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촛불, 자신과의 승부로 접어들다
        2008년 06월 21일 03: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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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20일에 보내온 것으로, 본문은 20일 시점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 * *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하지만 예견이 빗나갔다면, 그것은 예견한 자들의 몫일 따름이다(나도 그 안에 포함된다). 이제 촛불시위는 2개월 만에 43회에 이르렀다. 이틀 꼴로 한 번씩, 아니 그보다 더 자주 타올라 이제 6월 20일을 맞이했다. 네티즌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정권 퇴진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예고한 날이다.

    1. 촛불의 성격?

    지난 16일 <경향신문>과 참여사회연구소 등이 공동으로 주최하여 ‘촛불집회와 한국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지식계가 본격적인 논의에 나선 것이다. 몇 가지 보도 자료를 보면 다음의 세 가지 쟁점이 토론회의 기본적인 골격을 이루었던 듯하다.

    첫째, 참여민주주의(거리의 정치)와 대의민주주의(제도정치)는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가. 둘째, 현재의 촛불 정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가령 87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것인가, 질적인 비약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셋째, 촛불 시위는 정권 퇴진 운동으로 번져나가야 하는가.

    물론 실제의 토론 자리에서는 보다 복잡한 논의가 긴장감 속에 오갔겠지만, 보도로 접하는 한에서는 저 토론회와 지금의 촛불 사이에는 어떤 단층이 느껴진다. 단적으로 말해, 상황은 유동적이나 상황을 다루는 시각은 그 상황 속에서 건져 올린 것이 아니라는 인상이다.

    주무르다가 말아버린 토론회

    무엇보다 저 토론회가 현재의 운동에 어떤 효과를 안길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물론, 지식계가 현실운동을 지도하거나 현실운동에 무기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론적인 논의는 대개의 경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직접 적용될 수 없으며, 왕왕 지식계와 현실운동은 공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저 토론회는 분명 현실운동을 분석하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꾸려졌다. 그럼에도 활로를 모색했다기보다는 현실운동을 주무르다가 만 인상을 받은 것이다.

    그 까닭은 토론회의 문제설정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저 논의에서 둘째, 셋째 쟁점은 첫째 쟁점에서 파생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로 가른다면 나오는 선택지는 양자가 병행해서 발전해야 한다는 뻔한 답 아니면, 협력하되 긴장관계를 유지하든가(국회 견제), 후자가 전자의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는(새로운 정당 창출) 것이겠다.

    그리고 여기에는 촛불의 정치는 제도정치와 다르며 대신할 수도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하여 촛불의 성과는 평가하되 그 평가는 늘 ‘제한’적이며, 제한적인만큼 제도정치의 유효성이 증명된다. 촛불은 제도정치가 무능했기 때문에 등장했지만, 매듭짓는 일은 역시 제도정치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분명 학문적으로는 타당하겠다. 하지만 지금의 촛불을 이해하는 데는 어떠한 허전함이 남는다.

    촛불의 성격을 규정하는 논의도 그렇다. 87년 체제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도 ‘민주화운동과 대의정치의 발전’이라는 정통성 속에 지금의 촛불을 담으려는 데서 기인하겠다. 물론 토론회에서는 여러 반대의견이 엿보인다.

       
      ▲새벽까지 국민대토론회에 참석한 시민들.(사진=레디앙)
     

    분석의 화려함과 처방의 초라함

    ‘유연자발집단’이니 ‘좌파 자유지상주의자’니 ‘제4의 결사체’니 지금의 운동주체를 기존의 운동세력과 구분하는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 경우도 발언을 쫓아가면, 결론은 예정된 것 마냥 참여민주주의의 확장으로 귀결되고 있어, 분석의 화려함과 처방의 초라함이 대비되었다.

    한편 촛불 시위는 정권 퇴진 운동으로 번져도 되는가라는 물음에도, 거리의 정치가 ‘어디까지’ 나아가도 되는가라는 ‘한계’의 문제가 설정되어 있다. 그 너머는 응당 ‘제도 정치’에서 해결할 영역인 셈이다. 물론 정권 퇴진 운동을 신중히 검토하자는 지적에는 고심이 묻어난다.

    거리의 운동이 장기간 지속되기 어렵고,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일이 자칫 제도정치의 기능을 마비시켜 결국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가 깔려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촛불이 정권 퇴진 운동에 발을 들여놓아선 안된다라는 신중한 판단은 ‘명박퇴진’이란 표제 아래 생산되는 감상적인 글보다 리얼리티가 덜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리의 정치는 제도정치로는 가늠할 수 없고, 촛불시위가 낳은 성과는 정책의 변화로만 잴 수 없기 때문이다. 토론회의 보도기사를 보건대, 이 결정적인 한 곳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2. 상황은 예견과 분석을 앞질렀다.

    이번 촛불 시위는 여러 면에서 특징적이다. 정권이 경찰력뿐만 아니라 교육청이나 지방기관 등 정부조직을 총동원하고 언론을 통제해도 좀처럼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운동의 중심체가 부재하여 단적으로 <조선일보>가 상황을 쥐지 못한 채 끌려 다닌다.

    한편, 좌파 운동세력이나 노동조합도 운동을 주도하지 못한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에서 지식계나 사상계는, 사태의 초기 광우병 위험과 관련하여 정보 제공자 역할을 맡았던 것을 제외한다면, 운동에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 지식계와 사상계에 요구되는 역할은 상황을 앞서 판단하고 선도하는 일도, 상황에 적당한 이름을 붙이거나 해석틀을 가져와 상황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일도 아닐 것이다. 인식하고 판단하는 일이라면, 매일의 논의 속에서 대중들이 소화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할 수는 있겠다. 그러면 대중은 그것을 쫓아가기보다 그조차도 자기표현의 밑거름으로 삼으리라.

    하지만 지금 대중들은 자신들의 흔적과 일궈놓은 성과들을 되돌아보기에는 너무도 바쁘다. 그렇다면, 현재 지식계와 사상계에서는 오히려 약간 처진 걸음으로 운동이 지나가고 난 자리를 훑으며, 거기서 사고의 자원을 길어 올리고 우리의 유산으로 삼을만한 요소를 착실히 모아가는 역할을 맡아야 할지 모르겠다.

    상황은 이처럼 예견과 분석을 앞질렀다. 지난 40차례의 촛불집회는 마흔 번의 반복이 아니었다. 매번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매번 문제를 조금씩 풀어갔다. 물론 그 때마다 우리에게는 불안한 예감이 있었다.

    40여 차례 촛불집회는 매번 성장해나갔다

    정부의 정치적인 제스처를 보이자 운동의 성장이 멈춰버리는 것은 아닌지, 초기 소고기 공방의 국면을 넘기자 운동의 불쏘시개가 될 만한 특종들이 생산되지 않아 운동의 동력이 저하되는 것은 아닌지, 폭력사태가 터지자 그 공포로 운동이 쪼개지거나 아니면 촛불이 순수성을 잃었다며 운동을 버리는 것은 아닌지.

    또 탄핵 요구가 나오자 이를 입에 담기 주저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떠나지 않을지, 무엇보다 ‘개인’과 ‘가족’의 건강권과 직결된 소고기 문제를 넘어 다른 사안으로 촛불이 번져갈 수 있는지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이 분노를 간직할 수 있는지.

    하지만 지난 2개월간 촛불은 그런 우려들을 하나씩 떨쳐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 성과를 하나하나씩 우리 감각에 새겨 자신의 자신감으로 길러왔다. 가령 처음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드문드문 터져 나오던 ‘탄핵 요구’가 이제는 차분한 판단 끝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되었다.

    탄핵을 내놓든 그렇지 않든 탄핵이 실현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정치권에 대한 우리의 자신감은 커졌고 행동반경은 늘어났다.

    또 한 가지. 현재의 사태를 대하는 감수성이 풍부해졌다. 광우병에 대한 공포로 시작되었던 운동이 이후 이명박 정권의 행태에 따라 분노를 머금고, 지금은 이만큼이나 운동을 이끌어왔다는 자신감과 서로가 만들어낸 소소한 이야기들 덕택에 흥겨움이 더해졌다.

    이제 우리에게는 여유도 유머도 있다. 마음속에 오직 공포와 분노만이 들어차 있다면, 절규가 터져 나오나 그 절규는 외치는 자에게도 너무 버겁다. 하지만 이제 다양한 감성에서 풍부한 표현이 나오고 있다. 한동안 잠잠해질 수 있을지언정 그만큼 운동은 호흡이 길어졌다. 상황은 불안한 예견들과 섣부른 판단들을 뒤로 하고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빗속에서도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사진=레디앙)
     

    3. 무형의 성과

    그 2개월 동안 우리에게는 많은 성과가 있었다. 우선 6월 10일에는 전국에서 100만 명이 모였다. 16일 <내일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은 드디어 한자리 수로 진입했다. 우리가 끌어내린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앞으로도 정부를 압박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기능하리라.

    물론 그 상징들은 역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100만이란 수치는 자칫 1만 개의 촛불을 평범하게 만들 수 있으며, 7.4% 지지율은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 하지만 저 상징에 데는 쪽은 우리가 아닌 이명박 정권이리라. 저 2개월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수치로 담기지 않는 운동의 방법을 터득했으니 말이다.

    또한 정부에서도 몇 가지 반응이 나오고 있다. 오늘(20일) 미국에서 소고기 추가협상을 이뤄냈으며, 엊그제(18일) 신문에는 여당인 한나라당 측에서 수도, 의료 등의 민영화를 이번 정권에서는 추진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으며, 어제(19일)는 이명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대운하도 접을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리고 조만간 개각이 예고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모두 정치적인 제스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의구심을 가진 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촛불이 타오르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변화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진정한 성과는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 굳이 며칠 전 토론회를 들먹이며 글을 시작한 이유가 있다. 이번 2개월을 통해 얻은 보다 큰 성과는 지지율과 같은 수치로도 좀처럼 표현되지 않고, 정치권의 역학관계로도 환원되지 않는 무형의 것이다.

    양비론을 걷어내댜

    감각상의 성과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운동의 성과인 동시에 동력이자 성패를 가늠하는 한 가지 척도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을 짚어두기로 하자.

    첫째, 어떤 이는 ‘국민공교육’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국민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 삼아 학습을 하고 있다. 아고라를 보라. 읽고 자료를 찾고, 무엇보다 쓴다. 비평하는 훈련을 서로에게 하고 시키고 있다. 2개월이 지나는 동안 아고라에서는 역할 분담이 생겨 자유게시판은 속보란 노릇을 하고 있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분석력과 깊이를 갖춘 글들이 속속들이 쏟아지고 있다.

    둘째, 정치감각이 바뀌고 있다. 정치적 체념의 다른 표현이었던 양비론을 걷어내고(지난 대선과 총선은 그 결정판이었다), 스스로 선택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반대와 찬성 사이의 공백지대에서도 생산적인 논점을 찾는 시도가 생기고 있다.

    정치적인 선택에서 동기만이 아니라 효과도 고려하고 있으며, 시각을 넓혀서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는 권력관계를 전방위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그리하여 뉴라이트, 조중동, 고엽제 전우회, 그리고 개신교 권력집단은 커밍아웃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각가지 정책들을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연관지어서 읽어내고 있다. 지금 이 시각에는 정부의 언론탄압에 맞서 시민들이 KBS와 MBC를 사수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아는데, 그들은 우리를 모른다

    셋째, 역사의 움직임에 참가한다는 감각이 생겼다. ‘친북좌파세력의 음모’라는 말은 낡았지만, 시위현장과 인터넷을 채우고 있는 시민들의 수사는 새롭기 그지없다.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이 점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낡은 말에 매달리고, 우리는 재기발랄한 표현방식을 만들어낼 때, 그리하여 그들은 알만한 존재가 되고 우리는 그들에게 알 수 없는 존재가 될 때, 더욱 새로우며 역사를 움직이는 쪽은 우리라는 자신감이 붙는다.

    시위에 나선 이들은 자신의 소박한 행동이 장엄한 촛불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참여자이자 관찰자로서 경험하고 있다. 이번 촛불시위는 87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도, 전혀 새로울 수도 있겠다. 세대마다 해석의 지평은 갈라지겠다.

    하지만 해석의 차이는 분열을 뜻하지 않는다. 그 모든 해석을 어우를 만큼 이번 운동은 품이 넓다. 모두들 앞을 향해서, 자신의 역사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자긍심을 갖기 때문이다.

    넷째, 사회적 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여중생들은 교복을 입고 직장인은 양복을 입고 예비군은 군복을 입고 어머니는 유모차를 끌고 광화문에 온다. 그들이 섞이면 그곳이 그대로 작은 사회를 이룬다. 그리고 그 곳에서 큰 사회를 읽어내는 감수성도 움튼다.

    소소한 이야기들을 먹고 자라온 촛불

    몇 가지 사례를 취해보자. 촛불 집회를 생중계하는 오마이TV에 방송장비를 마련하라며 자발적 시청료 내기운동이 일어난 결과 8일 만에 1억 원을 돌파했다. 2만9888건의 성금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불매운동의 과정에서 르카프가 <조선일보>에 광고를 실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 사실을 성의 있게 네티즌들에게 알리자, 아고라의 네티즌들은 르카프에 티셔츠를 단체주문하기로 했다.

    티셔츠의 앞뒷면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1조 1항과 2항이 새겨졌다. 아이디가 ‘다인아빠’라는 분은 새벽까지 KBS를 사수하는 시민들을 위해 며칠이고 현장에서 라면을 끓였는데, 그 분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늘어 KBS에 있던 이들은 며칠 전에는 닭죽이더니 오늘은 반계탕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2개월 간 촛불은 이렇듯 소소한 이야기들을 먹고 자라왔다. 함께 살아가고 싸운다는 이 소박한 감각이야말로 이번 운동이 낳은 너무도 중요한 성과이다. 이 성과는 이번에 화물노조의 파업에 대한 지지로 표현되었다.

    아마도 <조선일보>의 위기가 이상의 내용을 웅변하고 있지 않을까. 현재 <조선일보> 반대운동이 벌어져 이 신문은 구독률이 떨어지고 광고수익도 엄청난 손해를 봤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위기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오고 있다.

    현재의 사태는 <조선일보>가 쥘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있다. 촛불의 행방과 <조선일보>의 판단력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또한 이념적인 성향은 차치하더라도, 이 신문은 수동적이고 무자각적인 독자를 필요로 한다.

    운동의 땔감된 조선일보의 진짜 위기

    이제껏 위기론으로 이쪽에서 콕 찌르면 저리로 펄쩍 뛰는 독자를 만들고자 분주히 노력해왔다. 그리하여 <조선일보>는 대중예찬론 속에 대중을 노예로 삼는 논리를 끼워 팔아왔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회 안에 여러 분단선을 그려 개인을 1차 집단 안에 묶어두려 했다. 그래야 사회적 연대감을 상실한 개인은 무력해지고, 이 신문의 논조는 먹혀들어간다.

    하지만 현재 <조선일보>는 운동의 땔감이 되고 말았다. 매일 매일 네티즌들은 스스로에게 ‘숙제’를 부과한다. <조선일보> 기사를 비평적으로 분석하고, 이 신문에 광고를 낸 기업에게 전화를 걸어 이 신문의 폐해를 설명하며 광고 중단을 요청한다. 이번 촛불은 쉽게 꺼질 수가 없다. <조선일보>가 있으니 말이다. <조선일보>는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이처럼 길게 적어본 까닭은 이것이다. 이러한 무형의 성과를 대의민주주의나 제도정치로 잴 수 있는가? 정치적 해결로 얻어낼 수 있는가? 저 토론회의 많은 발언자는 촛불집회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서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제도정치로 얻어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말해야 할 때이지 않은가.

    거리의 정치(만약 인터넷도 학교도 회사도 집도 경우에 따라서 거리라고 한다면)는 제도정치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맥이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자기 밑천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거리의 정치의 궁극적인 표현은 법조문이나 협상안이 아닌 곳에 담길 수도 있다.

    4. 정권 퇴진 요구는 기로인가?

    하지만 기로에 왔는지도 모른다. 우선 정부는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대부분 내놓았다. 소고기 추가협상, 민영화 포기, 대운하 사업단 해체, 대국민 사과까지. 하지만 반쪽짜리 협상이고 시간지연책들인 것 같아 아직도 국민들은 못미덥다. 고민이 깊다.

    그리고 예고했던 20일이 다가왔다. 이제 정권 퇴진을 요구해야 하는가. 역시, 판단은 대중의 몫이다. 16일자 여론조사를 따르면, 20일까지 재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겠다는 설문 문항에 찬성이 40.2%, 반대가 55.4%였다.

    이 여론조사는 여전히 반대가 더 많다는 해석도 찬성이 과반수 가까이 육박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중의 판단인가.

    잠시 우회하자. 이번 정권 퇴진 운동을 두고 정책상의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자충수가 되어 오히려 지배세력이 결집한 빌미가 되어 역습의 기회를 내어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는데, 이는 현실적인 판단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고기 재협상은 온건론, 정권 퇴진 운동은 강경론이라거나, 정권 퇴진 요구는 소고기 재협상 요구보다 수위가 높은 강력한 카드라는 발상에는 동의할 수 없다.

    강경 vs 온건론 구분법의 문제

    소고기 재협상과 정권 퇴진은 단계론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촛불의 힘은 물리력의 산술적인 조합이 아니다. 정권 퇴진 요구에 사람들이 적게 참가하고 지지여론이 낮으면 정권 퇴진 요구는 접고 소고기 재협상을 요구하고, 사람들이 많이 참가하고 지지여론이 높으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중이 통일된 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 퇴진 요구는 ‘도 아니면 모’가 되기 십상이라는 진단은 상황 바깥에서 내놓은 것일 따름이다.

    물론 우리는 지금 산적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슈들 사이에 중요성을 따지고 차분하게 우선순위를 만드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 전에 혹은 그와 동시에 마음에 진 응어리를 한껏 풀어내야 한다. 만약 “이명박 물러가라”라는 말이 “소고기 재협상”보다 더욱 속 시원하다면 외쳐야 한다.

    그것을 누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밖에도 다른 여러 목소리가 이제껏 마냥 갖가지 방식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이처럼 정권 퇴진 요구가 섞여 앞으로 터져 나올 여러 목소리를 분열의 징후가 아니라 힘의 충만함으로 읽어내려면, 읽어내는 측의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첫째, 상황을 소고기 국면에서 각종 정책을 반대하는 국면을 거쳐 정권 퇴진 국면으로 나아가는 단계론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場) 안에서 각각의 요구들이 서로 기능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파악해야 한다.

    둘째,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과를 읽어낼 수 있는 여러 잣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운동의 성패 여부를 정권 교체나 정책 변경으로 고정시켜놓아서는 안 된다.

    5. 촛불, 자신과의 승부

    그리고 이제 상황을 읽어내는 측만이 아니라 촛불을 든 대중 자신에게도 시련이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물어보자. 만약 우리의 운동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 계기는 어디서 찾아올까. 아마도 우리는 정부의 물리력에 쉽사리 굴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2개월이 증명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정부가 언론을 활용하여 어물쩡 넘기려 해도 간단히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역시 지난 2개월이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무너진다면, 오히려 그 계기는 안에서 찾아올지 모른다.

    만약 현재의 숱한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정부가 미봉책으로 일관하여 결국 국민과의 전면전으로 접어든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그 희생의 무게를 모두의 몫으로 조금씩 나눠 갖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그 희생당하는 이는 물리적인 탄압으로 상처 입은 자들만이 아니라 내부고발자나 언론사 등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어려움은 역시 안에서 찾아올 것이다. 전면전에 나서는 경우 촛불은 필시 진보정당이나 노동조합을 포함한 기존의 운동조직과 맺어져야 한다. 그 경우 의사조율에 성공할 수 있을까. 더욱이 지금도 아고라에 들어가면, 최근 이명박 정부가 꺼내든 카드나 촛불의 향방에 대한 입장이 갈라지고 있다. 상황이 며칠 사이 미묘하게 전개된 만큼, 그 논의에는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서자/말자만이 아닌 그 사이에서 보다 복잡한 시각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이들은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 반대하지만 정권 퇴진 요구는 이르다거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이들과 어떻게 기능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스스로 만들어놓은 금기

    물론 이 역시 활발한 논의를 통해 문제를 조금씩 풀어가고 있지만, 혹여나 전면전의 단계로 들어선다면 촛불이 받아들이는 품은 갑자기 좁아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기성의 운동조직에게 촛불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될 것이며, 승리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전면전이 되었을 때 대중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금기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비폭력주의 말이다. 지금까지 비폭력주의는 정권에 대한 도덕성의 우위를 뜻했고, 그 자체가 운동의 새로움으로 받아들여져 운동이 발전하는 데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시민이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비폭력주의가 유지된 까닭이다.

    문제는 비폭력주의가 ‘순수성’에 갇혀버리는 경우다. 그렇다면 상황에 따라 반(反)폭력으로 자신을 지켜야 할 경우, 혹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경우도 순수에서의 변질로 간주되어 버린다. 이는 촛불의 운신의 폭을 좁히고, ‘불순’이라는 무기를 상대에게 내어주는 꼴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금기를 유연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이제 촛불은 자신과의 승부에 직면해야 하는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다. 자신과의 승부에 맞닥뜨리는 것은 그만큼 촛불이 성장한 까닭이다. 그 시련을 버텨내기 위해서도 우리가 거둬온 무형의 성과를 스스로 되새기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과의 승부에 나설 채비를 이제껏 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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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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