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연 좌파는 대중운동에서 무능한가?
        2008년 07월 02일 10: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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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이 켜질 때 처음부터 외통수였다. 정국 타개책은 재협상밖에 없었다. 그래서 재협상을 받아들이는 대신 적당히 손을 대는 선에서 무마를 시도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추가 ‘논의’를 통해 적당히 손을 대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이것은 악수(惡手)도 아니었다. 이 게임 판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수였다. 이명박 정권은 가능한 유일한 수라고 강변했지만, 촛불시위를 통해 뒤바뀐 게임의 규칙에서 애초부터 그것은 가능한 수로 인정될 수 없었다. 성마르고 무지한 지배세력에게 남은 방법은 이 판 전체를 뒤집어엎는 것이었다.

    지난 주말 이명박 정권이 자행한 잔혹한 폭력 진압은 판을 깨서 외통수를 물리려는 필사적인 광란이었다. 그들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권력이 그들의 손을 빠져 나가고 있음을. 그래서 폭력을 통해 빠져나가는 권력을 어떻게든 일단 붙들어 놓겠다는 어리석은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이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 촛불 물결 속의 사제단 행렬
     

    얼핏 보면 이상하게도 좌파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그토록 기다려온 대중들이 거리에 나타나자 이 대중들을 평가하기에 바빴다. 대중들 속에서 대중들과 함께 싸우고 그 흐름에 작은 물줄기를 내서 ‘한걸음씩’ 더 멀리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대신, 대중들과 거리를 둔 채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 여기에 비판적 사고를 집중시켰다.

    왜? 실천이나 행위가 아니라 해석이나 평론에 기울었다는 것은 전혀 핵심이 아니다. 좌파에게, ‘이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 대중들은 그들이 기다리던 대중들이 아니었다. 대중들 없이 척박한 지형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해온 좌파에게 비로소 도달한 대중들은 정치적 주체에 미달한 듯 여겨졌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위해 꿋꿋하게 싸워온 좌파에게 대중들은 기껏해야 단편적인 사고와 즉자적인 행동, 거품처럼 사그라질 듯한 일시적인 자발성의 분출에 불과했다. 거리의 정치와 일상의 정치를 구분하고 일상의 정치에서도 과연 이 대중들이 정치적 주체로 정립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때, 좌파의 비판적 사고는 대중들과 일정한 거리를 취한다.

    이것을 좌파의 무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좌파와 대중들의 간격은 좌파의 무능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대중들 없이 싸워온 좌파의 오랜 투쟁과정에서 유래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좌파의 이론적·실천적 이데올로기는 어느 순간 갑자기 거리로 뛰쳐나온 대중들의 그것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좌파의 이데올로기는 물론 문자 그대로 대항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촛불시위에서 대한민국의 주권, 민주공화국 등 지배이데올로기를 반복·변주할 뿐인 대중들을 어떻게 순순히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데올로기적 반역

    그러나 대중들은 무엇으로 반역하는가? 대중운동이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폭발하듯이, 이미 보편성을 획득한 지배이데올로기가 아니라면 대중들이 그 속에서 모순을 인식하고 투쟁할 수 있는 별도의 준비된 대항이데올로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좌파가 기다리는 그런 대항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순수한’ 대중들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촛불시위의 이데올로기는 물론 지배이데올로기이다. 대한민국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예비군복을 입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적 반역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지배이데올로기를 대항이데올로기로 교체하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상징적 좌표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촛불시위를 통해 변화한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의 상징적 좌표가 일부는 근본적으로 일부는 소소하게 변화했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이렇게 상징적 좌표가 변화함으로써 기존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이 열린다. 게임의 규칙이 달라지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권이 누차 말하듯이 재협상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두 달 전이었다면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재협상이 결코 불가능한 것들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좌파는 지배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상징적 좌표를 변화시키는 이런 대중운동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며, 기꺼이 그런 정치적 주체에 ‘미달’하는 대중들의 일부가 되길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좌파의 기본적인 태도는 벤야민이 말했듯이, “혁명의 지도자에게 대중이 아주 중요하다면, 지도자의 가장 큰 업적은 대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에 자신을 거듭 편입시킴으로써 항상 그 대중을 위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데 있다.” 덧붙이자면, 맑스의 말처럼 그 가장 ‘단호한’ 일부가 되는 데 있다.

    상징적 좌표의 변화를 법적·제도적 변화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기막힌 시점에서 벤야민의 이 말을 행위로 만들어냈다. 그들의 연설과 행진에서 감동을 받은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한 친구의 말처럼, 누가 먼저 브레이크를 밟을 것인가, 누가 먼저 더 큰 희생자를 낼 것인가를 내기에 걸고 이명박 정권과 촛불시위가 정면으로 질주하는 상황에서, 사제단은 다른 물줄기를 창출했고 촛불을 보호하고 지속시키는 큰 몫을 해냈다. 그러나 이런 정세 변화는 약이면서 독이다.

    지난 6월 10일 명박산성에 가로막힌 촛불시위에서 확인된 것은 ‘돌파구’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이후 여러 시국토론회에서 결국 다시 확인한 것도 이것이었다. 상징적 좌표는 변화했으나 법적·제도적 변화로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태의 지속. 혹자는 상징적 좌표의 변화를 찬미하는 데 머물렀고, 혹자는 굳이 법적·제도적 변화로 나아갈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상징적 좌표의 변화는 두 말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중요하며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는 차후에 솟아날 새로운 정치의 잠재태가 있다. 그러나 법적·제도적 변화를 통해 그것을 일정하게 현실화시킬 수 있는 틀을 구성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이 대중운동의 소멸 이후에도 전개될 사회운동과 다음에 일어날 대중운동에게, 그리고 다시 일상에서 살아갈 시민들에게 주어지는 커다란 ‘선물’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진보신당과 일부에서 제기한 재신임 국민투표는 그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중들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주지하듯이 이명박 정권의 퇴진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이후를 책임질 대안적인 정치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안적인 정치세력의 빈곤이 현 촛불의 진로에서 가장 큰 장애물인 셈이다.

    중요한 국면에서 사제단이 그 역할의 일부를 대신한 것은 다행스럽다. 그러나 당연히 사제단은 정치세력이 아니라 종교세력이며, 이런 이유로 촛불의 지평이 종교 담론의 틀에 갇힐 위험성이 존재한다. 지금 정세에서 비폭력과 평화는 전술적으로 인정될 필요가 있으며, 굳이 원론적인 차원에서 비폭력의 한계를 논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사제단은 법적·제도적 변화를 추동하는 데 한계가 있고, 이미 이뤄낸 상징적 좌표의 변화마저도 종교 담론의 틀에서는 그 의미 지평이 기존 좌표로 일정하게 퇴행할 수도 있다. 소박한 믿음과는 달리, 대중운동에서 진화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 여러 좌파 세력들이 연합을 이뤄 대중들이 신뢰할 수 있는 조직체를 형성하고, 대중운동이 흘러갈 새로운 물줄기를 대는 역할을 수행하길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것일까?

    굿바이, 2MB

    사제단은 이명박 정권의 폭력 진압을 막아내는 중요한 역할을 개시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사제단이 대중들의 마음을 아주 정확히 읽어냈기 때문이다. 냉소적인 사람들에게조차 미움과 분노를 일으켜 슬픈 정념을 확산시키던 잔혹한 상황은, 사제단의 행위를 통해 위로와 자긍심, 평화와 사랑으로 변화되었다.

    촛불은 더 멀리 퍼질 것이고, 아마도 오는 7월 5일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새로운 기념일로 새겨질 것이다. 좌파는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해서 되새기며 여기서 진행된 정치에 관해 가능한 많은 것을 흡수해야 한다.

    2MB는 대중들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했다. 그때그때 뻔한 사기술로 소나기만 피하고 상대가 누그러진 듯 보이면 즉시 말을 뒤집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폭력의 강도를 더 높이는 것뿐이지만, 이것은 곧 자신을 옥좨는 자승자박이 될 것이다.

    이미 그에게서 권력의 정당성은 사라졌고, 대중들은 그를 믿지 않으며, 그 주변에서 한 자리씩 차지한 인물들, 한나라당의 의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명박 정권은 끝났다. 법적·제도적 절차가 남아 있고, 이런 절차는 더 늦춰질 수만 있을 것이다. 굿바이, 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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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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