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 25일에 아무 일도 없었다면…
        2008년 06월 25일 05: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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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년 전 오늘 새벽, 전쟁이 시작됐다. 이후 3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교전에 참여한 모든 국적의 군인 40여만 명이 전사했다.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른 이 사망자 수는 최대 70여만 명에 이른다. 민간인 피해는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확실한 것은 전쟁으로 인해 죽은 시민의 수가 군인의 수보다 월등히 많다는 점이다.

    이 전쟁이 제국주의의 음모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었건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괴뢰집단의 ‘침략전쟁’이었건, 3년간의 치열한 전쟁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됐던 모든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58년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았다.

       
    ▲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 탱크
     

    만약 58년 전에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수뇌부가 군사행동에 대한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라는 수단을 포기했더라면 역사는 그 후로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에 대한 가정법은 별 쓸모없는 상상이다. 하지만 최소한 한국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남겼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는 될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에서는 아무런 특이사항도 없었다는 가정 하에서 남과 북,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보자.

    전선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이미 남한은 전반적 우경화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여운형의 암살과 박헌영의 월북은 남반부 좌파에게 더 이상 지도부가 없음을 의미했다.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대부분의 조직이 파괴됐고 여기에는 남로당의 무원칙한 지도와 좌충우돌식의 대중투쟁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조직이 무너졌다고 해서 사람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전평에 가입했던 수많은 노동자들과 남로당, 근로인민당에 가입했던 기층 당원들은 숨죽인 채였지만 어쨌든 갓 수립된 ‘대한민국’의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3년간의 전쟁 기간을 통해 이들은 월북하거나, 전쟁에 참여하거나, 학살당하거나 하는 과정을 거쳐 남한 사회에서 ‘일소’되어 버렸다. 한국전쟁은 북에는 극좌만이, 남에는 극우만이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기형사회를 만들었다. (손호철, "한국정치학의 재구상")

    남한 단독정부 수립, 즉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은 반공우익과 옛 친일파 세력의 권력 강화 과정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이후 우리가 역사에서 경험한 극단적인 반공 국가는 가능하지 않았다. 전후 이승만 정권이 권력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한 것도 이 반공이데올로기였다. 전쟁의 참혹한 기억은 정권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무기가 됐다.

    전쟁 초기 부산 정치파동 사건에서 보여지 듯 이승만 정권은 사실 그렇게 안정적인 체제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이 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리더십은 재난에 가까웠다. 그것을 합리화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근거는 항상 한국전쟁의 기억과 북한의 존재에서 나왔다. 남한 민중들이 그 기억을 넘어 독재를 타도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북에서 김일성 분파가 전쟁을 통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성과를 올렸다면 이승만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확실히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회나 명분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 범국민적 지도자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싶었던 이승만은 전쟁이 터지자 지도력의 위기를 드러내며 정권은 고사하고 ‘국가’ 자체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이후 이승만은 전쟁 중인 1951년 친위정당인 자유당을 조직하고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반대세력을 제거하면서 사실상의 자유당 일당체제를 추구했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정권의 반대자를 제거하면서 남한을 ‘대안부재’ 상태로 만들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미 밝혀진 것처럼 미국은 전쟁기간에도 이미 이승만이 한반도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리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도구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대안이 있었다면 미국은 이승만을 언제라도 제거했을 것이다. 케네디 행정부가 베트남의 고딘디엠을 제거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직면했을 최대의 위험은 미국의 공작이 아니었을 것이다. 손호철 교수(서강대)는 50년대 한국전쟁에도 불구하고 잔존한 진보적 대중의 힘이 정치과정에서 어떻게 표출됐는지 분석한 바 있다. (손호철, "해방 50년의 한국정치") 바로 조봉암과 진보당이다.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한국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남로당이 복원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겠지만 진보적인 대중정당이 활동할 공간과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또한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과 진보당을 탄압하는 데 사용했던 비이성적 반공이데올로기도 그렇게 예리하게 작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이후 50년의 역사에서 반복된 남한의 좌익부재의 정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진보당보다 더 확장된 경험을 이미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승만 정권의 뒤를 이은 보수정권과 진보적인 야당의 관계가 민주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근거는 없다. 분단과 빈곤은 어떤 식으로든 한국사회의 저성장과 불안을 재생산했을 것이다.

    1960년 4월에 혁명이 발생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정치군인 박정희와 김종필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간에 현대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1945년 이후 동아시아에서 군사쿠데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일본, 대만, 싱가포르 뿐이라는 점도 한국전쟁의 유무와 관계없이 남한에 군사정권이 들어섰을 것이라는 가정을 뒷받침해준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한국전쟁이 있었건 없었건 미소간의 냉전은 어쨌든 악화됐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1950년에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이후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없었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어쩌면 베트남이 걸었던 길이 한반도에서 재현됐을 지도 모른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기 이전부터 이미 지리산에는 유격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치러야 했던 대가

    한국전쟁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발을 디뎠던 모든 세력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한국전쟁의 최대피해자는 다름 아닌 개전 당사자인 북한이었다. 공격개시 명령을 하달하면서 김일성이 승리를 확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이 회복불능의 상태까지 파괴될 것이라는 상상은 분명히 안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은 북한의 주장과 관계없이 북한의 패배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개전의 책임을 지기는커녕 한국전쟁 전에 시작된 조선노동당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1950년 이전에 김일성은 이미 노동당 내부에서 지도적 위치를 굳혀가고 있었지만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독점적 지위를 획득했다. 물론 김일성은 전쟁의 승리라는 전과를 통해 이런 지위를 차지하려 했을 것이다.

    전황은 그의 예상과는 관계없이 전개됐다. 3년간의 전쟁에서 그가 지위를 유지하고 살아남은 것도 대단한 능력이지만 그가 이런 상황을 딛고 1950년대 노동당 내부의 분파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최소한 그의 정치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치력은 김일성이 무슨 이유에서든 1950년, 전쟁을 포기했다하더라도 50년대의 권력투쟁에서 그의 분파를 승리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변수들도 새로 등장했을 것이다.

    우선 1949년 중국내전의 종결 후 귀국한 대규모 집단의 존재다. 알다시피 이들은 갓 창설된 인민군의 중핵을 형성했고 한국전쟁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만약 전쟁이 없었고 그래서 이들이 별 피해 없이 여전히 북한 군부의 다수, 그것도 지도부부터 기층까지 광범위한 다수를 형성하고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김일성이 50년대 권력투쟁과정에서 마주했던 상대들은 하나같이 허약한 집단이었다. 남로당 세력은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북에는 기반이 전혀 없는 집단이었고, 소련파는 소련이라는 배경세력만 제외하면 남로당보다 더 허약한 집단이었다. 다만 중국에서 기인한 연안파는 달랐다. 이들은 수적으로도 김일성의 세력보다 우월했고 다년간의 무장투쟁 과정을 통해 단련된 집단이었다. 더군다나 중국혁명의 성공을 통해 든든한 후원세력까지 가지게 됐다.

    만약 김일성의 분파가 60년대 초반까지 연안파와 이들이 장악한 군부를 제압할 수 없었다면 노동당은 중소분쟁이 격화되면서 심각한 내부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북한은 공산권국가 중 몽고와 함께 중국, 소련과 국경이 이어진 특이한 조건을 가졌다.

    많은 연구자들은 ‘주체사상’의 기원을 중소분쟁 시기 두 사회주의 강대국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김일성 정권의 노력을 이론적으로 정리하려 한 데서 출발한다고 분석한다. 중국과 소련의 간섭으로부터 김일성과 노동당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고안된 정치이론이 훗날 철학으로 확장되고, 교리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없었고, 북한의 권력투쟁이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면 ‘주체사상’과 ‘세습제’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지금과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을 것이다. 물론 북한의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됐을지는 상상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경제는 다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김일성이 전쟁이라는 수단을 포기했더라면 북한의 경제는 훨씬 더 빠르게, 더 거대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70년대 무렵까지 북한의 경제가 남한의 경제 보다 앞서 있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소리 죽여 말할 비밀이 아니다. 해외 기관들의 경제지표조사는 한국전쟁 이후 70년대까지 북한의 경제가 남한 경제를 압도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북한의 경제 재건을 이야기할 때 보통 일본제국주의 지배기에 대륙진출을 위해 한반도 북부에 군수품 생산을 위한 중공업과 산업시설이 밀집했고 전후 이것이 북한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는 설명을 한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전쟁 이전 북한에는 그런 설비와 인력이 존재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북한은 미공군 보고서 표현에 따르면 ‘석기시대 이전의 상태’나 다름없었다. 이는 북한의 전쟁수행능력을 0으로 만들기 위해 3년 동안 미군이 쏟아 부은 폭탄의 힘이었다.

       
    ▲ 미군의 폭격에 상처 입은 북한의 대지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의 반격으로 김일성은 통일은커녕 중국에 망명정부를 차려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인민해방군이 참전한 후에야 김일성은 겨우 한반도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군에 밀린 미국은 북한에 대한 전략폭격을 시작했다.

    1차세계대전까지의 전쟁은 전선에 무력이 집중되는 형태였지만 2차세계대전은 상대방의 전쟁수행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후방의 군수생산시설과 지원시설에 대한 전략폭격을 시도했다. 이런 폭격은 주로 대도시와 공장에 집중됐다.

    전략폭격으로 전방의 군인보다 후방의 노동자가 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일본에 가해진 두 차례의 핵공격은 비인도적 행위지만 물리적인 피해와 끔찍함은 사실 재래식 폭탄에 의한 도쿄공습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오키나와와 괌에서 출발한 미공군 폭격기들은 쉴 틈도 없이 북한 전역에 고폭탄과 네이팜탄, 소이탄을 쏟아 부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기들을 제지할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군의 항공정찰기가 저고도로 북한 곳곳을 탐색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일본의 맥아더 사령부는 옛 총독부 관료들로부터 북한에 위치한 산업시설의 정확한 위치 정보를 제공받았다.

    미군은 지금도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대한 폭격은 2차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 당시 북폭 같은 전략폭격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에서 유럽과 태평양에 연합군이 떨어트린 폭탄이 2백십만톤인데 비해 좁은 한반도에 떨어트린 폭탄이 45만4천톤이다. 베트남 전에서는 7백6십만톤으로 늘어났다.

    중국으로의 진격을 원했던 맥아더와 달리 백악관은 중국으로의 확전을 경계해 미군 폭격기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폭격기를 몰았던 미군의 참전수기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군기들은 종종 만주의 건물이나 다리에 폭탄을 떨어뜨리곤 했다. 작전성과 분석을 위해 폭격 전후를 촬영해야 하는데 압록강과 두만강 아래로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종사들은 휴전 후 북한 지역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고 말할 정도였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됐을 때 북한은 잿더미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상태였다. 수많은 기술자들이 전쟁통에 죽어간 것은 둘째 치고 노동력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하지만 한반도에 먼저 등장한 기적은 대동강의 기적이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북한의 산업시설이 온전히 보전됐다면, 여성들을 모조리 공장에 밀어 넣어야 할 만큼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더라면, 경제적 성과를 군사비 지출에 쏟아 붓지 않아도 됐더라면, 북한의 경제성장이 실제 역사보다 더 빠르게 진행됐으리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상상이 아니다. 어쩌면 북한의 성장이 일본의 성장보다 더 빠르게 진행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은 그런 기회와 가능성을 모두 앗아갔다.

    물론 북한이 고도성장을 달성했다고 가정하더라도 80년대 북한경제를 정체에 빠뜨린 요인들은 반복됐을 것이기 때문에 1989년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북한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을 것이다. 북한이 중국, 베트남과 같은 시장경제로의 재진입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마 한반도는 90년대 예멘통일과정과 유사한 통일과정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장담하는데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은 결코 유쾌한 기록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 치러야 했던 대가

    한국전쟁 이전에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주한미군’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지 않았을까.

    지정학적으로 보면 한반도가 일본 내 미군의 작전반경 안에 포함되고, 휴전 후 한반도에 남은 지상군의 역할이 인계철선의 역할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실제 전쟁이 없었을 경우 지금처럼 한반도 안에 대규모 미군 주둔지가 존재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동서냉전이 전개된 과정을 보면 미군은 어떤 방식이 됐든지 간에 남한에 복귀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과정은 베트남에 미군이 증원되는 과정과 유사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대규모 군사고문단이, 이어서 독립된 전투부대가 50년대 후반에는 이미 남한에 주둔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미군의 남한 복귀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1950년, 남북이 전쟁을 피해갔다고 해서 이후 한반도에 전쟁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제한적인 충돌이건 전면적인 내전이건 제국주의 세력이 임의로 설정한 38선이라는 분계선은 언제, 어떤 형태로든 폭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북한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니면 반대로 남한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가능했을 것이다.

    어쩌면 미국이 두 개의 전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베트남전쟁이 격화된 시점에서 북한이 무력에 의한 통일을 시도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1945년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둘로 나누는 순간 이미 무력충돌은 한반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고정됐다. 그 방법이 현실이 되는 데 5년밖에 안 걸렸다.

    김일성의 선택으로 북한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앞에서 이야기했다. 한 가지 추가할 것은 한국전쟁을 통해 북한이 미군에 대한 ‘끝없는 공포’를 얻었다는 점이다. 북한의 선전구호가 어떠하든 북한, 특히 군부는 휴전 이후 다시 미군과 붙으면 북한은 절멸할 것이라는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불바다를 만들겠다’는 호언은 어쩌면 내면의 두려움을 표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개번 매코맥의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 브루스 커밍스의 "김정일 코드"를 보라.)

    우리는 북한군의 다수가 휴전선에 집결해 있는 사실을 그들이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증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남한군의 다수도 휴전선에 집중돼 있다. 휴전선의 남쪽엔 미군도 자리 잡고 있다. 같은 논리라면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과 미국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한국전쟁은 북한에는 미군이라는 공포를, 남한에는 공산주의라는 공포를 남겨줬다. 그 공포는 한반도 정치를 규정하는 첫 번째 힘이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남한은 그 공포에서 간신히 벗어나려 하고 있고, 북한은 그 공포에서 벗어나 보려고 미국과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일본 혁명의 가능성

    남한과 북한 만큼이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극적인 변화를 겪었을 나라는 바로 일본이다. 패전국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재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런데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었더라면 일본은 혁명적인 위기에 빠졌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 후 일본의 경제는 당연히 몰락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식량생산량이 필요량에 한참 미달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도시의 식량난은 심각했다. 공산품을 수출해 부족한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주요한 산업시설은 전쟁으로 파괴됐거나 만주, 조선 같은 식민지에 있었다. 1946년 식량메이데이 사건을 비롯해 1950년 이전 주요파업은 ‘먹을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이 ‘한국전쟁 특수’였다.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52년의 메이데이 집회는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가 사망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이른바 ‘피의 메이데이’ 사건이다. 실제 역사가 이 정도인데 한국전쟁을 통한 경제재건이 없었다면 일본의 계급투쟁은 더욱 격렬하게 진행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혁명적 위기가 일본혁명으로 확장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50년대 일본공산당의 정세판단 능력이나 지도력도 그렇고 무엇보다 일본인들에게 미군정이 가졌던 권위와 위압감 때문이다. 또한 미군정도 탄압과 원조 두 가지 방법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오히려 소련과 중국이 미제국주의가 일본을 식민지화하려는 욕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 막 시작된 냉전의 국제적 대결장이 됐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1964년 도쿄 올림픽도 없었을 것이고 ‘소니’라는 이름도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진정 잊지 말아야 할 것

    북한은 한국전쟁이 미제의 침략을 막아내고 승리한 전쟁이라고 한다. 남한은 북괴의 남침을 응징한 전쟁이라고 한다. 중국은 사회주의형제를 돕고 미국을 패퇴시킨 전쟁이라고 한다. 옛 소련도 승리를 주장했다. 미국은 남한을 방어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진 전쟁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박태균 교수(서울대)는 한국전쟁에 발을 들여놓은 모두가 실패했다고 했다. 북이건 남이건 어느 방향으로든 통일은 없었다. 김일성은 서울만 점령하면 남반부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으로 판단했지만 현실은 인민군이 전진하면서 인민들을 동원하는 수동혁명만이 가능했다.

    남한 정권은 패전의 문턱까지 갔다가 UN군의 깃발을 들고 온 미군에게 백지수표를 써주고 나서야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38선을 원상복구하는 임무만 부여받은 UN군은 무리하게 북진을 시도하다 중국을 끌어들이고 군사적으로도 큰 상처를 입고 후퇴했다. 미군이 압록강을 넘는 것을 두려워 했던 중국은 남의 나라 전쟁에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피해로 따지면 각 나라 정부나 군대가 입은 자존심의 상처, 혹은 경제적인 손실은 전쟁 당시 한반도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입은 피해에 비교할 것이 못된다. 무엇보다도 전쟁으로 인해 상실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회와 가능성은 수치나 글로 표현할 수 없다.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상상할 때 우리가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죽어간 이들이 당연히 누려야 했을 미래의 시간들이다.

    전쟁을 시작한 김일성의 계산 속에도, 서울을 버리고 도주하던 이승만의 머리 속에도, 핵무기 사용을 줄기차게 요구하던 맥아더의 주장 속에도 이런 고민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근대 이후 다수의 국가가 참여해 장기간 벌인 전쟁에서 명시적 승자가 없는 최초의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오직 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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