북을 적대하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도 국내 자본도 그런 모험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북한과의 화해협력이 국민 지지를 가져오지도 않을 것이다. 화해협력의 혜택이 국민에게까지 돌아가는 데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뿐더러, 국민들은 반북이든 연북이든 정치 의제로서의 북한 문제에 시큰둥하기 때문이다.

    사르코지처럼 내부의 적을 만들래야 그 대상이 마땅치 않고, 이도저도 안 돼 유혹받게 될 전두환식 공포정치는 더 큰 반발과 통치시스템의 이탈을 불러올 것이다.

    사면초가의 청와대는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도 아닌데…”라고 푸념했다. 그런데 쿠데타 일으킨 것처럼 군 것은 이명박 정권 스스로 아닌가? 사회운동 단체에 대한 탄압이야 어느 정부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운동단체로 볼 수 없는 인터넷모임의 깃발과 서버를 빼앗고, 그 시삽을 수배하고, 정치깡패를 동원해 친위테러를 가하는 따위 짓은 ‘막걸리 국보법’ 시절과 다름 없다.

    “아무래도 … 지금을 5.16, 12.12 군사 쿠데타 직후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처럼 어거지, 막무가내일 수 있단 말인가?” – 이재영, 「불쌍하구나, 조선과 동아」, <레디앙>, 5. 8

    수구세력의 ‘잃어버린 10년’론은 절반쯤 옳다. 완벽하게 고치자면 ‘잊어버린 10년’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그 1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지, 대통령이나 정권과 시민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전혀 모른다.

    10년 동안 대통령 자리를 잃고, 대통령에 목이 마르다 보니 대통령이 대단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데, 10년 전에는 대단했지만 지금 대통령의 권능은 별 대단치 않다.

    무가베와의 문화충돌…무정부 상태

    이제 상황은 미국과 어떤 협상 결과를 내놓을 것인지라든가, 국회를 정상화시킨다는 류의 대책을 훌쩍 넘어섰다. “왜 국민 이야기를 듣지 않느냐?”, “먼저 국민 이야기를 겸허히 듣겠습니다” 같은 절차적 소통의 문제도 넘어섰다.

    충돌의 와중에 이명박 정권이 누구이고, 촛불이 누구인지 하는 정체가 드러났고, 정체성 괴리는 더욱 깊어졌다. 촛불 시위자들은 유럽 민주주의 나라 사람들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명박 주변의 정치사회의식은 제3세계 수준, 아시아판 무가베다. 촛불집회는 남한 사회 내부의 일종의 문화충돌이다.

    촛불집회가 대통령선거를 압도하거나 대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상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공직자의 선출이 구성적 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촛불집회는 또 다른 구성적 행위를 하고 있고, 투표용지 없는 그 선거에서 이명박은 이미 불신임됐다.

    이제 이명박은 전두환 만큼이나 적은 통치 명분을 가지게 됐다. 노태우의 허약한 권위, 김영삼의 머리, 노무현의 아집(egoistic)을 겸비하고 있음도 드러났다.

    한쪽은 5년을 인내할 용의가 없고 다른 한쪽은 견뎌낼 재주가 없다는 점에서 상황은 파국을 향한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정치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상대를 압도하고 있지도 못하므로 당장 파국이 닥칠 가능성도 크지 않다.

    그렇다면 파국이 잠복하며 내연하고, 정권은 상시적 위기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사람들은 권위를 상실한 정권을 하대(下待)하며 거부하고, 불만자들은 아무 때나 도전하고 나설 것이다.

    상점이 약탈당하고 공공기관이 불타는 그런 무정부 상태, 조중동이 을러대는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잔여 임기는 사회조정을 위한 정부의 권능이 작동하지 못하는 무정부 상태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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