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대로 배우지도 참여하지도 못했다
        2008년 06월 25일 07: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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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실장.
     

    5월 초 시작된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이 두 달이 다 돼가는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그 촛불은 참으로 이상하고 미약하게 시작했으나, 지금은 정권의 기조를 뒤흔들고, 기존의 운동권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촛불의 의제는 국민건강권과 검역주권에 이어 한반도 대운하, 의료 교육의 시장화, 공기업 민영화, 조중동의 언론 장악 저지와 방송민영화 저지로 확대되고 있다. 또 화물연대 투쟁에도 많은 지지를 보냈다.

    추가 협상을 계기로 이번 주부터 정권의 반격이 시작되고 두 달간 지속된 피로도와 겹쳐 촛불의 밝기는 옅어지고 있다. 향후 촛불이 어디까지 갈지는 지금 이 시점에서 예측하기 어렵다. 정권의 반격에 맞서  횃불처럼 타오를 것인지, 아니면 미약한 촛불로 사그라들지, 그도 아니면 또 하나의 제도화로 귀착될 것인지.

    그러나 촛불이 우리 사회와 운동권에 준 충격과 의미는 기성의 운동과 이론으로 재단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는 이 글에서 촛불 정국에서 노동운동이 무엇을 해야하나 보다는 촛불이 노동운동에 준 충격과 의미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새로운 촛불문화와 충격

    어느 날 거리에서 만난 촛불은 새로운 문화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근엄함과 비장미에 젖었던 운동권 문화와 다른 쾌활함과 즐거움이 그곳에 있었다.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는 유연하면서도 힘있는 즐거운 투쟁, 물흐르듯이 막으면 막는대로 다른 분출구를 찾아가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승리를 나았다.

    운동권식의 일사불란함과 불패의 단일대오가 아닌, 소울 드레서, 화장발, 82cook 등의 도무지 운동과 연계없는 삼삼오오 대오와 까페가 즐겁게 노닐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투쟁이 벌어지고 뒤편에서는 열심히 경찰을 배경으로 연인들이 디카를 찍어대고, 한쪽에서는 노래와 밴드가 울려퍼지고, 언니들의 굽 높은 구두행진이 이어지고, 여중생, 여고생의 교복행렬도 이어지는…

    그것은 욕망과 차이의 긍정과 연대였다. 규율과 동일시와 통합이 아닌 각각을 긍정하고 연대하는 아름다움이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창발성, 그것은 운동이 스스로 진화하는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여중생과 여고생이 나서고 온라인의 아고라가 나서고, 시민운동이 나서고 노동운동이 나서고, 기성의 정치권을 움직이고, 나아가서는 세계를 놀라게 하는 그 무엇이 자그마한 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불태우는 것처럼 진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의사소통의 매개고리와 양식, 회의와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실시간 운동이 인터넷에 올라가고, 하나의 제안이 수십, 수백의 흐름으로 모아지고, 서로 다양한 의견과 견해가 소통의 바다에서 진화하고 있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소통과 현장에서 움직이는 즉석 토론 속에서 주체간 의사소통은 아름답게 정돈되고 있었다. 밑에서부터 올라오고 백가쟁명의 제안 속에서 자연 선택되는 아름다운 제안들. 촛불소녀, 집단자수, 닭장차투어, 조중동앞 쓰레기 모아놓기, 명박산성, 국민토성 등등 창조적 아이디어들이 그때그때 즉석에서 제안되고 발전했다. 

    이명박 정부들어서 움츠리던 운동권에게 그것은 참으로 희안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쭈뼛쭈뼛하면서 조심스레 참여하는 노동운동은 주도자의 위치가 아니라 수동적 참여자의 위치에서 아직도 벋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우습게도 정권은 배후세력이라고 낙인을 찍고 있지만 말이다.

    관성에 찌든 노동운동

    노동운동 내에서 촛불에 참여하자는 논의를 할때 기존 조직활동에 가장 가깝게 복무하던 ‘동지’들이 가장 반대가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촛불의 의미와 한계는? 이명박 정권에 대항한 반신자유주의 전선에 복무하고 있는가? 우리들 투쟁이 묻혀가고 있지 않은가? 등등.

    우리가 그 의미와 한계를 따지고, 향후의 전술을 고민할 때 운동은 저 멀리 진화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민주노총이 집회를 하고 참여한 날, 각 대오들은 자신들의 주체적 구호보다는 깃발을 열심히 나부끼고 있었다. 촛불의 자발성은 넘쳐나는데도 노조 대오들은 민주노총의 지침을 열심히 소리 높혀 찾았다.

    저들이 막고 있는데 뚫어야 하나, 평화적 시위로만 한정할 것인가? 언제 마무리하는가? 민주노총의 지침은 왜 제대로 안주나? 우리는 지침에 죽고 산다. 그러면서도 지침에 대해 욕을 하고, 문제 제기하며 안주거리로 삼는다. 자주적 참여에 따른 창발성을 누리지 못하고 왠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해하면서 말이다.

    6.14일의 비정규철폐 집회와 행진, 마무리 집회, 그리고 촛불 참여.  촛불에 가리워졌다고 했지만 촛불 아닌 우리의 집회임에도 조합원의 대중적 참여는 없었다. 촛불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집회 형식과 내용도 여전히 지도부 중심의 연사와 가르치기식 연설로 일관되었다. 한달이 넘는 기간동안 촛불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제대로 배우지도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촛불과 노동운동의 융합을!

    그렇다고 노동운동이 넋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정부고시에 항의하는 운송저지 투쟁, 6.10 조합원 총회와 대규모 참여, 총파업 찬반투표와 대의원대회를 통한 7.2 총파업 결의, 시청광장에서의 천막과 의제별 집회 주도, 범대위에 적극 참가 등등 촛불과 노동운동의 결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색하긴 하지만 깃발부대들은 촛불 행렬과 함께 거리에서 하나돼 움직이고 있다.

    다만, 여전히 우리 노동운동은 촛불의 다양성과 즐거움, 주체성과 창발성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자발적 참여보다는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관성, 지도부가 가르치고 따르게 하는 운동풍토, 비장함을 강요하지만 관성화된 집회문화, 쌍방향 의사소통보다는 일방향, 내리먹이기식 의사소통, 패거리 문화 등등…

    한편, 촛불은 한계가 있다. 비정규직, 사회양극화 문제에 여전히 인색하다. 비정규 노동자의 피눈물이 외면당하고 있으며, 수백만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 결정일을 앞두고 쟁점화조차 되지 않고 있다. 구조적 인식에 취약하고 순진하다.

    그러나 이것은 성장하는 모든 운동이 겪는 성장통이고 한계지점이다. 이는 쟁점화에 성공하지 못한 기존 노동운동의 몫이다. 촛불에 죄를 물을 일이 아니다.

    이제 주장한다. 촛불에서 드러난 새로운 운동과 양식을 보고 배우자고. 주도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융합하고 교차함으로써 운동의 혁신과 거듭남을 만들어내자고. 낡은 틀을 뛰어넘어 새로움을 결합하자고. 사업장에서, 지역에서, 각 산별에서 촛불이 보여준 운동의 새로움으로 거듭나자고.

    민주노총의 총파업과 촛불결합은 그 선언과 관성적 실천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촛불이 보여주는 새로운 운동으로 도약할 때, 그때만이 노동운동은 국민적 지지와 비정규 노동자들까지 포함한 1,500만 노동자의 운동으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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