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촛불은 절망입니다"
        2008년 06월 24일 06: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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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누구도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도 ‘강하고 독한 투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꿈쩍 않는 현실’이, "아직도 안끝났어?"라고 쉽게 던지는 질문들이 그들을 일년이 되도록 거리로 내몰았다.

       
      ▲뉴코아 강남점 앞에 모인 조합원들.(사진=김은성 기자)
     

    그들에게 지금 가장 절박한 건 투쟁에 대한 헌사가 아니라 당장 집안의 불을 켤 수 있는 전기 요금이 필요했다. 그들은 또 승리가 절박한 만큼 두려워했다. 어느 덧 세상에서 잊혀질까 불안해했고,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본의아니게 상처를 주고 받는 것에 아파했고, 365일이라는 믿고 싶지 않은 투쟁 기간에 지치기도 했다.

    홈플러스와 교섭 한번도 못해

    비정규직 관련법 악용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이랜드-뉴코아노조 파업이 1년째 되는 23일. 뉴코아 강남점에 모인 이랜드 – 뉴코아 조합원들은 문화제를 열고 지난 1년을 돌아보며 투쟁 결의를 다졌다. 하지만 세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새 교섭 상대인 홈플러스는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교섭에 응하지 않아 아직까지 단 한번도 교섭이 진행되지 못해 교착상태에 빠졌다.

    또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사측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노조원 54명 가운데 해고자 10명과 정직처분을 받은 2명 등 총 12명에 대해서만 구제판정을 내리고 뉴코아 노조위원장과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 등 나머지 42명에 대해서는 구제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측에 의해 제기된 250억원 가량의 손배 가압류 소송도 여전히 진행 중이며, 처음 1800여명이었던 조합원은 이제 250여명 가량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오는 7월 비정규직법 확대 시행을 앞두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모범을 보여야할 공기업인 신용보증기금과 주택금융공사 등에서 비정규직 무더기 계약 해지가 발생해 제2의 이랜드, 뉴코아 사태가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제2의 이랜드 사태 재현 조짐

    이에 따라 비정규직법이 100인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 적용되는 오는 7월을 기점으로 전국 곳곳에서 ‘이랜드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전국사무연대노조 김호정 위원장은 "신용보증기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경우 정규직 전환 자격이 주어지는 24개월을 2개월 남기고 재계약을 거부당하고, 2년 이상 일한 주택금융공사 비정규직도 난데없이 해고를 당해 벼락을 맞았다"면서 "공기업이 이럴 정도면 영세한 중소사업장은 그 피해가 더 심각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런 사태 전개도 이랜드-뉴코아 투쟁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원컨 원치 않았든 ‘투쟁의 최전선’이 돼버린 이 싸움에서 밀릴 경우 후방이 속절없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뉴코아 박양수 위원장은 "다른 사업장들마저도 이랜드나 뉴코아가 되서는 안 된다"면서 "의지를 꺾지 말고 이랜드 자본이 완전히 손을 뗄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의 투쟁이 남겨놓은 것도 없는 건 아니다. 일반 국민들에게 비정규직 문제가 왜 문제인지를 알렸으며, 18개월 이상 근무한 이랜드 노동자들이 복직되고, 복귀한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이 개선됐다. 또 유사한 다른 사업장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는 등의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 이랜드 매장에 복귀한 뒤에도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이은하(가명, 54)씨는 "확실히 이랜드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진심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일을 할때 우리 의견을 묻기도 하는 등 노력하려는 자세가 눈에 보인다"면서,"남아서 싸우는 사람들이 정말 존경스럽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생계가 가장 큰 장애물

    이날 문화제에 참석한 조합원들은 생계의 어려움이 투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부분이 40~50대 주부이거나 가장인 조합원들은 돈과 손길이 필요할 자녀들을 두고 있다. 돈 문제로 가족간의 다툼부터 심지어 별거, 이혼 등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랜드 노조 김경욱 위원장은 "어떤 이들은 서울 시청 촛불을 보며 희망을 느끼지만 전 그 촛불 속에 기륭과 이랜드의 절규가 빠져 절망감을 느꼈다"면서 "그들에게는 촛불이 희망일지 모르지만, 전기가 모두 끊겨 전기 대신 어쩔 수 없이 촛불을 켜는 우리에게 촛불은 절망과 같은 의미"라며 침통해 했다. 

    단결이 뭔지, 투쟁이 뭔지도 모른 채 시작된 파업은 어느 새 장기 투쟁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여전히 팔뚝질이 어색한 그녀들은 행여 취업을 코 앞에 둔 아이들에게 제2, 제3의 이랜드 사태를 물려 줄까 싶어 퇴로 없는 길로 전진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정부는 무관심과 공권력 대응으로 일관하고, 시민들이 불을 지핀 촛불 행렬 속에는 이랜드 사태로 대변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문제는 빠져 있었다. 정당하고 소박한 권리이기에 당연히 이길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이들은 시민들에게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이 질 수밖에 없다는 게 확인될까 두려워

    이현주(가명, 50)씨는 "그 동안 몰랐던 세상의 모습을 알게 돼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고 덕분에 얻은 것이 많다"면서도 "요즘에는 우리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싸운다고 세상이 달라졌나 싶어 회의감과 패배감이 자꾸 찾아오는 것이 무섭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행여 우리 투쟁이 내 아이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은 역시 가진 사람들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인시킬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는 결코 투사가 되길 원하지 않는 그녀들이 투쟁을 멈출 수 없게 만든 아주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날 문화제는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 진보신당 이덕우 공동대표, 민주노총 주봉희, 허영구 부위원장, 서비스연맹 김형근 위원장. 코스콤 사업장 등 300여명이 함께 했다.

       
      ▲투쟁 1주년 승리결의 대회 및 문화제.
     

    한편, 비정규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동기획단(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의 힘, 인권단체연석회의 등)은 비정규법 시행 1년을 맞아 24일 국회에서 비정규법 토론회, 25일 비정규악법 증언대회, 최저임금 현실화 쟁취 집중투쟁, 28일 기륭 동조단식, 30일 비정규 악법 장례식 등 다양한 주간 공동행동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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